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憲植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미국 뉴욕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경 |
| 활동지 | 미국 뉴욕주 |
| 원어 항목명 | Heon Sik Kim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독립단 회장 |
일제 강점기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선전 외교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김익환(金益桓)이나 김익승(金益升)의 양자가 되었다.
김헌식은 1869년에 태어났다. 1895년 조선 정부의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수학 도중 임병구, 여병현, 이범수, 안정식, 이하영과 함께 1896년 2월 28일 요코하마[橫濱]를 출발해 캐나다 밴쿠버로 갔다. 당시 주미 공사 서광범(徐光範)의 도움으로 워싱턴에 안착, 흑인 대학인 하워드대학에서 특별과 학생으로 공부하였다. 주미 공사 서광범 밑에서 관원으로 근무했다고 하나 기록된 바가 없어 확실하지 않다.
뉴욕에 정착하여 1907년 서필순, 안정수(安鼎洙), 이원익, 신성구 등과 뉴욕 한인공제회를 설립해 일본의 침략 저의를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이후 스스로 뉴욕 한인애국회 회장으로 자칭하며 1912년 8월 박승렬 납치 사건에 미 국무부의 조사를 촉구하였다. 1918년 11월 뉴욕에서 신성구·조병옥(趙炳玉) 등 18명과 신한회를 조직해 독립 청원서를 미 의회와 국무부에 제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파리강화회의 미국대표단을 이끌고 있는 랜싱(Lansing)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이후 미국 언론에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사실이 보도되어 일본에까지 확산되었다.
1918년 12월 14일~12월 15일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속국동맹회의(小弱屬國同盟會議)에 신한회 대표로 참가해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말 신한회를 대한인독립단으로 바꾸어 회장으로 독립운동에 나섰고, 1943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창간된 『독립』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언론 활동을 펼쳤다. 1951년경 미국 뉴욕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