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羲秉朴容萬活動地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유적/터 |
| 지역 |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미국 중서부에 유니온철도가 들어서면서 철도 인부들이 필요하였고, 광산과 농장 등에도 일손이 부족하였다. 중서부는 서부에 비하여 인심이 후했던 곳이었다. 박용만(朴容萬)과 박희병(朴羲秉)[미국에서는 박장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은 한국에서 유일한(柳一韓), 정한경(鄭翰景), 정한필 등의 소년을 데리고 와 네브래스카(Nebraska)주 커니(Kearney)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콜로라도(Colorado)주 덴버(Denver)시로 옮겨 여관과 한인 노동 주선업을 경영하였다. 이민 초기 백인들은 한인 ‘보스(Boss)’를 통하여 한인 노무자를 고용하였으며 ‘보스’는 보통 노무자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고, 임금이 나오면 숙식비를 떼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박희병은 한인 노동자에게 일을 열심히 주선하였고, 이로 인해 적어도 50명이 넘는 한인들이 덴버에 모여들었다.
1907년 6월 박희병이 병으로 사망하자 박용만은 콜로라도 예비학교[Colorado Preparatory School]에 입학한 후에도 여관과 직업 주선소를 운영하였다. 그러다 덴버에서 1908년 애국동지대표회의를 개최한 박용만은, 회의가 끝난 후 뉴욕주에서 온 윤병구에게 덴버의 여관, 하숙집을 넘기고 9월 네브라스카대학교에 입학하러 덴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