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人-建設-寄與-在-獨逸同友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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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시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항목명 | Korean Ex-Miners' Contributions to the Korean Community in Toron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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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하다 캐나다로 재이주한 뒤 설립한 재캐나다 독일 동우회에 관한 이야기.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커뮤니티는 교회와 ‘동우회’이다. 이 중에서 1977년 창립된 독일 동우회는 한인들의 정착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독일 동우회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한인 부부들이 가입해 매우 친밀하게 활동하고 있다.
동우회의 활동을 세 부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캐나다 이민과 동우회원들의 연대활동 부분이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약 380명의 서독 광부, 간호사 출신들이 캐나다의 여러 도시에 정착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토론토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정착해 대개 같은 교회와 성당을 다니며 교제하고, 어려울 때마다 서로 도와주었다. 동우회원들의 성실성과 근면성은 캐나다 고용주들에게 알려져 이민 생활에 잘 적응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둘째, 1977년부터 독일 동우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캐나다 동우회원은 초창기에 회원이 380명 정도였다. 토론토와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동우회원들은 생활의 안정을 찾으며 상호 유대 관계를 유지하다가 1977년 8월 6일 50여 명이 친목 단체인 ‘동우회’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그해 10월 5일 창립총회를 열고 임원 및 이사회를 구성하였다. 동우회원들은 캐나다에서 제일 큰 한인 단체 중 하나로 성장한 온타리오 한인실업인협회의 창립에도 이바지하였다. 셋째, 서독 광산협회와의 미지급 적립금 처리에 관한 것이다. 서독 루르 탄광에서 일할 때 독일광산협회 측이 한국 광부들의 월급에서 연금보험료를 공제하여 계속 적립해 두었는데, 독일을 떠나면서 많은 한국 사람이 받지 못한 돈이 있었다. 독일은 적립금 잔액 249만 마르크[6억 2700만 원]를 1984년 한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이에 제19대 독일 동우회가 미지급 적립금을 반환받았다.
독일에서 낯선 캐나다로 이주한 광부와 간호사들은 정식으로 독일 동우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서로 도우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서독 탄광에서 3년간의 고용계약을 마친 광부들은 한국으로 귀국하는 대신 캐나다 등 북미로의 이민을 선택하는 사례가 많았다. 서독 주재 캐나다 대사관 또는 총영사관을 통해 캐나다 이민을 신청하면 통상적으로 2~3개월 내에 영주권을 받을 수 있어 많은 광부들이 캐나다 이민을 신청하였다. 1970년대 초기에는 이들이 고용계약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후 캐나다 이민을 선택하거나, 또는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 등 제3국을 거쳐 캐나다로 재이민한 경우도 있었다. 캐나다에 제일 먼저 정착한 그룹에는 1966년 10월 9일 밴쿠버에 도착한 김영배도 포함된다.
김영배는 위니펙에 머물면서 매니토바대학에 등록하였다가 이듬해인 1967년 8월 23일 토론토로 왔다. 이후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약 380명의 서독 광부 출신들이 캐나다의 여러 도시에 정착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토론토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인 해밀턴, 나이아가라, 런던, 키치너, 워털루, 사니아, 윈저 등 남부 온타리오주 도시에 주로 정착하였고, 일부는 몬트리올과 밴쿠버, 캘거리, 에드먼턴, 위니펙 등에 생활 터전을 잡았다.
워털루-키치너 지역에 정착해 한인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한 동우회원은 김종호이다. 온타리오주 런던 지역은 배동범과 이석범, 김택수, 이강익 등이 가장 먼저 정착한 그룹에 속한다. 캐나다에 정착한 서독 광부 출신들은 서독 광산에서 단련된 생활력으로 주 40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생산 공장 등에서 열심히 일하였다. 이로 인해 한인들은 성실하고 근면한 일꾼이란 말을 고용주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특히 포드자동차 공장과 부품공장, CCM 자전거 공장 등에 많은 동우회원이 고용되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동우회원들의 성실성과 근면성이 고용주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성실성과 근면성은 캐나다의 다른 소수민족들보다 단기간 내에 이민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한인들의 정착과 적응에는 동우회원들의 도움과 연대가 큰 역할을 하였다. 동우회원들은 대개 같은 교회와 성당을 다니며 교제하고 어려울 때마다 서로 도와주었다.
캐나다 동우회원 410여 명 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주하고, 캐나다에는 38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토론토와 인근 지역에 약 250명, 밴쿠버에 49명, 런던에 28명, 캘거리에 10명, 에드먼턴에 38명 등이다. 캐나다에 정착한 파독 광부 출신들은 생활의 안정을 찾으며 상호 유대 관계를 맺어 오다가 1977년 8월 6일 50여 명이 토론토 서니브룩 공원에 모여 친목 단체인 ‘동우회’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그해 10월 5일 창립총회를 열고 임원 및 이사회[초대 회장 박종훈, 부회장 라덕현, 총무 고광남, 이사장 이기천, 부이사장 곽정열, 총무이사 백용빈]를 구성하였다. 동우회 창립에 기여한 회원에는 원영신과 서명식, 박종훈 등이 포함된다.
동우회는 회원 간의 친목은 물론, 불우 회원 돕기 운동과 장학사업, 동포 사회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1978년 3월 11일 임원-이사 연석회의를 갖고 여름 야유회와 경로잔치, 연말 잔치, 한인회 주최 체육대회 적극 참여, 동우회보 발간, 한국 도서 구매와 캐나다 도서관 책 기증 등을 사업으로 확정하였다. 1979년 한국 연예인을 초청해 동포 위로 공연[나훈아 김지미 쇼]을 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모국 산업 시찰을 위해 33인의 모국방문단[단장 백용빈]을 구성하였다. 1980년 6월 7일에는 경로잔치를 주최하였고, 1981년에는 동우회원 자녀로 구성된 하키 팀을 결성하였다. 이 하키 팀은 1982년 한국동계체전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다. 한편 이영만과 이창복, 변장엽, 고성호, 이정호, 구은모, 김용규 등은 1987년 9월 6일 썬더버드 골프장에서 북미 동우친선골프대회를 개최해 수익금 전액을 모국 수재민 돕기에 기증하였다. 1993년 5월에는 전 교민 나무심기운동에 참여하고 후원하였으며, 1997년 4월 29일 굶주리는 북한어린이돕기운동을 펼쳐 모은 성금을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에 전달하였다. 동우회원 김덕수는 후세들의 한글 교육을 위해 한글학교 설립을 주창하고 창설하는 데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김덕수는 듀럼 지역에 한글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토론토 한인회 발전에 이바지한 동우회원들도 많았다. 토론토 한인회가 발족한 1965년 이래 역대 집행부 임원 중에는 동우회원들이 상당수 있었다. 한인회장 중 제18대 장순채와 제19대 원영신, 부회장을 역임한 함태호와 이문영, 서명식, 백용빈, 이정용, 김성택, 장영채, 김철기 등이 동우회원이다. 이외에도 김세영 이사와 선관위원장, 이사장 등 토론토 한인회를 위해 여러 가지로 봉사하였다. 주류사회의 정당에 참여한 회원들도 있었다. 그중 김형철은 ‘온타리오 신민당[NDP]을 지지하는 한인신민당 후원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김형철은 한인신용조합과 캐나다 심장병어린이후원회 등에 후원자와 이사로 오래도록 활동하였다. 동우회원들은 1968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고국의 친인척 초청 이민도 활발히 추진해 캐나다 동포들의 60% 정도가 동우회원과 연관이 있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이와 같은 친인척 초청이민은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동우회원 중 가장 많은 친인척을 캐나다로 이민시킨 사람은 장순채로 알려졌다.
동우회원이 설립한 개인사업체 중 상당수는 한인 사회 최초였다. 정태훈이 1971년 3월 19일 블루어 한인타운에서 창간한 『한가주보』는 한인 사회 최초의 신문이다. 1970년 초기 블루어 한인타운에 이창복이 한국 식품점을, 구신모가 안경점을, 김명준이 종교 서점을 개업하였다. 이창복은 1972년 한국 식품점을 개점한 2년 뒤 무역회사인 팬아시아 식품회사[Pan Asia Food Co.]를 설립, 기업인으로 성장하였다. 한인무역인협회장을 역임하였고, 한국 정부로부터 산업포장을 두 번이나 받았다. 이창복은 초기 한인 이민 사회의 단체들에 재정 후원을 많이 하였으며, 한인장학재단 이사장과 토론토대학교 한국학과후원재단 이사장, 스코필드박사 기념장학회 이사장 등으로 봉사하였다.
유흥선은 독일 간호사 출신인 부인과 함께 1976년 유안 농장을 설립한 이후, 토론토 한인회관 건립 기금과 한인장학재단에 상당한 기금을 기부하였다. 1978년 10월에는 이희택과 구자선이 동업으로 평화식품을 설립하였다. 이어 박인조는 서울식품점을, 임수철은 한밭식품점을 개점하였다. 이 무렵 동우회원들은 베커스[Becker's Milk Store]와 맥스[Mac's Milk Store]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사업 경영을 습득한 후 여러 가지 자영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우회원들은 캐나다에서 제일 큰 한인 단체 중 하나로 성장한 온타리오 한인실업인협회의 창립에도 이바지하였으며, 김정곤과 김영대, 이형인은 온타리오 한인실업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동우회는 캐나다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한편, 서독 광산협회와의 미지급 적립금 처리도 해결하였다. 서독 루르 탄광에서 일할 때 서독 광산협회 측이 광부들의 월급에서 연금보험료를 공제하여 적립해 놓았다가, 3년 고용계약을 마치고 귀국하는 사람들에게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3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는 사람 또는 3년 계약을 마치고 제3국으로 이주하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이 돈을 받지 못하였다. 서독 광산협회는 광부 중 거주지 불명으로 청산하지 못한 적립금 잔액 249만 마르크를 1984년 한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이에 제19대 동우회는 2004년 7월 10일 미지급적립금 청산위원회[회장 원영신, 위원 김종건, 이충렬, 신우원, 백용빈]를 발족하고, 적립금 신청 수령 지급에 따른 모든 집행 권한을 미지급적립금 청산위원회에 부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이후 한국 노동청에 모국 방문, 동우장학금 설립, 동우 주소록 발간, 동우후생복지기금 등의 신청 명목으로 적립금 지불 신청을 한 결과 2008년 8월 12일 36만 9000달러[3억 6800만 원]가 토론토 한인신용조합 계좌로 입금되었다.
입금된 기금 전액을 동우회원들이 노년을 즐길 수 있는 ‘동우 회관’ 구입에 사용하자는 회원도 있었으며, 일부 회원은 적립금 전액을 ‘동우장학금’으로 사용할 것 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으나, 결국 적립금 잔액은 한국 정부에 신청한 기금 사용 목적에 따라 모국 방문, 주소록 발간, 그리고 동우후생복지기금으로 쓰였다. 동우회는 9만 달러를 한인장학재단에 전달하였고, 한인장학재단은 매년 동우장학금[2,500달러]을 추천된 장학생에게 지급하고 있다.
1967년 캐나다 정부의 이민 확대 및 활성화 정책에 의해 1960년대 제1차 파독 한인 간호사 중 500여 명이 캐나다로 이민 및 이주하였다. 캐나다 정부는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지역 할당제의 이민 정책을 점수제로 바꾸었다. 이에 1963~1976년까지 독일에 파견되었던 파독 간호사들 가운데 500여 명이 계약기간 3년 만료 후에 영주권을 주는 캐나다로 건너와 정착하면서 토론토 한인 사회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963~1976년까지 한국의 해외 개발 공사와 독일병원협회의 계약 체결로 파독된 간호사는 총 1만 1057명이었다. 파독 간호사들 중 10%가 북미로 이주를 선택하였고, 그 가운데 500여 명 정도가 캐나다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캐나다 온타리오주에만 이주 간호사가 2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서독 광부 출신들의 친목 단체인 동우회 회원의 부인들이었다.
파독 간호사는 독신으로 캐나다로 이주하기도 하였지만, 다수가 서독 광부와 독일에서 결혼하여 함께 캐나다로 입국하였거나 일부는 캐나다에 와서 결혼하였다. 당시 남부 온타리오의 파독 광부 동우회 부인의 80% 내지 90%가 파독 간호사 출신이었다. 파독 간호사들은 한국과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음에도 출신국에서 취득한 면허가 캐나다에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캐나다의 정규 간호사[Registered Nurse, RN]가 되기 위해 별도의 시험에 응시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또한 일부 파독 간호사는 자신의 전문성이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좌절로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파독 간호사와 결혼한 재캐나다 한인 이민자들은 캐나다에서 맞벌이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자본을 축적해서 빨리 자영업자로 변모할 수 있었다. 우선 편의점의 지배인으로 시작하여 자본과 경험을 축적하면서 점포를 구매, 자영업을 하는 경영인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이들은 대부분 동우회 회원으로, 2008년 기준 토론토에 300여 명, 캐나다 서부 지역의 캘거리와 밴쿠버, 에드먼턴 등지에 500여 명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