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美洲社會-假髮事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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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항목명 | Wig Business in Amer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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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최초로 기반을 닦았던 이민 사회의 주요 업종.
미주의 가발 산업은 196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최초로 미국에서 기반을 닦았던 업종으로, 한인 동포들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과거 가발의 수요는 대부분이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 여성들이었다. 아프리카 흑인 여성들에 비해 경제적 여력이 큰 아메리카 흑인 여성들이 가발의 수요를 이끌어 왔다. 그러던 중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하층에 위치한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이 타격을 크게 받아 가발 시장 수요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경기가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그중 미국의 회복세는 단연 가파르다. 제조업의 리쇼어링을 외쳤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의 상류층뿐 아니라 하류층에게도 경기 회복의 온기를 전하고 있어, 흑인들의 가발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1965년 「이민 및 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65] 개정 이후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미국에서 가발 산업이 크게 일어났는데, 그 가발은 한국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196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기반을 닦았던 가발 산업은 미국 내에서 한인 동포들이 주도하는 업종으로 꼽힌다. 재미 한인 뷰티 서플라이 업계는 국내에서 아직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는 해외 이민사에 길이 남을 이민 그룹의 성공 케이스이다. 2013년 사망한 이광규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는 “이민자들 가운데 개인적인 성공 사례는 많지만, 이처럼 그룹으로 성공한 경우는 미국의 흑인 뷰티 마켓의 뷰티 서플라이 비즈니스를 개척한 한인들이 유일하다.”라고 격찬하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가발 사업은 1960년대 한국의 주요 수출품 가운데 하나였던 가발 상품의 미국 수출과 미국 내 판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가발 상품의 주요 수입업자는 유대인이었고, 미국 내 판매망을 독점하고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 가운데 가발 상품의 소매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학업을 버리고 가발업에 전념하여 큰돈도 벌기도 하였다. 한인이 가발 소매업에 가세하게 된 배경이다.
한국의 가발 수출업자들은 미국에 드나들면서, 혹은 미국 지사를 오픈하고 판매 활동을 하면서 미국 내 가발 시장을 체험하였다. 이들 중 다수가 미국에 남아 수입업자로 전환하였다. 점차 한인들이 가발 상품 도매와 소매를 장악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 한인들이 가발 시장 도소매업에 뛰어들면서 상호 경쟁하며 가발의 가격이 떨어졌다. 유대인들이 가발 시장에서 떠나게 된 이유이다. 개당 200~300달러씩 판매하였던 가발이 100달러 미만으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격경쟁이 가발의 수요를 더욱 크게 부채질하였다. 가난한 흑인들이 싼값으로 가발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내 가발의 최대 사용자는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다. 흑인 여성들은 원래 머리카락이 곱슬이어서 자기 머리카락으로는 백인들처럼 바람에 날리는 스타일의 헤어 패션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으로 백인들처럼 스타일을 만든다. 하나는 릴렉서(Relaxer)라고 하는 헤어 케어 케미컬 제품으로 머리를 펴서[이들은 이것을 ‘펌(Perm)’이라고 함] 만드는 스타일이다. 또 하나는 가발 혹은 위빙 헤어 제품을 이용한다. 재미 동포들은 가발 사업을 통해 흑인들의 헤어의 문제점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한인들 간 과다 경쟁으로 가발 사업이 크게 위축되면서 이들은 흑인용 미용 재료 공급사업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사업도 원래는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흑인 지역에 상점을 오픈하고 아주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였다. 범죄가 심한 지역이어서 쇠창살로 창문을 만들어 놓고 상품과 돈을 교환하였다. 한인들이 이 사업에 손을 대면서 기존의 판매 방식과 가격을 파격적으로 전환하였다. 범죄 지역이지만 과감히 쇠창살을 제거하고, 손님이 상품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오픈하였다. 상품 가격도 유대인들 가게보다 파격적으로 인하하였다. 가난한 흑인들은 한인들의 뷰티 서플라이 가게에 몰려들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미용 재료 공급업계를 떠났다. 한인들이 업계를 점령하면서 릴렉서와 같은 미용 재료 상품들이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릴렉서 제품들은 흑인 사업가들이 자기 집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케미컬 원료들을 적당히 섞어서 영세하게 만들어 냈던 것이다. 수요 폭발로 흑인 생산업자들 또한 큰돈을 벌게 되었다. 그들은 현대적인 공장을 세워 새로운 제품들을 계속 만들어 냈고, 한인들은 이를 구입하여 흑인 소비자들에게 판매하였다.
뷰티 서플라이 소매점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 전국 흑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한인들에 의해 급격히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LA 폭동사건이 터졌다. 한인 뷰티 서플라이 소매점을 비롯한 한인 상점들이 폭도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흑인 고객들을 얕잡아 보고 함부로 대한 것에 대한 분풀이도 하나의 요인이었다. 이것은 한인 사회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 사업가들을 상대로 한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재미 동포 이계송은 1993년 『뷰티 서플라이 타임즈』[현 『Beauty Times』]를 창간하였다. 『뷰티 서플라이 타임즈』는 창간과 함께 흑인 문화 소개,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 성공한 흑인 인사들 소개 등을 비롯하여, 흑인 고객 접대 방법, 고객 서비스 개선, 소매점 경영 기술 등을 한인 소매업계 경영주들을 상대로 홍보하기 시작하였다. 흑인 장학 기금 마련, 흑인 인권운동 지원 등의 캠페인도 펼쳤다. 한인들 간 비즈니스 네트워크도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또 미주 미용재료상업인협회[NBSDA]라는 조직의 활성화를 추진하였으며, 지역 협회 조직을 선도하고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30여 개의 지역 협회가 결성되어 있다.
뷰티 서플라이 소매업은 초기에는 헤어 케어 케미컬 상품이 주를 이루었다. 릴렉서 상품은 아주 독한 양잿물이 들어 있어 머리카락이나 두피에 상당한 손상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수많은 보조 제품이 필요하다. 따라서 뷰티 서플라이 상점은 알칼리성 중화 샴푸와 컨디셔너, 헤어 오일, 헤어 영양제 등 수천 가지의 케미컬 상품을 취급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발과 헤어피스 상품이 추가되었고, 흑인 커뮤니티의 ‘월마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식품을 제외한 일상용품까지도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릴렉서 못지않게 자리 잡은 주요 상품이 위빙 헤어(Weaving Hair) 제품이었다. ‘휴먼 헤어(Human Hair)’라고 불리는 이 제품은 가발의 단점을 보완해서 만든 상품으로, 중국에서 중국 여성들의 긴 생머리를 모아 케미컬로 처리한 후 길이를 다르게 하여 재봉틀로 엮어 만들었다. 보통 약 20.32㎝[8인치], 25.4㎝[10인치], 30.48㎝[12인치], 35.56㎝[14인치], … 60.96㎝[24인치]까지 제조되어 판매되었다. 흑인 여성들은 이 머리 다발을 구입하여 자기 머리 위에 실과 바늘을 이용, 부착하여 가발처럼 하고 다닌다. 가발은 썼다 벗었다 하지만 위빙 휴먼 헤어는 자기 머리에 붙이기 때문에 가발보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장점이 있다. 보통 떼지 않고 2~3개월 착용할 수 있다.
1980년대 말에서부터 이런 휴먼 위빙 헤어의 붐이 일었다. 동시에 가발을 취급하였던 한인 헤어 수입 도매업체들은 휴먼 위빙 헤어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로 인해 휴먼 위빙 헤어 상품에 대한 흑인 여성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휴먼 위빙 헤어보다 값이 싼 인조 헤어 피스를 다양하게 개발한 헤어 수입 도매업체들 덕분에 헤어 비즈니스는 더욱더 활성화되었다. 헤어 수입 도매업체들은 전국적으로 흑인 여성들을 상대로 각종 헤어 쇼를 개최하였다. 패션까지 주도하게 된 것이었다. 현재 미국 내 흑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든 한인들이 경영하는 뷰티 서플라이 상점들이 있다. 6,000~8,000여 개소로 추산된다. 이곳들에서는 헤어 케어 캐미칼 제품과 헤어 상품, 헤어 액세서리, 헤어 케어 전기기구, 이발 기구, 뷰티 잡화 및 일상생활 잡화 등을 취급하고 있다.
오늘날 250만이 넘는 대규모 커뮤니티를 구성한 재미 한인 사회의 기초는 1965년 개정된 미국의 이민 개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차별을 없앤 이민 쿼터에 따라 1970년대에 쏟아져 들어온 한인들의 이민 물결로 양적팽창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당시 한국은 외환 사정이 열악해 이민길에 오르는 사람들조차도 달러의 지참금을 수백 달러로 제한할 정도의 각박한 상황이었다. 맨손으로 이민길에 올랐던 그때 그 사람들이 대부분 미국 정착에 성공한 오늘날의 한인 사회를 보면서, 당시 가발이라는 아이템이 없었다면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가발은 정착 초기 수많은 한인들의 생활수단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 한국의 전략 수출품으로서 수출액 1위를 차지한 효도 상품이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962년 12월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 뉴욕무역관 장용호 부관장의 부임은 남다른 뜻을 지닌다. 미국에 한국산 가발의 전성기를 가져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개설 초기 코트라 요원들의 주요 임무 가운데 미국 시장에 대한 조사 업무가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다. 어떤 상품들이 어떤 국가들로부터 들어오는가, 특히 일본이나 타이완, 홍콩 등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은 우리도 잘하면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그런 상품들에 대한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였다. 백화점에 새로운 상품들이 선보이면 그 자리에서 견본을 구입해 본사로 보내는 일이 잦았다. 모조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창작을 가미해 신상품을 개발하게 되고, 그것을 들고 시장 개척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본국 수출업자들을 바이어들에게 연결해 주는 역할로 길 안내, 통역도 맡았다.
그때 장용호의 눈에 띄었던 것은 한국산 돈모와 인모가 미국에 수출된다는 점이었다. 돈모는 한국 돼지의 털이 부드러워 블러시(blush)를 만드는 원료로 인기가 있었고, 인모는 상류층 귀부인들이 애용하는 가발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부가가치가 없는 1차산업의 물자 수출이었다. 인모의 수입업자를 통해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발 제조 공장과 연결된 장용호는 얼씬도 못하게 하던 사장을 설득해 공원들이 바늘로 머리카락 한올 한올 캡에다 뜨는 제조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고, “저런 수공업이라면 임금 싸고 손재주 좋은 한국인들이 더 잘할 텐데” 하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조인트 벤처를 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직접 제조공정을 익혀 두었다.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장용호는 1965년 7월 서울 답십리에서 콩나물을 키우던 반지하 약 132.23㎠[40평]의 움집을 빌려 가발 공장을 차렸다. 공원 30명으로 시작한 공장은 인모의 염색 과정에서 한 차례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지만, 첫해 2만 달러어치의 인모 가발을 수출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수출액이 15만 달러로 늘었고, 때마침 일본에서 개발된 화학섬유 원사 카네칼론의 출현으로 인조 가발이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판로는 주로 미국의 백화점들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대니안[안인모]과 함께 미국 시장을 휩쓸었다. 장용호의 이니셜을 딴 YH무역은 뉴욕 지사를 통해 1967년 50만 달러, 1968년 200만 달러, 1969년 470만 달러, 그리고 1970년엔 1,000만 달러를 돌파하면서 그해 수출의 날 행사에서 철탑 산업훈장을 수훈하였다. 장용호는 서울 공장을 동서에게 맡기고 뉴욕에서 진두지휘하였다.
충청북도 옥천이 고향인 장용호는 1960년 7.29선거 때 고향에서 출마하였다 낙선했던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재산을 날리고 미국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면서 발전기 구매를 위해 1961년 8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국에 와서 무언가 해야 되겠다.”는 의욕이 생겼고, 불과 5년 만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뉴욕이 본거지가 된 장용호는 재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1969년 제8대 뉴욕 한인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때만 해도 한인 인구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가발 선두 주자 외에 장용호는 뉴욕 한인 사회와 관련해 또 다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73년 맨해튼에 6층짜리 상업 건물[뉴욕 웨스트 32번가 25]을 40만 달러에 매입해 이 지역 한인 상권이 들어서는 데 일조를 하였던 것이다. 뉴욕 시내 상업 건물을 매입한 최초의 한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10년 후 이 건물은 삼성 계열사에 매각되었다가 브로드웨이 약국 권오윤 사장의 소유를 거쳐 지금은 H마트가 들어서 있다. 장용호는 미국에 가발을 소개한 장본인이었지만 가발의 사양화를 누구보다 빨리, 정확히 예측해 품목을 바꾸는 상술도 보였다. 1971년 한국에서 과잉생산되는 가발이 미국 시장에서 과당경쟁으로 인해 가격이 떨어지고 있음을 간파한 그는 가발 제조에 쓰이던 미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의류 제조로 선회하였다. 주로 남성용 바지와 재킷, 스프링코트를 만들어 미국 시장에 내놨다. 장용호의 예측대로 가발은 1974년 초부터 사양길에 들어섰고, 그는 1975년에 가발 사업을 접었다.
다음으로는 가발 업체에 대해 알아보자. 김광석 사장은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1978년 12월 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현재 그는 미국 소매점 중 60% 이상과 거래를 하며 연간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미국 최대 가발 유통업체인 셰이크앤고(Shake-N-Go)를 경영하는 대표가 되었다. 회사 이름 ‘셰이크앤고’는 직역하면 ‘흔들며 가다’이다. 셰이크앤고는 미국 전역의 8,000여 개 소매점 가운데 5,000개가 넘는 업체와 거래하고 있어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다.
2004년 매출액 5,000만 달러였던 회사는 2년 만에 1억 달러를 넘겼고, 2007년 1억 5700만 달러, 2010년 2억 6000만 달러를 거쳐 2012년에는 3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매출액에서는 미국 내 대기업들과 견줄 수가 없지만, 종합 헤어 제품을 취급하는 회사 가운데는 단일 회사로 최대 규모이다. 8억~1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헤어 제품 시장에서 3억 달러의 매출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가발 시장에 뛰어든 수입업체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경쟁사들은 중국 공장들과의 ‘관시(關係)’를 자랑하며 끈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거래 중단을 통보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김광석은 이런 홀대 속에서도 황소처럼 버텼다. 무작정 공장을 찾아가 원하는 제품이 완성될 때까지 두 달이건 석 달이건 체류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였다. 그런 무모함에 감동한 공장들은 그에게 제품 공급을 약속하였고, 그들과 함께 수많은 신상품을 만들어 미국 소매업체들에 뿌릴 수 있었다.
전체 흑인 뷰티 서플라이 소매시장의 70% 이상을 한인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아랍 상인들이 그 뒤를 따라오고 있다. 한편, 헤어 케어 케미컬 상품의 경우는 월마트, 월그린과 같은 대형 체인점들이 40%, 한인 뷰티 서플라이 상점들이 60%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헤어 상품의 수입 도소매업은 거의 90% 이상을 한인이 장악하고 있다. 한국의 6대 가발 생산업체들이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에 공장을 세워 재미 한인 헤어 수입 도매업체들과 사업 관계를 맺고 있고, 중국의 대형 헤어 상품 생산업체들도 재미 한인 수입업체들에게 70~90% 이상 의존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 창업주들의 평균 나이는 60~70세이며, 2세들이 이어받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 명문대 출신 한인 2세들이 부모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업을 확장시켜 가는 경우도 생겼다. 2세들은 백인 뷰티 분야까지도 진출을 노리고 있다. 언어의 장벽이 없고, 주류사회의 문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무한한 사업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유대인들이 다이아몬드 사업을 장악하고 있다면, 한인들은 앞으로 미국의 뷰티 산업을 장악하고 주도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동안 이런 뷰티 산업계를 일구어 내는 데 우리 한인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다. 범죄가 많은 지역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지금도 위험을 무릅쓰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위험을 이겨 내고 산업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민족의 엄청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재미 동포 뷰티 서플라이 업계는 이제 차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차세대는 부모 세대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이들은 언어장벽이 없고, 미국 문화에 젖어 있는 미국인들이다. 전 미국 뷰티 시장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이들은 상당한 유리한 입장에 있다. 특히 나노 산업의 최고 기술국인 한국의 뷰티 제품들은 날로 고품질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한인 뷰티 사업자들 간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유대인들이 다이아몬드 시장을 리드하는 것처럼 코리안이 전 세계 뷰티 시장을 리드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