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용

한자 金斗鎔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3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함흥시
원어 항목명 金斗鎔
성격 사회주의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일본과 북한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개설

김두용은 190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재일 한인 노동 운동, 공산주의 운동, 문예 운동 등에 참가하였다. 해방 공간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로 일본 공산당원으로 재일 한인 운동에 참가하였다. 1948년 북한으로 가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김두용은 일본에서 구제중학(舊制中學)·구제3고(舊制三高)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미학과를 중퇴하였다. 신인회(新人會)에 가입하였고, 반제동맹(反帝同盟)에서도 활동하였다. 이후 제3전선에 가담하여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도쿄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8년 5월 고려 공산청년회 일본부 기관지 편집 겸 출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5월 무산자사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기관지 『무산자』에 여러 글을 발표하였다. 그 외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라는 팸플릿을 작성해 배포하였다.

김두용은 1920년대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일본노동자전국협의회 해소를 주도한 인물이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해소는 1928년 3~4월에 개최된 제4회 프로핀테른 대회 및 이후에 열린 일본문제소위원회 결정으로 촉발되었다. 이 결정은 재일 한인 노동자를 일본의 좌파계 노동조합 속에서 조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29년에 프로핀테른에 가맹한 일본의 노동 단체인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의 지도부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에게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발전적으로 해소할 것을 지시했다. 1929년 12월 김두용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위원 자격으로 김호영(金浩永) 등과 함께 이 지시를 수행했다. 지시에 대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 각 조직들 내부에서 반대 의견과 시기상조론도 있었지만 결국 1929년 말에 해체하고 일부 조직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합동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이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가입한 재일 한인 노동자는 대폭 감소했다. 1929년 12월 해소 당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수는 33,000여 명이었으나, 1931년 말까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산하 노동조합에 가입한 한인은 4,500명으로 격감하였다. 이후 재일 한인은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지 못해 노동자의 권리를 행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김두용은 1930년 4월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검거된 후 해방 때까지 피체와 투옥을 거듭했다. 1931년 11월 동지사(同志社)를 조직한 후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 조선협의회 위원장, 기관지 『우리동무』 편집장이 되었다. 1933년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도쿄공소원[東京控訴院]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934년 4월 출옥하였다. 1935년 3월 조선예술좌 창립에 참여했고, 1936년 1월 도쿄신연극연구회와 합동해 통합 조선예술좌로 전환할 때 위원장이 되었다. 1936년 2월경 조선신문사 편집국원이 되었으며 7월에 검거되어 1939년 1월 도쿄공소원에서 징역 1년 8월을 선고받았다. 이 시기 수형생활 중 전향했다.

1945년 8월 광복 후 서울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일본에서는 정치범석방운동촉진연맹 결성에 참여하여 연맹의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 결성에 참여하면서, 일본 공산당 조선인부 부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8년 11월 북한으로 건너가 북조선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20인 후보위원 중 한 사람으로, 유일하게 반대표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3차 대회에서는 전향한 전력이 문제가 되어 후보가 되지 못하였다. 역사편찬위원회, 외문출판사 국장, 해주박물관 직원으로 근무하였고, 국제무역위원회 기관지 편집 담당으로 활동하였다. 청진제관공장에서도 근무하였으나 사망 일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저술 및 작품

김두용은 역사 일반과 문학, 선전 문건, 사건에 대한 기사 등 다양한 글을 잡지와 신문기사, 단행본으로 남겼다. 잡지 『전위(前衛)』에 「일본에서 조선인 문제」, 「조선인운동은 전환해 가고 있다」, 「조선인운동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등을 게재하였고, 『무산자』에 「정치적 시각에서 본 예술투쟁」,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 것인가」, 「재일본조선노동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전기(戰旗)』에 「가와사키 난투사건의 진상」, 「조선의 메이데이」를, 『문학평론』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인가 xxx리얼리즘인가」 등을 비롯해 일본의 각종 잡지에 글을 발표했다. 조선에서도 『동아일보』와 『신동아』, 『조선문학』 등 각종 잡지와 신문에 글을 발표했다. 단행본으로 1947년 『일본에서의 반조선민족운동사』(향토서방), 1947년 『조선근대사회사화』(향토서방), 1949년 『조선민족해방투쟁사』(공저) 등을 남겼다.

참고문헌
  • 近代日本社會運動史人物大事典編集委員會, 『近代日本社会運動史人物大事典』(日外アソシエ−ツ, 1996)
  • 내무성 경보국, 『社會運動の狀況』(內務省 警保局, 1930, 1933, 1936, 1937)
  • 내무성 경보국, 『特高月報』(日本 内務省 警保局 保安課, 1932. 6, 1941. 12)
  •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 8.15解放前』(三一書房, 1979)
  • 『조선사회운동사사전』(社會評論社, 1981)
  • 김형준,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역사』(거름, 1986)
  • 정혜경, 『일제시기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연구』(국학자료원, 2001)
  • 김인덕,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가 연구』(국학자료원, 2002)
  • 정혜경, 『항일과 친일의 재일코리안운동』(선인, 2021)
  • 김인덕, 「재일 조선인 운동과 김두용」(『한국민족운동사연구』18,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8)
  • 정혜경, 「1930년대 재일조선인 연극운동과 학생예술좌」(『한국민족운동사연구』3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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