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人一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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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캐나다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항목명 | Pioneers of Korean Canadians in Cana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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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인 사회 형성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한인 인사들.
초기 캐나다 한인은 한국에서 직접 온 경우와 국외에서 재이주한 경우로 나눈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국에서 바로 온 사람들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캐나다로 재이주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초창기 재이주 그룹은 미국 유학생 출신, 덴마크 등 농업 연수생 출신, 독일 광부와 간호사 출신, 베트남 파견 기술자 출신, 남미[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농업 이민 출신 등으로 교육 수준은 여느 나라의 이민자보다도 높았다. 한인들은 캐나다에서 비주류이나 괄목할 만한 능력으로 의사, 변호사, 경찰관, 장성, 교도관, 교수 등 한인 1호 인물들이 각 방면에 자리 잡고 있다.
캐나다 한인 사회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선구자들의 눈물과 땀이 있었다. 변호사 강천영, 소셜 워커 이종민, 캐나다 장성 정환석, 여성 목회자 조경자, 가정의 의사 최등영, 교사 송민자, 경찰관 임성찬 등 무수한 ‘한인 1호’가 있다. 캐나다 ‘한인 1호’들은 가지 않았던 길을 가장 앞서 밟으며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가슴 뿌듯한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선구자적인 캐나다 ‘한인 1호’의 이야기는 이민 사회의 소중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몇 사람의 캐나다 ‘한인 1호’를 소개하고자 한다.
홍중표[Jay Hong]는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주 한인 최초이자 유일의 치안판사[Justice of Peace]이다. 인하대학교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토론토대학교로 유학을 와서 1970년 금속공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부인과 함께 편의점을 경영하였고, 맥스밀크 프랜차이즈협회를 조직해 여러 해 동안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캐나다 온타리오주 복합문화자문위원회에서 한인 대표로 3년간, 태평양경제기획위원회에서 5년간 일하면서 조 클락, 빌 데이비스, 마이클 해리스 등 유력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아 1982년 6월 아시아계 최초로 토론토 경찰불만조사위원회[MTPCB] 위원으로 위촉되어 4년간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93년 52세의 나이에 한인 최초로 시민권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5년의 임기를 마친 뒤 치안판사 시험에 응시, 59세 때인 2000년에 한인 최초로 치안판사에 임명되어 온타리오주 즉심법원 토론토 동부법정에서 근무하였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치안판사들은 전체 재판의 약 70%를 담당하고 있다. 전체 300여 명 가운데 토론토에 70명의 치안판사가 있다. 치안판사는 사법부의 중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간단한 법률문제뿐 아니라 관장 분야가 많다. 체포, 수색영장 발부, 교육, 담배 규제, 환경, 세금 포탈, 소방 관리, 식당, 주류 통제, 낚시 및 사냥, 고속도로 법규, 주립공원법, 공휴일 영업 등에 이르기까지 실생활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한다.
치안판사는 반드시 법조인 출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무원, 교육자, 종교인, 커뮤니티 지도자 등 비사법 전문가들 가운데서도 경력과 함께 소정의 시험을 통해 선발한다. 왜냐하면 판결을 내릴 때에 일반 시민들의 상식에 따라 판결하기 위해서 비법조인을 채용하는 것이다. 홍중표 판사의 1남 2녀 중 토론토대학교를 나온 큰딸은 남편과 개인 사업을 하고 있고, 둘째 딸은 가정의 의사, 막내아들은 뉴욕 맨해튼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허순옥은 직업 면에서 캐나다 한인 최초라는 기록을 2개나 보유한 인물이다. 1973년 더프린/에글린트(Dufferin/Eglinton)에 한인 최초의 미용실인 ‘수산미용실’을 개업해 6년간 운영하였다. 이후 앨버타(Alberta)주 캘거리(Calgary)를 거쳐 킹스턴(Kingston)으로 이주해 1991년 한인 최초의 여자 교도관이 되었다. 2004년 정년퇴직하며 연방 공안장관과 연방 총리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하였다.
허순옥은 험버칼리지(Humber College)에서 보조금을 받으며 2년간의 미용 견습 과정을 거쳐 1973년 주정부 인정 미용사 자격을 취득한 후, 12월에 바로 미용실을 개업하였다. 당시 한인이 운영하는 미용실로 여성이 운영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블루어 한인타운이 자리를 잡으며 미용실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그러나 허순옥은 6년 만에 미용실을 정리하고 온 가족이 캘거리로 이주하였다. 캘거리에서도 미용실을 열어 볼까 하다가 결국 식당을 운영하였다. 5년쯤 잘되던 식당은 1986년 10월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칼리지에 입학해 비즈니스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전화국과 우체국 등에서 일을 하였다. 그러다 큰아들 진영이 퀸스대학교 법대에 진학한 것을 계기로 킹스턴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킹스턴에서 편의점 매니저를 하다 보니 교도관이나 군인들의 연봉이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지원서를 제출한 뒤 일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교정당국에서 시험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에세이와 면접시험을 보고 합격하였다. 면접은 3명의 면접관이 3시간에 걸쳐 면접을 볼 정도로 난도가 높았다. 시험에 합격한 후엔 정식으로 교도관학교 과정을 이수하였다.
교도관학교에서 보안 규정, 법정 용어 등의 이론 분야와 사격술, 합기도, 가스총 및 곤봉 사용법 등의 실기 과목에 모두 합격하였다. 킹스턴 교도관 학교에서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 하나는 51세 나이로 최고령 이수자였고, 다른 하나는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교도관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1년 4월 킹스턴 여자교도소의 교도관으로 첫 출근을 하였다. 이후 2004년 정년퇴직하였다. 슬하의 3남매 중 장남은 한국에서 국제변호사로, 둘째는 서울시립교향악단 타악기 주자로, 막내딸은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주 멍크턴(Moncton)에서 CBC TV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민 초창기이던 1970년대만 해도 한인들의 위상은 초라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 시절 갓 이민 온 젊은 한인이 거대 정유사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그야말로 다윗의 기적이라고 할 만하였다. 주인공은 송완일이다. 송완일의 승리는 캐나다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한편, 대법원 판례를 남김으로써 사법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집념의 주인공 송완일은 1972년 5월 독립 이민으로 캐나다에 왔다. 동부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 주도 핼리팩스(Halifax)에서 약 100㎞ 떨어진 플리머스라는 작은 농촌에 정착했지만 자녀 교육과 수입 문제로 토론토로 이주하였다. 송완일이 처음 얻은 직장이 미국의 나토마스 오브 캐나다(Natomas of Canada)라는 회사의 주유소 매니저였다. 주유소 일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무척 힘들었는데 비해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비나 눈이 와도 피할 곳조차 없는 열악한 근무조건을 견뎌야 하였다.
임금인상 요구가 번번이 거절되자 노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곳곳에서 일하는 주유소 종업원들을 규합해 노조를 결성,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다 회사 측의 보복 조치로 해고당해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송완일은 근로계약의 문제점과 부당해고 사실을 노동부에 알리고 지방법원에 재소, 승소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회사 측의 항소로 고등법원에서 5년간이나 재판이 계속됐고 결과는 패소였다. 그러나 대기업의 횡포에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미연방 대법원에 상고를 하였다.
최후의 일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변호사라고 판단, 당시 유명한 노동문제 전문 변호사인 밥 레이(Bob Rae)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사정을 들은 밥 레이는 핑크(Fink)라는 유명 변호사를 추천해 줬다. 결국 그로부터 2년여 만인 1984년 4월 25일 대법원은 송완일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근로자들의 권리를 명시한 판례로 캐나다 사법사와 노동 운동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한 젊은 이민자의 뚝심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판결 때문에 다윗에게 치명타를 입은 골리앗 신세가 된 해당 정유업체는 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송완일은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 캐나다 한인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양심수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가족들을 도왔던 목요기도회 회장을 지냈고, 2005년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캐나다 동부지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3년엔 한인합창단 이사장직을 역임하였다.
강찬영 변호사는 캐나다 최초의 한인 변호사로서 오스구드 홀 로스쿨(Osgoode Hall Law School)을 1979년에 졸업한 후 1981년 4월부터 현재까지 약 40년간을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강찬영은 캐나다에서 10명 이상의 한인 변호사들을 훈련, 배출하고 한인 사회에서 신한은행 이사, 온타리오 복권공사 이사, 메트로 YMCA 이사, 한인 YMCA 이사를 역임했고 장막장이 사역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캐나다 최초 한인 군 장성 정환석은 코모도어·닥터 정이라고 불린다. 11세 때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정착하였다. 토론토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1981년에 군에 입대해 군의관으로 근무하였다. 1991년 걸프전 때는 수석 장교로 참전하였다. 1993년 귀국 후 오타와(Ottawa)에서 프랑스어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2005년 로열로드대학에서 리더십 과정 석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사관학교에서는 국가안보학을 전공하였다. 군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정환석은 2009년 한인 최초로 장성, 즉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코모도어·닥터 정은 캐나다 군내 의료를 총책임지는 의무감[Surgeon General]이었다. 캐나다 정부 복합문화부는 코모도어·닥터 정이 “한국계 캐나다인 최초로 그 자리에서 복무하였다”고 밝혔다. 31년간 군의관 복무 후 캐나다 군인과 연방 경찰을 위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2015년에 왕립캐나다사관학교[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RMCC]의 이사[Board of Government]에 임명되어 화제가 되었다. 왕립캐나다사관학교 이사는 이사회를 통해 학교 교육·행정을 감독하는 자리다.
가정의 제도는 흔히 한국과 캐나다 의료 시스템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한국 환자들은 각 분야 전문의사에게 직접 찾아가 진료를 받지만 캐나다에서는 평소 가족들의 건강을 진단, 치유, 관리하는 가정의의 소견에 따라 전문의를 만난다. 가정의는 캐나다 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캐나다 한인 1호 가정의는 최등영이다. 최등영은 하루 5,000명의 환자를 받았으며 2010년에 은퇴하였다.
한인들은 소수민족 중에서 주류 정계 진출이 미미한 실정이다. 한인 1세 중 정치적,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캐나다 한인 최초의 주 장관 조성준이다. 1967년 한국외국어대학 영어학과를 졸업하고 미국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이민 인터뷰를 보고 통과하였다. 1967년 처음엔 밴쿠버로 이민을 왔는데 당시에는 인종차별이 아주 심하였다. 캐나다에서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결심한 것이 공부를 열심히 해 주류사회에서 성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접시닦이를 시작으로 학교 청소부, 석면 광산에서의 광부로 세 가지 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 명문대인 유비시(UBC)를 다녔다. 그후 토론토에 있는 친구가 토론토는 밴쿠버와는 달리 직장도 많고 기회가 많다고 추천해서 토론토로 건너와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토론토대학교에 진학해 석사 2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셜워커[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한국에서 박종철 군 고문 사망 사건이 터졌다. 이에 분노해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를 위해 인권운동을 시작하였다.
미국의 제시 잭슨 목사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군부독재 타도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택연금 돼 있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캐나다 한인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 잡게 됐고 꾸준히 정계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1988년 신민당의 권유로 연방 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하였다. 하지만 그때 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1991년 당시 메트로 토론토 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유색인종 최초로 당선되면서 정치인생이 시작되었다.
이후 시의원 8선, 2016년 온타리오주 보궐선거에서 한국계 최초로 승리해 온타리오주 의회에 입성한 이래 2018년 6월 재선에 성공했고 장관직까지 올랐다. 온타리오주 노인복지부 장관으로 일하였다. 한국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제도이지만 캐나다는 총선을 통해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다. 또 한국과 캐나다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은 중앙정부 부처 중심이지만 캐나다는 이민, 국방, 외교 등은 연방정부가, 교육, 의료, 보건 등은 주정부가 하는 등 역할이 철저히 나뉘어져 있다. 이런 면에서 주정부의 장관은 그 권한과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