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得龍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 지역 | 일본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10월 2일 |
|---|---|
|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
| 원어 항목명 | 朴得龍 |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적색구원회 등에서 활동한 재일 조선인 활동가.
박득룡은 1908년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마친 후 서울의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공부한 후, 1926년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들어갔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자퇴하였다.
박득룡은 인정식 등과 교류하면서 사회 운동에 참가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927년 4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노총]에 가입하였고, 1928년 3월 재일본조선청년동맹[조청] 도쿄지부에 들어가 조직선전부 책임자가 되어 기관지 『청년 조선』을 편집하였다. 1928년 3월 인정식의 권유로 고려 공산청년회[공청] 일본부에 가입하여, 같은 해 5월 도쿄 다카다[高田] 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어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안에 고려 공산청년회 프랙션을 구성하였다. 같은 해 6월 오사카로 파견되어 고려 공산청년회 일본부의 오사카 야체이카를 조직하였지만 8월부터 시작된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에 대한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검거 및 기소당하였다. 1931년 3월 제1심 판결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받았는데, 보석으로 풀려났다.
1931년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고 좌익 운동가들의 구원 활동을 하는 일본적색구원회의 프랙션을 담당하였다. 당초 일본적색구원회 도쿄지방위원회 조사이[城西] 지구 소속이었지만, 9월에 본부 소속이 되어 나고야[名古屋] 지방의 조직 재건에 노력하였다. 1932년 3월 일본적색구원회 전국대회에 나고야 지방 대표로서 참가하였다. 같은 해 5월 다시 도쿄지방 조직부원이 되고, 7월 일본적색구원회 식민지대책부가 설치되어 부원으로서 여러 조사 활동을 당담하였다. 1933년 4월경 일본적색구원회 중앙구원위안부원이 되어 형인 박득현 등과 함께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 사건의 공판 투쟁에 참가하였다. 1933년 9월 박득현 등 다른 일본적색구원회 회원과 함께 재차 검거되었고 이후 전향해 조선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