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得鉉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 지역 | 일본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907년 |
|---|---|
|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
| 원어 항목명 | 朴得鉉 |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공산주의 계통의 노동 운동, 적색 구원 운동을 벌인 한인 활동가.
박득현은 1907년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사상을 품었으며, 15세 때 평양의 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1926년 학업을 위해 도쿄로 건너가 일하면서 사회 문제에 심취해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했다.
박득현은 1927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노총]에 가입해 중앙위원 쟁의조사부장, 조직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28년 2월 고려 공산청년회[공청] 일본부에 가입해 메구로[目黑]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가 5월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4월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해 남부 야체이카에 소속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부터 시작된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에 대한 탄압으로 박득현도 검거되어 기소당하였다. 1931년 제1심 판결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31년 11월 보석으로 풀려난 후 혁명 운동가 구원 단체인 일본적색구원회[적구]에 가입하였고, 1932년 4월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일본적색구원회에서는 동생 박득룡 밑에서 도쿄지방위원회 조사이[城西] 지구에 소속되어 본인도 연루되었던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의 공판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2년 8월 제2심 판결에서 다시 징역 5년을 판결받았지만 소재 불명으로 구분되어 실제로 복역은 하지 않았다. 1933년 9월 박득룡 등 일본적색구원회 회원과 함께 다시 검거된 이후 전향해 조선으로 돌아와 1938년 전선사상보국연맹의 임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