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張錠壽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 지역 | 일본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909년 4월 7일[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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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동 |
| 학교|수학지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동 |
| 원어 항목명 | 張錠寿 |
| 성격 | 사회운동가 |
| 성별 | 남 |
1909년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사회 운동가.
장정수는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보통학교 재학중인 1921년에 동맹휴교투쟁에 참여하였고 1926년에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1929년에 사할린에 있는 오우지제지[王子製紙]회사에서 일했으나, 병을 얻어 반년 만에 오사카로 돌아갔다. 그 후 노동 운동에 참여하여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의 산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 조선어 신문 『민중시보』[1935년 6월 15일 창간]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오사카 조선인협회 결성준비회와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결성 대회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재일본조선인연맹 오사카본부가 조직되자 조직부장, 청년부장을 겸임하였고, 일본 공산당 재건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1945년 10~12월 재일본조선인연맹이 해방된 조국으로 보낸 10명의 본국 특파원에 포함되었다. 1946년 재일본조선인연맹 와카야마본부[和歌山本部]의 결성에 관여하였다. 1947년 일본 공산당의 조선인 대책을 둘러싸고 중앙위원인 김천해, 박은철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48년 초 한신 교육투쟁[阪神教育闘争] 때에 시위의 경비 책임자라고 체포되었다. 1949년 9월 연합국 최고사령부[GHQ]가 재일본조선인연맹을 강제 해산한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가은 해 12월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에 참여하였으나, 이듬해 한국 전쟁 방침을 둘러싸고 도쿠다 규이치[徳田球一]와 의견 대립을 빚어 일본 공산당과 절연하였다. 1951년 와카야마현(和歌山)에서 활동했고, 1958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호쿠지부[紀北支部] 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66년부터는 모리모토구미[森本組]에서 일하는 한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고문직을 맡았다. 1986년 박애자(朴愛子)의 지문 날인 거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