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日帝強占期美國-新渡學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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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원어 항목명 | The Story about Sindo-students, who had come to New England in Japanese colonial e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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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미국 뉴잉글랜드 신도 학생의 이력과 활동.
한말(韓末)은 변혁의 시간이었으며, 한반도는 격전과 변혁의 공간이었다. 변혁의 시공간을 지배한 이념은 사회진화론과 문명과 야만의 담론이었다. 적자와 우등한 국가만이 생존할 수 있고, 서구 유럽과 백인종으로부터 문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식민지 지배가 당연시되는 시공간에 한국과 한국인은 놓이게 되었다. 한말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인 한국을 문명국의 대열에 놓기 위해서 언론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인재들을 해외에 유학 보냈다. 한말 유학을 간 절대 다수는 일본에 유학을 갔지만, 몇몇 인사들은 문명의 모델을 미국에서 구하였으며, 그것을 배우고자 미국에 갔다. 이들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800여 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미국에 유학을 갔고, 그중 적지 않은 인사들이 미국 동부 지역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했다. 여기서는 동부 지역 중 뉴잉글랜드 지역 즉, 버몬트,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메인, 뉴햄프셔 6개 주에 있는 대학과 대학교에서 유학한 한국인들의 현황과 그들의 활동상을 살펴볼 것이다.
한국인의 미국 유학의 법적 근거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통해 마련되었다. 1882년(고종 19) 3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1조에는 “양국 학생은 한국과 미국을 왕래하며 언어, 문자, 법류, 학술, 기예 등을 학습함에 있어 피차 차별 없이 급히 도와주고 화목하여 우의를 돈독히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조미(朝美) 양국 교육 교환 사업의 법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 조항에 근거하여 미국에 유학 간 최초의 사람은 다름 아닌 유길준(俞吉濬)이다. 유길준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보빙사절단]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에 건너간 유길준은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보스턴 바이필드에 있는 거버너스 더머 아카데미(Governer's Dummer Academy)에서 에드워드 S. 모스(Edward S. Morse)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1년간 수학하였다. 유길준이 저술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에드워드 모스로부터 서구문화와 개화를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유학한 또 다른 인사로 백상규(白象圭)를 꼽을 수 있다. 백상규는 로드아일랜드주에 있는 브라운대학교[Brown University]에서 배웠다. 경기도 장단 출신인 백상규는 도미(渡美) 이전 관립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천일은행과 한일은행에서 취체역과 은행장을 맡았던 부친 백완혁의 재력으로 구하기 어렵던 달러를 구할 수 있었고 1896년(고종 33) 미국에 건너왔다.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퍼키오맨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하고 1902년(고종 39) 9월 브라운대학교에 들어갔다. 브라운대학교 무역학과에서 무역과 은행 관련 수업을 들었다. 전공은 부친이 걸은 길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순종 1) 브라운대학교를 졸업하고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으로 돌아갔다.
한국 근현대사에 양으로 음으로 절대적 영향력을 끼쳤던 이승만(李承晩)도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유학한 대표적인 인사였다. 독립협회에서 열혈 투사로 활동한 이승만은 민권 향상을 도모하고자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었다. 대한제국은 만민공동회 관계자 체포령을 내렸고, 이승만도 체포되어 옥중 생활을 하였다. 옥중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영어를 배웠다. 이는 유학생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아펜젤러, 게일 등 재한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905년(고종 42) 조지워싱턴대학교 2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정치학 학사를 받고 1907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원서를 냈다. 하버드대학교는 이승만에게 1년 과정의 석사과정 입학을 승인하였으며, 역사 및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1년 동안 재학하면서 미국외교론, 국제법 등을 수강하였다. 1909년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1910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 중립론」이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제출하였으며, 6월 14일 졸업식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 우드로 윌슨(Woodrow Winson) 학장이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였다. 생활 터전이 국내에 있던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엄혹한 지배하에 놓였다. 식민지가 된 한국인들은 몸과 마음에 ‘독립’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인사들이 러시아, 중국 등에 이주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일부 인사들은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로 들어섰다. 교육구국(敎育救國)의 방안 중 하나가 유학이었다. 학생들은 유학을 준비하였으며,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본 혹은 독일로 갔다. 하지만 일부 인사들은 유학의 장소로 미국을 꼽았다. 1910년부터 1921년 젊은 남녀 학생들은 미국에서 선진 학문을 배워 주권 회복과 독립 이후 근대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생명을 걸어가며 국경을 넘어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이 시기에 상하이를 거쳐 미국에 간 인사들은 항일 사상이 강하였지만, 여권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훗날 이 시기에 미국 유학한 인사들을 ‘신도 학생(新渡學生)’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 본국에서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유학 온 대표적인 사람으로 하경덕을 꼽을 수 있다. 하경덕은 전라북도 익산 출신이며 1913년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평양 숭실학교를 나왔다. 평양 숭실학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조지 섀넌 매쿤(George Shannon McCune)이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지 섀넌 매쿤은 백낙준 등 숭실학교에 다니던 많은 한국 학생의 미국 유학을 도와주었다. 하경덕도 조지 섀넌 매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하경덕은 1916년 중국 상하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하버드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1925년 4년간의 학부과정을 마친 하경덕은 공부를 이어 가기로 결심하였다. 하경덕은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28년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미국에 체류하지 않았다. 본국에서 교육기관에 종사하고 1929년 10월 한국에 갔다.
한편, 미주 한인 1.5 혹은 2세대들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에 들어갔다는 점이 주목된다. 1903~1905년 사이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민 온 어린 자녀 혹은 하와이 정착 후 곧바로 태어난 한인 2세대들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입학하였다. 미주 한인 1.5세대, 2세대들은 개인적인 삶의 질을 향상하고 조국 독립의 브레인이 되고자 많은 대학이 포진해 있던 미국 본토로 떠났다. 미국 본토에 유학 온 1.5세대, 2세대들 중 뉴잉글랜드에서 유학한 대표적 인사로 양유찬과 김계봉을 꼽을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로 활동한 양유찬은 1903년(고종 40)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03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민 왔다. 양유찬은 하와이 감리교회에서 설립한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을 다녔다. 이후 호놀룰루에 있던 매킨리고등학교[McKinley Highschool]에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양유찬은 “국가와 민족이 건강하려면 우선 의학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양유찬은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 보스턴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김계봉도 미주 한인 1.5세대로 뉴잉글랜드에서 유학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89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민자 명부에 따르면, 김계봉이 아홉 살이 되는 해 부친 김형근, 누나 김포비(Kim Po Bi), 여동생 김예분과 함께 만추리아호를 타고 1904년(고종 41) 11월 2일 호놀룰루에 왔다. 김계봉도 양유찬과 마찬가지로 호놀룰루에 있는 매킨리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하고 하와이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배웠다. 하지만 보스턴대학교 학생 모집 담당 교수가 6년 과정으로 신설된 의과대학을 홍보하고자 호놀룰루에 왔고, 여기서 양유찬과 함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920년에 의과대학 과정을 마치고 B.S.를 받았다. 1922년에는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M.D.를 받았다.
김계봉 가족 하와이 호놀룰루 입국 기록
근거 : Korean Passengers Arriving at Honolulu, 1903~1905
Kim, Hyeng Keun 39 widower Ka Yang Li 11/2/1904 Manchuria
Kim, Hyeng Keun, daughter[Po Bi] 11 single Ka Yang Li 11/2/1904 Manchuria
Kim, Hyeng Keun, daughter[Ye Boon] 6 Ka Yang Li 11/2/1904 Manchuria
Kim, Hyeng Keun, son[Kei Pong] 9 single Ka Yang Li 11/2/1904 Manchuria
학생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에 다시 유학을 오기 시작한 것은 1923년 이후부터였다. 특히 보스턴 지역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활란(金活蘭)을 들 수 있다. 1899년 1월 인천에서 태어난 김활란은 이화학당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1918년 3월 한국인 여성 최초로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쳤다. 이화학당 고등보통과 교사로 활동하던 김활란은 웰치[H. Welch] 선교사[조선감리교 감독]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언대학교에 들어갔다. 1922년부터 1924년 6월까지 철학, 교육학 등을 배웠다. 1924년 10월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보스턴대학교에 들어갔다.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1925년 6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초당(草堂)』을 저술하여 세계적 문학가 반열에 오른 강용흘(姜鏞訖)도 뉴잉글랜드에서 유학한 대표적 인사였다. 1903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 계통의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永生高等普通學校)를 나왔다. 강제 병합 이후 한국을 식민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일조하고자 미국 유학을 가려고 국경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강용흘은 1926년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전공을 의학에서 영문학으로 바꾸었다. 192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외에도 1923년에 미국에 온 김형린은 하버드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1936년에 졸업하였다. 김형린과 같은 해에 도미한 김술근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갔다.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김술근은 1927년까지 하버드대학교에서 천문학을 배웠다. 정태수는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배웠다. 배의환은 1930년부터 1935년까지 노스이스턴대학교에서 상업을 수학하였다. 김태술이라는 인사도 1923년에 도미하여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에 들어갔고 1929년에 졸업하였다. 김태술의 부인인 추애경은 대구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거쳐 잉글랜드 지역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에서 음악을 배웠다.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는 대학에서 유학을 한 한국인 인사들은 공부를 마친 후 국내외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먼저 브라운대학교를 졸업한 백상규는 귀국 후 1908년 융희 황제 체제에서 내무비서관을 맡았고, 1909년 2월 민병석 특사단의 일원으로 대일 외교 활동을 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일제 강점기 보성전문학교에서 영문학, 경제학을 가르쳤다. 광복 이후 여운형이 이끌던 조선인민당에 몸담았다. 1946년 2월 초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여 최고정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남조선민주위원에서는 황진남과 함께 인민당을 대표하여 위원이 되었다. 1950년 5.30 총선 때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납북되고 말았다.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양유찬은 192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원하였다. 의사 활동 외에 호놀룰루 YMCA 이사, 유니버설자동차회사 중역 등으로 활동하며 하와이 한인 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광복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양유찬은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주미 대한민국 대사,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한일회담 수석대표, 1951년부터 58년까지 UN총회 한국 수석대표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Korean Against Communism』이 있다. 양유찬과 같이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김계봉도 1924년부터 뉴저지에 있는 성요셉병원 병리학 주임교수로 발탁되어 의학자로 활동하였다.
보스턴대학교에 철학으로 석사를 받은 김활란은 귀국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학감으로 수많은 후학을 길러 냈다. 1930년에는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철학연구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10월에는 「한국의 부흥을 농촌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농촌교육을 통한 문명 퇴치와 여성 계몽 활동에 앞장섰다. 1937년 이후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걸어갔다. 애국금차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승격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0년 한국여학사협회를 결성하는 등 교육과 여성 인권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하버드대학교를 졸업생 강용흘은 귀국 후 영생학교에서 후학을 길렀다. 훗날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라 불리는 현봉학의 동생 현웅이 강용흘에게 영어를 배워 광복 이후 미국에 유학을 갔다. 한편 강용흘은 『대영백과사전』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며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1931년 자전적 소설 『초당』을 발표하였다. 『초당』은 독일, 프랑스,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1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파리대학교, 뉴욕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하경덕은 수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사회조사위원회에서 총무를 맡았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편 그는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세운 흥사단의 국내지부인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오천석, 백낙준 등 미국 유학파들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기에 앞서 영자 신문 『The Korean Times』를 발행하였다. 미군정청 문교부에서 운영하는 각종 위원회에 몸담으며 교육 발전에 앞장섰다. 이후 합동통신사, 서울신문사 사장 등을 지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무성의 특별 촉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연합국총사령부에서 미국 유학 출신이자 흥사단에서 활동한 장리욱과 함께 번역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