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특별한 이야기

한인 유학생들과 미주 한인 사회의 형성과 발전

한자 韓人留學生-美洲韓人社會-形成-發展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미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Korean American students and Korean American society
정의

하와이 및 미주에서 활동한 미주 유학생들의 삶과 그로 인한 한인 사회의 형성 및 발전.

개설

초기 한인 사회를 형성한 이민자들부터 미주 유학생들과 함께 발전하는 미주 한인 사회의 형성 및 발전에 대해 다룬다.

하와이 이민과 한인 사회 틀 구축

한말부터 미주에는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한인 사회 형성의 주역은 바로 유학생과 이민자들이었다. 1882년 3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과 ‘문명국가’인 미국의 존재를 인지함에 따라 정부와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국에 유학을 가기 시작하였으며, 유학 간 적지 않은 인사들이 미국 동부 지역으로 갔다. 대표적인 인사로 유길준, 백상규, 이승만, 양유찬 등을 들 수 있다. 유학을 마친 인사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미국에 남은 사람들은 한인 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유학생 도미와 함께 다수의 한국인이 1903년부터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12월까지 3년 10개월에 걸쳐 65척의 이민선에 실려 미국 하와이에 이민 온 한인은 도합 7,226명이었다. 그중 남자가 6,048명이었고, 부녀자는 647명이었다. 14세 미만의 아동이 541명이었다. 한인 1세대, 1.5세대들은 미국 동부 등지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한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바로 이들이 미주 한인 사회 형성의 주역들이다.

한국인들이 생소한 지역으로 이민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개개인의 열악한 경제 사정, ‘개국진취(開國進取)’ 운동의 실천이라는 한국 정부의 방침, 노동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와이 농장주들의 공통분모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이민을 택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상의 이유로 희망을 찾아 불모의 지역에 온 다수의 한국인들은 하와이의 여러 섬과 미주 본토로 흩어져 사탕수수 농장과 철도 공사 현장 등에서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하와이 및 미주 본토에서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의 삶은 그 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농장주들로부터 열악한 계약조건을 받아들여야 하였으며, 인종차별에 따른 심한 모멸감도 감내해야만 하였다. 농장주들의 부당한 대우 속에서 한국인들은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다. 한인들은 신앙심 함양과 정신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 특히 교회의 설립에 앞장섰다. 하와이 한인감리교회[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전신]와 로스앤젤레스 장로교회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미국에 온 한국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교회 혹은 다른 건물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하와이 한인기숙학교[중앙학원], 클레이몬트 학생양성소, 계절마다 열리는 국어강습소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한인들은 자강회, 공립협회, 한인합성협회 등과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한국인들끼리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이를 통해 농장주들의 비합리적인 횡포를 막아 냈다. 이처럼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만들고 단체를 설립하면서 한인 사회를 지탱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세 개의 축을 만들었다.

미국에 유학 온 한국인

미주에서 한인 사회의 틀을 형성한 것은 한말 하와이에 이민을 간 한인들이었다. 미주 한인 사회의 틀은 이민자들이 만들었지만,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집단이 있었다. 바로 미국 유학생들이었다.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미국에 유학 간 학생의 수는 900명이 넘지 않았지만 한인 사회에, 나아가 한국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컸다.

『재미한인 50년사』의 저자인 김원용은 광복 이전 유학생을 다음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제1단계는 1882년부터 1905년까지이다. 이는 다시 둘로 나뉜다. 먼저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 이후부터 1902년까지 유학 혹은 망명을 목적으로 미국에 온 인사들이었다. 대표적인 인사로 유길준,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김규식, 백상규, 이대위, 안창호 등을 꼽았다. 두 번째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이민 시대에 망명 혹은 유학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신성구, 이강, 신흥우, 박용만, 이승만, 백일규, 임두화, 이원익, 정한경, 강영승, 강영대, 차의석, 송헌주, 임정구, 양주삼 등을 들었다. 향학열이 높았던 유학생들의 대학 졸업 비율은 75%에 달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 당한 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한인 사회 발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제2단계는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1910년부터 1918년까지이다. 이때 미국에 온 유학생의 수는 541명이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 미국에 건너온 학생들을 ‘신도 학생(新渡學生)’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망한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여권을 받지 않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중국에 갔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여권 없이 무작정 미국에 왔다. 이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미주 최대의 한인 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일사상(反日思想)이 강하던 신도 학생들의 다수는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지 않았으며, 진학하였더라도 졸업을 하지 못한 인사들이 많았다. 이들은 노동과 영업을 하면서 재미 한인의 사회 건설과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들은 기존에 온 한국인들과 힘을 합쳐 한인 사회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1930년 이후에는 한인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유학 온 대표적인 사람으로 임초(林超), 곽림대(郭林大) 등을 들 수 있다.

제3단계는 1921년부터 1940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유학 온 학생들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여권을 받고 미국에 건너왔다. 그 수는 약 289명 정도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개신교 기관으로부터 미국 유학 지원을 후원 받았다. 이 시기 미국 유학생은 그 이전인 신도 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신도 학생들은 조선총독부 여권을 받지 않고 건너왔지만, 이들은 총독부 여권을 받았다. 둘째 제2기에 미국에 온 사람들은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었지만, 제3기 미국 유학생들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미국의 이민법이 1925년에 바뀌어서 유학을 목적으로 온 외국인들에게는 영주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그 결과 대학 졸업 비율이 65%를 넘었다. 특히 박사학위를 받은 인사들이 많았는데, 그 비율은 15%에 달할 정도였다. 공부를 마친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미주 한인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줄 수 없었다.

한인 사회를 형성한 세 개의 축교회, 학교, 독립운동 단체과 미국 유학생

1. 종교 지도자가 된 미국 유학생

미국 유학생들은 종교 지도자가 되어 한인 사회를 이끌었다. 미주, 멕시코 등지에는 개신교, 천도교 등의 종교 단체가 있었지만,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개신교회였다. 하와이에는 한인 감리교회, 한인 기독교회, 한인 성공회 등이 있었다. 미주 본토에는 하와이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뉴욕에 이주하면서 각각 한인 감리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리들리에는 장로교 계통의 한인 교회가 있었다. 미국 고등교육기관에서 유학 한 인사들은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목회 활동을 하였다.

동부 지역에 유학한 학생으로서 종교 지도자로 활동한 대표적 인사로 임창영을 들 수 있다. 훗날 장면 정권에서 UN 대사로 활동하는 임창영은 1909년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났다. 장로교 집안에서 자랐고 명신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녔다. 숭실전문학교 교장 윤산온(尹山溫)[George S. McCune]의 도움으로 1930년 3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턴에 있는 라피엣대학[Lafayette College]에 들어갔다. 졸업하고 1936년부터 뉴욕신학교[New York Theological Seminary]에 들어갔다. 1938년까지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전공하였지만, 학위를 받지 않았다. 1941년 가을 프린스턴대학교[University of Princeton] 정치과에 들어갔으며, 1943년과 1946년에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과, 채텀대학교[University of Chatham],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런 임창영이 1936년 9월부터 1942년 6월까지 6년간 뉴욕 한인감리교회 목사로서 파산 상태에 놓인 교회를 운영해 갔다. 특히 가난해서 음식조차 구할 수 없던 한인들을 구제하였으며, 기호와 서북으로 쪼개진 한인 통합에 나름 노력을 기울였다.

하와이 한인감리교회에는 남가주대학 출신인 민찬호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또 다른 대표적 인물로 송헌주를 꼽을 수 있다. 송헌주는 18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3년 하와이에 건너왔고 하와이 한인감리교회에서 감리사 와드맨과 함께 활동하였다. 1907년 6월 버지니아주 세일럼에 있는 리노크대학[Reanoke College]에 들어갔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1914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이 늦은 이유는 헤이그 밀사 파견 등 한국 독립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졸업한 해에 공부를 더 이어 가고자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15년 6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송헌주는 제일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민찬호송헌주는 감리교회에서 발행하는 『포와한인교보』에 다수의 논설과 글을 작성하여 동포 계몽과 교인들의 신앙심 함양에 앞장섰다.

1905년 10월 8일에 조직된 한인전도회를 시발점으로 하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도 많은 유학생이 목사와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이대위와 양주삼을 들 수 있다. 이대위는 1878년 12월 평안도 강서군 성태면에서 태어났다.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1903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포틀랜드중학교를 다녔다. 1908년 9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 들어갔다. 여기서 역사학을 배웠다. 그는 대학을 다니던 중 한인감리교회에서 전도사, 교회청년회 전도국장과 학문국장을 맡으며 한인 사회를 이끌었다. 특히 교회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법학박사가 되는 강영승(康永昇)을 길러 냈다. 강영승은 훗날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청년회 회장이 되었다.

1879년 1월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양주삼은 이른 나이부터 미국 선교사들과 교분을 가졌다. 선교사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1901년 5월부터 1905년 6월까지 중국 상하이에 있는 남감리교 계통의 중서학원(中西學院)에 다녔다.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1910년 1월부터 1913년 6월까지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 1903년 9월부터 1914년 6월까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양주삼은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월간으로 발행하는 기독교 잡지 『대도』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미주 한인 교회를 이끌었다. 이처럼 수많은 미국 유학생들은 미주 한인 사회의 또 다른 축이던 ‘교회’라는 공간에서 한인들의 정서적 안정과 한인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2. 민족교육을 이끈 미국 유학생

한말·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미국에 남아 한국인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한인 1.5~2세대의 민족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많은 유학생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교사로 참여하거나 새로운 교육기관을 만들어서 운영해 갔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클레이몬트 한인학생양성소를 들 수 있다. 1908년 공립협회가 미주 한인의 민족의식과 한인 자녀들의 민족교육과 애국심 함양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이때 설립을 주도한 인사가 바로 임정구(任正九)였다.

1886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읍에서 태어난 임정구는 1905년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에 갔다. 1906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업랜드·클레이몬트 지방회에서 평의원과 대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미주에 온 임정구는 퍼모나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4년 퍼모나대학교에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로 편입하였다. 1917년부터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 제2대 교육자로 청빙되어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퍼시픽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 임정구는 유학 이전부터 한인 교육에 관심을 가지며 교육자로 활동하였으며, 공부를 끝마친 이후에도 한인 2세대들의 민족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임정구 외에도 민찬호, 곽림대, 송헌주, 이대위 등도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서 한인 2세대를 교육한 미국 유학생들이었다.

3. 독립운동 단체

1) 이승만의 대미 외교 활동

한말부터 시작된 미국 유학은 독립운동계의 두 거목을 낳았다. 그 첫 번째가 이승만(李承晩)이었다. 한말 독립협회에서 열혈 투사로 활동한 그는 민권 향상을 도모하고자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었다. 대한제국은 만민공동회 관계자 체포령을 내렸고, 이승만도 체포되어 옥중 생활을 하였다. 옥중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영어를 배웠다. 이는 유학생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아펜젤러, 게일 등 재한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905년 조지워싱턴대학교 2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정치학 학사를 받고 1907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원서를 냈다. 하버드대학교는 이승만에게 1년 석사과정 입학을 승인하였으며, 역사 및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1년 동안 재학하면서 미국외교론, 국제법 등을 수강하였다. 1909년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1910년 2월 3일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 중립론」이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제출하였으며, 7월 18일 졸업식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학위를 준 총장이 훗날 미국 제28대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nson)이었다.

이승만은 유학을 마친 후 조선에 돌아가 YMCA 한국인 총무 겸 학감[1910. 10~1912. 3]으로 활동하다가 1912년 3월 다시 미국에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미주 최대의 한인 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4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던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에서 『한국교회핍박』을 발간하였고, 9월에는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잡지』를 월간으로 발간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자주독립정신의 고취와 미주 한인 계몽을 목적으로 발간한 것이다. 같은 달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고 하와이 한국인들의 중심이 될 학교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학교명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바꾸었다, 1914년에는 도쿄 조선YMCA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상호(崔相浩)를 하와이에 초청하여 하와이 한인 YMCA를 결성하였다. 이승만은 1916년 2월 감리교회에서 주관하는 연회에 참석하였고, 1918년 7월에는 호놀룰루에 신립교회(新立敎會)를 만들었다. 12월 신립교회 평신도 결의로 교회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1918년에는 한인여학교를 한인기독학원으로 변경하여 남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승만이 자신만의 독립운동 기관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한성정부 등 각종 명의의 정부가 만들어졌다. 4월 중국 상하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임명하였다. 9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축이 되어 각지에 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였으며,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은 주파리위원부와 필라델피아통신부를 합쳐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Korean Commission]를 설립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생인 김규식(金奎植), 이대위(李大爲), 임병직(林炳稷) 등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외교를 펼쳤다. 미국 의원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일본 한국 강점의 불법성과 3.1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일본 군경의 잔인한 탄압 실상 등을 알렸다. 하지만 이승만이 운영하던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요인들과의 잦은 갈등, 빈약한 재정으로 1928년 문을 닫았다.

이승만은 1941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설치령에 따라 주미외교위원장이 되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 연속성을 각인시키고자 주미외교위원부의 영문 명칭을 구미위원부 영문 명칭 그대로 썼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생인 정한경, 임병직, 장기영, 정운수 등과 함께 미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한국광복군 지원, 그리고 미 전쟁부 산하 전략첩보국[OSS]에 한국인들을 군인으로 참여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은 1921년 7월부터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총재로 활동하였다. 동지회는 7월 7일 이승만의 측근인 민찬호, 이종관, 안형경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지와 이승만 활동 후원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였다. 이승만은 1925년 12월 하와이 한인들과 함께 지속적인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하와이 한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자 동지식산회사(同志殖産會社)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동지촌’ 건설은 꿈으로 끝났다. 동지식산회사가 파산하였다고 해서 동지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동지회는 광복 이후에도 하와이 한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요 단체로 이어 갔다. 이처럼 이승만은 한국 독립운동 단체와 기관을 운영하며 음으로 양으로 미주 한인 사회를 이끌어 갔다.

2) 박용만의 무장 독립운동

한국 독립운동계의 3만[이승만, 박용만, 정순만] 중의 한 사람인 박용만(朴容萬)도 미주 한인 사회를 독립운동 전선으로 이끈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용만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904년 7월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달라는 일본의 요구에 강력히 반발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한성감옥소에 갇히고 여기서 정순만, 이승만 등을 만났다.

박용만은 1905년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네브래스카주에 있는 링컨고등학교를 1년간 다녔다. 1906년 봄 하와이에서 건너온 한인들의 노동 주선과 여관을 경영하고자 삼촌 박희병과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로 갔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덴버사범학교 겸 대학준비학교에서 대학 편입 공부를 하였다. 2년에 걸친 준비 끝에 1908년 9월 네브래스카주 링컨에 있는 네브래스카주립대학교[University of Nebraska]에 편입하였으며, 정치학을 배웠다. 특히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여 간부후보생[ROTC] 과목들도 들었다. 1912년 7월 네브래스카 주립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이 외교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사였다면, 박용만은 무장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대표적인 인사였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행적은 반드시 군인 양성과 연동되어 있었다. 네브래스카주립대학교에 입학한 후인 1909년 6월 네브래스카주 커니에서 한국인 조진찬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하기군사학교[summer military camp]인 한인소년병학교[Young Koean Military School]를 만들었다. 박용만한인소년병학교를 만든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미국식 군사교육을 통하여 향후 독립군을 이끌어갈 핵심 장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조선왕조에 의해 문약(文弱)해진 국민성을 바로잡고 상무 정신을 기르는 것이었다.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당시 13명의 한국 학생들이 있었다. 14세의 김용성부터 50세가 넘는 조진찬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인사들이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박용만과 헤이스팅스대학교 관계자들은 1910년 한인소년병학교를 대학 안에 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박용만은 서부 각지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찾아다녔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한제국 시기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국에 온 인사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1910년 12월 이후 기독교 잡지인 『대도』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하고자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계몽하는 한편,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을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1911년 6월 네브래스카에 돌아와 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교과서로 사용할 목적으로 『군인수지』를 출간하였다. 박용만은 1912년 12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어 하와이에 갔다. 한인소년병학교는 단순히 군인양성 기관만은 아니었다. 이 학교는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인력들을 길러 냈다.

한인소년병학교 출신인 김현구와 김려식은 1919년 4월부터 『신한민보』 주필과 부주필로 활동하면서 3.1운동의 영향으로 활발해진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김현구는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하와이에 거주하며 『국민부』 주필을 맡아 한인 사회의 여론을 형성해 갔다. 한인소년병학교 출신인 이희경, 구영숙, 김용성은 시카고 일리노이드대학 의과대학과 조지아주 에머리대학교 의과대학, 예일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이희경과 구영숙은 하와이에서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김용성로스앤젤레스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들의 건강을 지켰다. 이처럼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는 향후 한인 사회를 주도해 갈 언론, 의료, 교육계 인사들을 길러 냈으며, 이들은 한인 사회를 이끌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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