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징용희생자 위령비

한자 韓國人徵用犧牲者慰靈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88년 4월
원어 항목명 韓国人徵用犧牲者慰霊碑
원어 주소 日本国福岡県田川市伊田2734-1 田川市石炭記念公園
영문 주소 Fukuoka-ken, Tagawa-shi, Ita, 2734-1
GPS 좌표 https://www.google.com/maps/place/%E7%94%B0%E5%B7%9D%E5%B8%82%E7%9F%B3%E7%82%AD%E3%83%BB%E6%AD%B4%E5%8F%B2%E5%8D%9A%E7%89%A9%E9%A4%A8/@33.6410625,130.8138446,17z/data=!4m8!1m2!2m1!1z7ZuE7L-g7Jik7Lm07IucIOuLpOqwgOyZgOyLnCDsmKTslYTsnpAg7J207YOAIDI3MzTrsojsp4AgMQ!3m4!1s0x0:0x33743c566c0a0141!8m2!3d33.6408522!4d130.8139079?hl=ko
성격 위령비
크기(높이, 너비, 두께) 높이 3m
관리자 다가와시 석탄 역사 박물관
정의

1988년 재일 한인 징용자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석탄 기념 공원 내에 건립된 위령비.

건립 경위

일본 당국은 1938년 4월 1일에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인적 물적 자금동원을 실시하였다. 인적 동원은 군인군무원, 노무자, 일본군 위안부 등이 해당되는데, 이 가운데 군수물자 생산과 수송에 필요한 인적 자원은 노무자이다. 노무자는 국민징용, 모집, 관알선 등 세가지 경로를 통해 동원하였다. 국민징용령은 국가총동원법 제 4조에 근거해 칙령으로 1939년 7월에 제정된 국민징용령에 따라 시행하였는데, 조선에는 1939년 10월부터 적용하였다. 초기에는 기술직과 군 요원 등을 충족하기 위한 징용이 이루어졌다. 그 후 단계적으로 적용이 확대되어 1941년 9월부터 조선 도내(道內), 도외(道外), 일본, 남양군도 등으로 징용령이 발동되었다. 재일 조선인은 1942년부터 해군징용을 비롯해 도시 거주자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탄광·광산·공장 노동에 징용이 실시되었다. 오사카[大阪]에서 규슈[九州]의 탄광까지 동원된 사례가 있다. 일본 국가총동원기에 일본에는 104만 명의 노무자가 탄광산, 군수공장, 토목건축공사장 등에 동원되었는데, 이 가운데 탄광 등지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가장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장시간 노동과 가혹행위 및 빈번한 사고로 인한 노동 재해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 지역인 지쿠호(筑豊) 탄전의 탄광으로 동원되어 사망한 재일 조선인 징용자를 추모하기 위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다가와지부와 한국인 징용 희생자 위령비 건립 위원회는 1988년 4월에 후쿠오카현[福岡縣] 다가와시[田川市] 소재 석탄 기념 공원 내 석탄·역사 박물관 옆에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규슈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다가와이타[田川伊田]역 앞 석탄 역사 박물관에 있다.

형태

기단과 위령비로 구분된다. 기단에는 비문과 설립 경과 등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이 약 3m 정도이다. 위령비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韓國人徵用犧生者慰靈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은 한글과 일본어로 쓰여 있으며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생물은 모두 저마다 삶을 누리고자 한다”로 시작된다.

현황

현재 다가와시 석탄 역사 박물관 뒷편 공원에 있으며, 역사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일본에서 강제 동원으로 희생된 한국인을 위해 설립된 위령비이다.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역사의 현장이며, 교육의 장으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小田山墓地追悼集會 パンフレット」
  • 川崎在日コリアン生活文化資料館(http://www.halmoni-haraboji.net/exhibit/report/201001fieldwk/page00.html)
  • 허광무·정혜경·김미정, 『일제의 전시 조선인 노동력 동원』 (동북아역사재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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