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中南美出身-韓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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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항목명 | Korean New Yorkers from Latin Amer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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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가진 중남미 출신의 한인 뉴요커 이야기.
중남미 출신 한인 뉴요커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칠레 등 중남미 국가로 1차 이민을 떠났던 한인들 중에 현지의 정치·경제적 불안정, 치안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인해 다시 미국, 특히 뉴욕으로 2차 이민을 온 한인을 지칭한다. 뉴욕의 중남미 국가 출신 재이민자들은 한국에서 바로 이민을 온 한인들에 비해서 훨씬 다양한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전 중남미 경유국에서의 이민 경험과 초국적 연결망은 미국 재적응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재미 한인’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한국에서 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거나 혹은 미국 현지에서 태어난 2세~3세를 지칭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미 한인 1세대나 1.5세대 중에는 한국 출생자 뿐 아니라 다른 국가를 거쳐서 온 재이민자들, 즉 2차 이민자들도 포함이 되어 있다. 이주가 양 국가 간에 단 한 차례 발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1차 이주가 재이주나 순환 이주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재외 한인들은 거주국에서의 정치·경제적 불안정한 상황, 혹은 더 나은 노동, 투자, 교육의 기회를 고려하여 제3국으로 재이주를 하거나 모국으로 역이주를 감행하기도 한다. 이때 재이주는 한 국가에 이주하여 계속해서 머무르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또다시 이주함을 의미하고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체류하였다가 다시 제3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삼각이민’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재이민 현상은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문학에서도 주요한 주제로 녹아 있거나 표상이 된 경우가 있다. 이명재의 논문 「국외 한인소설에 나타난 디아스포라 양상: 이민, 재이민, 역이민 경우를 중심으로」에서는 재이민을 “남미 지역 국가인 파라과이나 브라질, 또는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이민 가서 적응하기 어렵거나 돈을 벌면 시장 환경 등이 더 나은 남미 이웃 나라나 북미의 미국, 캐나다는 물론 호주로 다시 옮겨가는 이민 형태를 이룸을 일컫는다.”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한인 문학인 맹하린의 소설집 『세탁부』에도 이러한 한인 디아아스포라의 재이민에 관한 주제들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상갑은 「역/재이민의 세계와 코레안 아르헨티노: 맹하린의 소설집 『세탁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이에 대해 분석한다.
1903~1905년에 약 7,200명의 한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계약 노동자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1906년에서 1964년까지는 차별적이고 제한적인 미국 「이민법」으로 인해 특정 신분[사진 신부, 독립운동가, 유학생, 미군 부인과 입양인 등]의 소수의 한인들만이 미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65년 미국 내의 「이민 및 민족법」이 개정되어 가족 초청 및 직업 기술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었고 이 시기의 이민으로 오늘의 재미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1960년에 뉴욕시 전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약 400명에 불과하였다. 1965년 이민 문호가 개방된 이후 재미 한인 1세들 중에 한국에서 바로 이민한 경우 외에 독일, 베트남뿐 아니라 중남미 국가를 경유하여 재이민을 온 경우가 다수 있고 이들 재이민자들의 이전 경유국에서의 이민 경험과 초국적 연결망은 미국 재적응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중남미로 이민을 떠났던 한인들 중에는 현지에 적응해서 사업을 운영하며 안정적으로 현지 정착을 한 경우도 있지만 또한 처음 이민을 간 중남미 국가에 정치, 경제적 위기가 닥치거나, 한인 대상의 범죄율이 증가하거나 하는 불안정한 사회 상황, 혹은 더 나은 교육과 사업 기회, 가족 초청 등에 기인하여, 중남미 타국으로 대륙 내 이동을 하기도 하고 북미[캐나다나 미국]로 대륙 간 재이주를 감행하기도 한다.
2002년 『로스앤젤레스 중앙일보』는 「남미 한인 미국행 줄이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중남미 한인들의 재이민 현상에 주목하였다. 특히 아르헨티나가 2001년 12월에 국가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고 전후로 심각한 경제,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사회 범죄가 급증했을 때 수백 세대에서 수천 세대의 아르헨티나 한인들이 미국으로 재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파악하였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는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자 중에는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중남미 국가 내에서도 봉제 사업이 더 잘되는 곳으로 계속적으로 이주를 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의 ‘더 나은 교육의 기회’가 중남미 한인들의 미국으로의 재이주의 또 다른 주요한 사유가 되기도 한다. 그 유형에는 부모는 중남미에서 사업을 계속하면서, 자녀만 한국과 북미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고, 온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오기도 한다. 이 경우에 미국에 가족 구성원이 전부 완전 정착하기도 하지만 부모는 사업 기반을 중남미에 두고 중남미와 미국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연쇄적인 국가 간 이주 과정을 통해서 재이민자들은 두 개 국가 이상을 근거지로 가지고 있고 다양한 국적과 특수하고 복합적인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기도 한다. 또한 중남미 한인들은 다른 외국의 나라로 재이주를 했다가 다시 중남미로 귀환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모국인 한국으로 역이주를 선택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미국 이민 생활에서는 종교, 특히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다수의 연구에서 이민 교회가 종교적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한인 교회가 차세대들에게 한인 정체성과 민족 언어와 문화를 전수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며 주요 핵심 커뮤니티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중남미 출신 재이민자들도 높은 교회 참석률을 보였고 상당수의 재이민자들은 중남미에서도 그리고 미국 재이주 후에도 교회 참석을 하고 있다. 중남미 지역 한인 교회와 미국 지역 한인 교회 사이에 다양한 교류가 오고 가는데 뉴욕에서 아르헨티나 한인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던 뉴욕 교회 목사의 초청으로 아르헨티나 교회 목사가 뉴욕으로 재이민을 가기도 한다. 그리고 재이민을 한 목사가 미국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중남미 출신의 다른 재이민자들도 같은 교회로 이전하게 되면서 해당 교회는 중남미 출신의 재이민자들의 새로운 재규합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뉴욕 지역에서의 한인과 비 한인 중남미계 이민자들의 종교 교류는 네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남미계 이민자들이 한인 교회에서 공간을 대여하여 독립적으로 예배 모임을 갖기도 하고 한인 목사가 중남미계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국어-스페인어 등 이중언어로 설교를 하거나 혹은 스페인어로만 설교를 하기도 한다. 한편, 중남미계 이민자들은 한인 교회의 영어-한국어 이중언어 예배나 혹은 영어 예배에 참석하기도 한다. 또한 재미 한인 일반 신도들이 거리에서 중남미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이러한 뉴욕의 특수한 다문화적 환경하에서 재이민자들은 중남미 문화와 언어에 대한 지식과 친숙함을 활용하여 예배 통역자로 역할을 하는 등 타 인종과의 종교적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자들이 중남미 1차 이민국에서 쌓은 이민 및 사업 경험과 사회적 연결망은 미국 재적응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중남미 출신 차세대들 중에는 의사나 간호사와 같은 전문직을 비롯하여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1세대 재이민자들은 이전에 중남미에서 자영업을 한 경험을 살려서 1970년대 초반 뉴욕 지역에서 청과업계에 선구적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중남미에서의 의류 사업 경험을 살려서 뉴욕 지역에서 재미 한인 의류 사업을 발전시켰다. 일부는 뉴욕에서 업종을 변경하여 세탁소나 네일 가게와 같은 서비스업에 종사하여 왔다.
중남미 국가에서 한인들의 의류업 관련 종사 비율은 상당히 높다. 1962년 해외 이주법 제정으로 인해 1963년 브라질 한인 이주자들을 시작으로 집단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농업 이민이 잇따랐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의 농촌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도시로 가서 상업 특히 의류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남미에서의 의류 관련 경험이 재이민자들이 뉴욕에서 경제적으로 정착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중남미와 북미 지역에서의 한인 재이민자들의 의류업 관련 종사 유무와 관련하여 세 개의 집단으로 분류 가능하다. 첫 번째로 중남미에서는 타 업종에 종사했지만 뉴욕에서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서 의류업에 종사하게 된 경우가 있었다. 두 번째로 연속적인 이주의 과정에서 중남미에서 습득한 의류업 관련 경험을 바탕으로 뉴욕에서 의류업에 계속 종사하기도 하였다. 세 번째로 중남미 국가에서는 의류업에 종사했지만 뉴욕 경제의 다양성, 재이주자의 자본 크기, 중남미와 뉴욕의 산업 시스템의 차이, 뉴욕 지역에서의 봉제 산업의 쇠퇴 등 여러 가지 사유로 뉴욕에 와서 직업을 변경하면서 주로 세탁업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뉴욕, 뉴저지 지역에 3,000여 개의 한인 세탁소가 있는데 재이민자들뿐 아니라 많은 한인들이 세탁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인 세탁소 규모는 부부가 경영하는 소규모에서 직원이 10명 이상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업체도 있다. 세탁소 경영에 있어서 재이민자들은 몇 가지 점에서 유리하다.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자들은 이전 중남미 이민 국가에서 사업을 한 경험이 있고 이를 활용할 수가 있다. 또한 매출이 좋은 세탁소 자리를 찾거나 초기 착수 과정에서 필요한 많은 정보를 중남미에서 구축했던 인맥을 통해서 얻었다. 그리고 중남미 출신 한인들의 풍부한 봉제·의류업의 경험은 옷을 다루는 세탁소 경영에도 도움이 되고 세탁소에서 따로 고용해야 하는 한두 명의 수선공을 대신하여 직접 옷을 수선할 수 있어서 임금을 절약할 수 있다. 또한 세탁소 내의 중남미계 종업원과 손님들과의 소통에 스페인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재이민자들은 한국에서 바로 이민을 온 한인들에 비해서 훨씬 다양한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한국, 중남미 국가, 미국 등 여러 지역을 거치며 연쇄적인 이주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재이민자들은 한국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브라질 공식 언어], 영어를 접하고 습득하게 된다.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자들은 스페인어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뉴욕에서 한국 출신 이민자들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로 비한인 중남미계 이민자들과도 교류와 접촉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뉴욕의 다인종, 다문화적 환경 속에서 중남미 출신 한인들과 중남미계들 간의 교류와 접촉이 빈번하다. 일부 중남미 한인 재이민자들은 뉴욕의 스페인어 상점 간판이나 중남미계 이웃들의 존재가 중남미에서의 이민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고 느낀다. 뉴욕에는 중남미 여러 나라 출신의 비한인 이민자들이 많으며 이들은 한인 업소의 직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혹은 고객으로 한인 업소를 이용하기도 한다. 뉴욕의 한인 사업체에서는 중남미 직원을 상당수 채용하는 데 한인 재이민자들이 스페인어와 같은 언어 자본과 다문화적 배경을 활용하여 직업소개소[Job Agency]를 운영하며 중남미 구직자들을 한인 업체 사업주에 소개하기도 한다. 즉 뉴욕의 직업소개소는 한인 고용주와 남미계 노동력을 연결하면서 한인 커뮤니티 경제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뉴욕은 자녀들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상당한 규모의 한인커뮤니티가 존재한다는 점에 기인하여 중남미 출신 한인들의 재이민 목적지로 매우 선호되어 왔다. 즉 중남미 출신 한인들이 재이주 목적지로 뉴욕을 선호하는 이유로 뉴욕에는 명문대가 많아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적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의류 관련 전공을 하고자 하는 중남미 차세대 한인들은 패션 관련 유명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오기도 한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뉴욕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부모들은 재이주 후에 자식들을 어떻게 부양하며 공부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뉴욕 지역에 23만 명 정도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고 뉴욕에는 맨해튼(Manhattan), 그리고 플러싱(Flushing)을 비롯하여 몇 군데 한인 집거지, 소위 말하는 한인타운[Koreatown]이 형성되어 있고 한인 상권도 굉장히 잘 발달되어 있다. 재이민자들은 뉴욕에는 상당한 규모의 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어서 영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일자리를 찾거나 사업을 시작하기에 용이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뉴욕으로 이주하기도 한다. 또한 뉴욕을 선택하는 데는 교회나 봉제 사업을 통해 중남미에서 알고 지냈던 지인이나 친척이 먼저 이민을 온 경우와 같은 초국적 이주 네트워크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중남미에서의 경험을 살려 미국 봉제 공장 등으로 취업 이민을 오기도 하는데 미국에서의 첫 직장이었던 봉제 공장이 뉴욕 인접 지역에 있어서 뉴욕에 재정착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중남미 한인들은 여러 국가를 거치면서 재이주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문화적 지식을 배양하고 혼성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재이민을 하게 되더라도 중남미 문화, 중남미 음식을 즐기고 그리워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 문화와 중남미 문화를 동시에 수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는데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기사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재이주한 한인 여성이 중남미식 만두인 엠파나다(Empanada)에 여러 재료와 같이 김치를 넣어서 퓨전 음식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