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馨權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4월 |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0월 |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 활동지 | 중국 상해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권업회 부회장|대한민국 임시 정부 전권 대표 |
일제 강점기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형권은 1910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대동공보』 재발간에 참여하였고, 1911년 권업회에 참여하여 부회장을 지냈다. 1919년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여 9월 이동휘, 김립 등 한인사회당의 주요 당원들과 함께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 4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전권 위원으로 선정되어 5월 말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한인사회당 대표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던 박진순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정부와 교섭을 벌여 금화 200만 루블을 제공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1920년 9월 초 약속받은 금화 200만 루블 중 40만 루블을 받아 박진순과 함께 귀환 길에 올랐다. 중국 상해로 돌아오다가 1920년 10월 러시아 옴스크에서 열린 제1회 전로고려인대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자 자격으로 축사를 하였다.
한형권은 다시 중국 상해로 향하던 중 1920년 10월 말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1919년 7월 박진순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로 러시아 모스크바로 파견됐다가 먼저 귀환했던 박애, 1920년 9월 상해 한인공산당 대표로 러시아 모스크바로 향하던 김립과 계봉우를 만나 통일 공산당 창립 대회 소집 문제, 모스크바 자금 문제, 동양공산당 조직 문제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 회의 결과 금화 40만 루블은 김립과 박진순이 상해에 전달하기로 하고, 한형권은 러시아 정부가 약속한 추가 자금을 수령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열린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된 한형권은 1921년 9월 러시아 정부로부터 약속 받은 금액 중 2차분 20만 루블을 독일 베를린에서 수령하여 11월에 중국 상해로 돌아왔다. 모스크바 자금 2차분은 국민대표회를 준비하던 세력에게 전달되었다. 1923년 열린 국민대표회에서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형권은 1945년 10월 중국 장춘에서 동북한국민회연합회에 참여하고 간부가 되었다.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