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安洪根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1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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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8월 이후 |
| 몰년 시기/일시 | 1928년 5월 7일 |
| 추모 시기/일시 | 2010년 |
| 출생지 |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시 |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시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재러 한인 독립운동가.
안홍근은 1913년 권업회에서 전개한 ‘고 이준공 전기간행 및 유족 규휼 의연금 모집’에 당시 돈으로 30전을 기부하는 등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의 상호 부조를 위해 힘썼다. 1918년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유동열, 양기탁 등과 함께 조선망명자정치회의에 참가했다.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결합해 볼셰비키와 합작하자는 이동휘의 노선을 지지한 안홍근은 1918년 4월 28일 이동휘, 김립, 오와실리, 오성묵, 심백원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 창당 발기회를 개최했다. 1918년 4월 5일 일본인 2명이 살해된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육전대[해병대의 전 이름]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에 상륙시켰다. 크라스노쉐코프와 한인사회당 간에 일본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한 공동 대책이 논의되었고, 1918년 7월 한인적위대가 결성되었다. 원동인민위원회의 승인과 지원 하에 하바롭스크, 이만, 러시아와 중국 국경 지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바라바쉬, 연추(煙秋) 등에서 이동휘, 유동열, 김립, 이한영 등이 대원을 모집했고, 100여 명이 한인적위대원으로 입대했다. 한인적위대에 안홍근을 비롯하여 이인섭, 최방덕, 박안드레이, 최인욱, 박영식, 박기수 등이 참가했다. 1918년 8월 말 일본군의 하바롭스크 진입이 가까워오자 빨치산 체제로 전환한 한인사회당은 흑룡강을 따라 후퇴할 것을 결정했다. 안홍근은 유동열과 전일의 지휘로 하바롭스크 방어전에 참가했고, 후퇴하면서 부라뵤바-아무르스까야 역 전투와 이만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당시 안홍근은 김립,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이인섭, 심백원 등과 함께 러시아 기선 바론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강을 통해 블라고베센스크 방향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백위군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로 압송되었다. 김알렉산드라를 제외한 안홍근, 김립, 이인섭 등 십여 명은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해 석방되었다. 이후 안홍근의 행적은 1922년 1월 연해주 빨치산스크[수청]에서 독립군자금을 모금한 활동이 마지막으로 확인되었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안홍근의 공적을 기려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