리베르다지 글리세리우 한인타운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리베르다지구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주소 Liberdade, São Paulo, SP, Brasil
성격 한인 거주지
정의

1960년대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로 이주한 한인들이 리베르다지구에 형성한 집단 거주지.

개설

초기 한인 농업 이민자들 대부분은 퇴역 군인 출신이거나 상인 출신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의 농업 장려금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농촌의 열악한 환경과 어려움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녀 교육을 위해, 당시 브라질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농민들의 도시로의 이주 물결을 타고 한국의 집단 영농 이민 개시 3년 만에 한국인 90%가 상파울루시로 모여들었다. 당시 한인들은 포르투갈어로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본인촌’이었던 리베르다지구(Liberdade區) 내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아 정착하였다. 비록 아파트는 새것이었으나, 한인들은 그 동네가 강도 및 살인, 그리고 매춘 지역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명칭 유래

1962년 문화사절단[15명]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고광순의 진술에 따르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한국말 말고 일본말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밀집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촌이 일본인 밀집 지역 리베르다지와 붙어 있는 곳에 형성되었다. (중략) 우리가 처음 마련한 아리랑 농장도 일본인이 경영하던 농장이었다.”

리베르다지 글리세리우 한인타운은 ‘빌라 코레아나 노 브라질(Vila Coreana no Brasil)’[브라질 한인마을]로 불렸다. 당시 한인들은 “마치 전쟁 중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준비가 된 사람들처럼 물건과 옷을 사과 상자나 옷 보따리에 보관하고 살면서도” 낮에는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렸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밖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들의 소리와 한국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는 이곳을 ‘한국인촌’이라고 부른다.

형성 및 변천

‘한국인촌’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가장 큰 원인은 우선 집세가 비교적 쌌고, 시내 중심가와 가까울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일본어 구사력으로 일본인들에게 브라질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인들끼리 모여 살게 되면서 한국의 문화나 풍습과는 전혀 다른 브라질 문화로부터 ‘문화적 충격’을 덜 받고, 또한 여성 의류 제조업인 ‘제품’을 중심으로 구축된 생존 메커니즘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장점의 하나였다. 따라서 당시 한인은 그 누구라도[친척이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동포들과의 공존을 추구하며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즉 포르투갈어에 대한 무지, 한인들과의 상호 협력을 유지하려는 기대, 그리고 같은 동포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위안 등이 한인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한 것이다.

한인들은 ‘한국인촌’에서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창출해 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혹은 배가 항해 중 정박했던 항구에서 산 물건들을 가가호호 돌며 행상으로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자동차를 생산하거나 혹은 그것을 갖는다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한 시절이라, 행상을 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브라질 국민차로 불린 푸스카(Fusca)를 타고 출근하는 광경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게 되었다. 여자들이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물건을 파는 동안 남자들은 자동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기다렸다. 이러한 현상의 저변에는 브라질 사람들이 동양인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경계심을 덜 보였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더 이상 팔 물건이 없자, 당시 브라질의 일본인 사회에서 유행하던 ‘미상가(miçãnga)’라고 불리던 구슬 백을 만들거나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1970년 초 브라질에 도착한 기술 이민자들 역시 곧바로 상파울루의 한국인촌에 집결하였다. 그들 중에는 일정 금액의 투자 자본을 지닌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 출신의 전문 의류업 종사자들이 섞여 있어서, 한인들의 주요 업종인 의류 제조업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참고로 1970년대 중반 브라질 한인의 수는 1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자연환경

‘브라질 한국인촌’으로도 불리는 리베르다지 글리세리우 한인타운리베르다지구의 글리세리우(Glicério) 길과 콘지 데 사르제다스(Conde de Sarzedas) 길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현황

1990년대 이후 많은 한인이 봉헤치루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2024년 기준 리베르다지 글리세리우 한인타운에 살고 있는 한인은 거의 없다. 남아 있는 흔적은 낡은 한인 교회 몇 곳과 이곳과 가까운 데에 있는 브라질 한인회관 정도이다. 대한노인회 브라질지회재브라질 대한부인회의 사무실도 브라질 한인회관 바로 옆에 있는데, 2024년에 제38대 브라질 한인회가 이를 매각하겠다고 발표한 상태이다. 그것은 이 지역이 여전히 낙후하여 치안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이인길, 『송암문학전집』(1983)
  • 최금좌, 「신자유주의 시대 재브라질 한인사회의 성격과 전망」(『재외동포사총서』, 국사편찬위원회, 2007. 7.)
  • 최금좌, 『코리아타운과 한국문화』(북코리아, 2012. 12. 20.)
  • 최금좌, 「삼바 춤을 출 수 없었던 재 브라질 한인교포사회: 그 발자취와 세계화 시대의 전망」(『국제지역연구』4-2,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00)
  • Choi Keum Joa, 「Além do Arco-Íris: A Imigração Coreana no Brasil」(Universidade de So Paulo, 1991. 5.)
  • 인터뷰(브라질 한인 오응서, 1989. 2.~1989. 5.)
  • 인터뷰(브라질 한인 고광순, 200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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