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특별한 이야기

서재필과 3.1만세운동을 만날 수 있는 필라델피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미국 필라델피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Philadelphia where you can meet Philip Jaisohn and the March 1st Movement
정의

1900년대 초 서재필이 선전 홍보 활동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미국 전역에 확산시킨 역사적인 도시 펜실베이니아주.

개설

필라델피아는 서재필(徐載弼)[1864~1951]과의 인연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으로,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을 맺기 오래전부터 미국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역사적인 도시로 유명하다.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서재필은 이곳에서 사업을 일으키고 나아가 3.1만세운동을 미국 전역에 확산시켜 한국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유서 깊은 역사 도시인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독립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이 만난 것은 우연의 일치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매우 뜻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유서 깊은 역사 도시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18세기 미국 독립운동 시기 연합 의회의 수도였다. 현재는 인구 400만 명에 이르는 미국 북동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미국 전체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1682년 영국 출신 퀘이커 교도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영국 왕 찰스 1세의 승인을 받아 정착한 뒤 펜실베이니아주의 중심 도시로 형성되었다. 윌리엄 펜은 영국을 떠나기 전 영국뿐 아니라 유럽 지역에도 펜실베이니아 지역의 종교적 자유를 보증한다는 광고로 사람을 모았다. 종교적 박해를 당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필라델피아로 모여들어 도시가 빠르게 성장하였고, 윌리엄 펜은 이주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필라델피아는 기근과 가난, 전쟁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온 수많은 유럽인이 모인 곳이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인 벤저민 프랭클린과도 인연이 깊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23년 17세 때 보스턴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후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25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도서관을 기증하는 등 유력 인물이 되었고, 정치에 뛰어들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 되었다.

식민지 본국인 영국이 식민지 세금법, 일명 「인지세법」을 정책으로 채택한 뒤 이를 북미 식민지에 적용하자 필라델피아는 영국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1774년 북미 대륙 식민지 주민 대표자들이 필라델피아의 카펜터스 홀(Carpenter's Hall)에서 제1차 대륙회의를 열고 식민지 주민의 권리에 해를 끼치는 영국법에 대항하기로 의결하였다. 1775년 5월 마침내 영국을 향한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해 제2차 대륙회의를 필라델피아의 스테이트하우스, 현 인디펜더스 홀(Independence Hall)에서 열었다. 이 회의에서 1776년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해 입안하고 영국에 대한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전쟁 기간 내내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날로 번창하였다. 1787년 헌법회의 대표단이 인디펜던스 홀에서 역사적인 미국 헌법에 서명한 뒤 필라델피아는 1790년부터 1800년까지 미국 연방 수도로 자리매김하였다. 1876년에는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세계 박람회인 ‘백주년 박람회’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하였다. 이 박람회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박람회였다. 이를 계기로 필라델피아는 산업과 상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미국의 대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필라델피아와 서재필의 인연

서재필과 필라델피아와의 인연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서재필은 갑오개혁 정권의 부름을 받고 미국 망명 후 처음으로 1895년(고종 32) 12월 조국으로 돌아가 최초의 민간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독립협회를 결성하는 한편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립하며 조선 민중과 지배층에 처음으로 주권 재민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조선 사회에 여론을 통한 민권운동과 민주주의 정치 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이런 그의 활동에 반기를 든 수구 보수세력들은 민권의 등장이 장차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추방 공작을 단행하여 마침내 서재필을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1898년 5월 14일 한성[서울]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바로 미국에 정착하지 않고 그해 12월까지 미 육군 군의관으로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후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위스터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렇게 보면 서재필이 처음으로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때는 위스터연구소에 재직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서재필은 연구원 생활을 그만두고 1904년 펜실베이니아주 서북부에 있는 윌크스 베리로 가서 해럴드 디머(Harold Deemer)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다. 해럴드 디머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 시절 서재필의 1년 후배로, 서재필은 동업으로 디머 앤드 제이슨(Deemer and Jaisohn)이라는 인쇄 및 문구회사를 만든다. 서재필이 1905년 필라델피아에 지점을 설립하면서 그의 필라델피아 생활은 본격화되었다. 1914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 컴퍼니(Pilip Jaisohn&Company)를 설립한 뒤 사업을 확장하였다. 이 회사는 필라델피아 시내 두 곳에서 종업원 50여 명이 종사할 정도로 성공한 사업체로 발전하였다. 두 곳의 사업체는 레이스 스트리트 1907[1907 Race Street]과 스프루스 스트리트 4901[4901 Spruce Street]에 있었다.

사업이 성공하면서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저명한 유지로도 이름을 알렸다. 서재필은 사업체 운영 외에 자원의료봉사단[Volunteer Medical Service Corps] 회원, 미국인보호연맹[American Protective League] 회원, 국가안보연맹[National Security League] 회원 등 사회 활동도 활발히 전개해 필라델피아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생소한 동양인이자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름 없는 한국의 서재필이 유서 깊은 역사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은, 망명자로 와서 밑바닥에서부터 생존을 위해 갈고닦은 성실하고 탁월한 노력과 미국식 교육과 교양으로 다진 인품이 잘 겸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적 활동 기반이 있었기에 3.1운동을 계기로 서재필이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 전면에 나설 때 수많은 필라델피아 유지들이 그 뜻에 동참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었다.

재미 한인의 3.1만세운동,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개최

현순(玄楯)[1880~1968]이 전보로 알린 3.1운동 발발 소식은 미주 한인 사회를 진동시켰다. 미주 한인들은 3.1운동에 대해 “이렇게 신기한 일은 진실로 무엇에 비할 데 없으니 기쁨에 겨운 우리는 눈물을 뿌렸노라.” 하고 벅찬 심정을 표현할 정도로 감격해 하였다. 당시 미주 한인의 중추 기관으로 한인 사회를 통할하던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를 결집시켰다. 1919년 3월 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백일규와 협의하고 독립선언 이후의 방침을 결정한 뒤 즉각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에게 한국 3.1운동 소식을 알렸다. 아울러 선전 홍보 활동에 착수하기로 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에 3.1운동 소식을 알렸다. 그리하여 3월 10일부터 미국 신문에 한국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소식이 처음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 3월 13일 향후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 공급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앞으로 모든 의연금을 ‘독립 의연금’으로 명명하고 전 미주 한인을 대상으로 한 사람당 10달러 이상을 거두기로 하였다. 또 이십일 예납금(二十一例納金)이라 하여 수입의 20분의 1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게 하는 규정도 마련하고 본격적인 독립 의연금 모금 활동에 나섰다.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미국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전 미주 한인들의 절실한 바람이었다. 이러한 때 서재필은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이승만(李承晩)[1875~1965], 정한경(鄭翰景)[1891~?]과 협의하여 미국에서의 3.1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초 계획은 서재필·이승만·정한경 세 사람이 뉴욕에서 각국 신문기자들을 초청해 한국인의 3.1운동을 널리 알려 친한 여론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이것을 필라델피아에서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대한인 총대표회의’를 개최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계획을 변경한 배경에는 필라델피아에 정착해 왕성하게 사업과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재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처음 계획한 대회 명칭은 ‘대한인 총대표회의’였으나 대회 결과를 정리하면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일명 ‘한인자유대회’로 명명하였다. 이렇게 정한 것은 미국 독립운동 때인 1774~1775년 필라델피아에서 두 차례나 열린 식민지 ‘대륙회의[The Continental Congress]’를 본뜬 것으로, 과거 미국의 독립운동이나 지금 한국인의 3.1운동이나 서로 차이가 없는 동일한 대의를 가진 독립운동이란 점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회 개최 목적은 국내 3.1운동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전 세계에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 통치와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 독립의 동정과 지지를 얻는 데 두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준비한 ‘제1차 한인회의’는 급하게 준비되어 한인들의 참여가 쉽지 않았다. 당시 한인들의 거주가 적은 미국 동부 지역에서 개최되는 데다 시간적으로도 촉박해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접은 채 참여한 한인들을 비롯해 미국 각지에서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의 대거 참여로 3일간의 대회 기간 동안 연 참가자 수는 약 150명일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제1차 한인회의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열렸다. 대회 의장은 서재필이 맡았고, 이승만정한경 외에 임병직(林炳稷)[1893~1976], 김현구(金鉉九)[1889~1967] 등이 간사, 천세헌(千世憲)[1884~1945]이 서기로 활동하였다. 영어 속기를 위하여 미국인 리글이 고용되었다. 그 외 윤병구(尹炳球)[?~1949], 민찬호(閔贊鎬)[1877~1954], 장택상, 조병옥(趙炳玉)[1894~1960], 유일한(柳一韓)[1895~1971], 김노디, 민규식, 임초(林超)[1885~1969] 등이 대회를 도왔다.

필라델피아의 한인회의는 한인들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었다. 한인과 미국인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1910년대 해외 한인 최초의 국제 대회 형태로 열렸다. 한인들 외에 종교계·교육계·언론계 등 미국 각 방면에서 활동 중인 주요 미국인들이 대회의 보조자가 아닌 주빈으로 참가하였다. 이에 따라 대회 진행은 간간이 우리말도 담았으나 주로 영어로 진행되었고, 대회 결과물은 『First Korean Congress』라는 책자로 만들어져 미국 사회의 여러 곳에 배포되었다.

필라델피아의 ‘제1차 한인회의’는 국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과 달리 각 주제별 발표와 토의로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오전에는 주로 초청 연사의 강연을 듣는 것으로 하였고, 오후에는 주제별로 작성한 결의문과 호소문을 발표·토론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각 주제별 결의문의 작성과 발표는 미리 선정된 기초 위원이 하도록 결정되었다. 이 일은 본 대회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중심 활동이었다. 그 결과 작성된 6개의 결의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워싱턴의 미국 적십자 본부에 보내는 호소문」·「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일본의 지각 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이다.

대회 마지막 날인 4월 16일에는 참석자 모두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리틀극장에서 필라델피아 시내의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거행하였다. 이때 필라델피아시 당국에서 기마경찰과 악대부를 동원하여 행사 진행을 도와주었다.

시가행진을 마친 참석자들은 미국 독립기념관 앞에서 역사적인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1차 한인회의’ 참석자들은 한국인의 3.1운동 발발과 한국의 독립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이에 따라 필라델피아 지역의 언론들을 비롯해 미국의 주요 언론에서 이번 대회의 상황을 크게 보도하여 3.1운동 발발 때부터 촉발된 미국 언론의 친한 여론 보도가 이번 대회를 계기로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회의’의 영향은 전 미주 한인 사회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독립 경축일로 이어졌다. 하와이의 경우 4월 12일을, 북미의 경우 4월 15일을 전 미주 한인의 독립 경축일로 거행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선전 홍보 활동 기관인 대한민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활동지

‘제1차 한인회의’는 대회 행사로만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가 준 가장 큰 영향은 미주 한인들은 물론 친한 미국인들에게 전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해 한국 독립을 위한 선전·외교 활동에 뛰어들게 한 점이다. 대회 직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대한민국통신부를 조직한 후 선전 활동에 착수하였고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선임된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신설하여 외교 활동에 뛰어들었다. 톰킨스 목사를 주축으로 한 친한 미국인들은 서재필의 노력에 힘입어 필라델피아에 한국친우회를 설립하였고, 이것을 필두로 미국 전역에서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었다. 이처럼 거세게 불타오른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열기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인·미국인 연합이라는 유례없는 국제적인 공조 속에서 미국과 전 세계로 확산하였다.

먼저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대한민국통신부서재필의 주도와 노력 속에 설립되었다. 설립 배경은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인 4월 15일 서재필의 제안으로 비롯되었다. 이때 서재필은 일본은 현재 미국에 막강한 통신사를 두고 한국의 식민지 실상에 대해 왜곡 선전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항구적인 선전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일본은 영문판 연감과 각종 매체 등을 동원해 식민 통치의 실상을 왜곡 선전하고 있었다. 식민지 한국인들이 일본 정치인들의 현명한 지도로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아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일본의 통치하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이런 일본의 왜곡된 선전 활동의 폐해를 깊이 인식하고 이를 바로잡아 줄 기관으로 대한민국통신부 설립을 주장하였다. 서재필대한민국통신부 설립 제안에 대해 3.1운동 후 선전 활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적극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다. 1919년 4월 19일 제20차 위원회의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서재필을 외교 고문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필라델피아에 대한민국통신부 설립을 인준하고 재정 지원을 약속하였다.

대한민국통신부는 세 가지 활동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첫째, 영문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 선전 활동, 둘째, 대중 집회를 통한 강연 활동, 셋째, 미국인들에 의한 한국친우회 결성을 지원하는 데 두었다. 대한민국통신부는 가장 먼저 영문 책자 발간에 착수하였다. 오하이오주의 북미 대한인유학생총회에서 발간하던 영문 잡지를 인수하여 1919년 6월부터 『Korea Review[한국 평론]』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고 이를 미국 전역의 주요 기관과 단체, 언론 및 학교에 배포하였다. 그 외 『Little Martyrs of Korea[한국의 작은 순교자들]』, 『The Renaissance of Korea[한국의 르네상스]』[조지프 W. 그레이브스(Joseph W. Graves)], 『The Renaissance of Korea』[너새니얼 페퍼(Nathaniel Peffer)], 『Independence for Korea[한국의 독립]』 등 영문 서적을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대한민국통신부의 또 다른 활동은 서재필의 강연 활동이었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를 비롯하여 미국 전역에서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까지 3년여 동안 10만여 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약 300회의 강연 활동을 펼쳤는데, 1921년 3월 2일 뉴욕 시내 타운홀에서 개최한 3.1운동 제2주년 기념식 행사 때는 서재필의 주도로 1,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이는 미국 동부 지역 한인이 100여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수많은 미국 사람들이 모인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대한민국통신부는 1922년 『Korea Review』 7월호 발행을 끝으로 사실상 활동이 종결되었다. 당초 서재필의 계획은 대한민국통신부를 항구적인 선전 홍보 기관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워싱턴 군축회의 종결 직후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열기가 급격히 냉각되면서 대한민국통신부를 유지할 재정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런데다 그의 개인 사업마저 악화되어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통신부는 3년여의 짧은 활동으로 끝났지만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 독립의 열망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로 알리는 데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런 활약상 때문에 식민 통치의 실상을 은폐, 왜곡하려던 일본 당국에게 대한민국통신부는 매우 두려운 대상이었다. 일제 강점기 미국인 등 외국인을 대상으로 펼친 전 세계 유일한 한국 독립운동의 선전 홍보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통신부의 존재 의의는 매우 컸다.

필라델피아에 처음으로 세워진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의 설립 구상은 ‘제1차 한인회의’ 당시 서재필이 선전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한민국통신부 설립 제안과 함께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친한 여론 조성을 제안하면서이다. 서재필의 제안에 대해 당시 필라델피아 시내 성삼위교회[Holy Trinity Church]에서 목회를 하던 톰킨스(F. W. Tomkins) 목사가 적극 찬성하였는데, 톰킨스의 주도로 각 분야의 저명한 미국인들이 참여해 1919년 5월 16일 성삼위교회에서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은 톰킨스 목사가 맡았다.

한국친우회의 설립 목적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기독교와 자유 독립 국가를 위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한국 민족에게 미국인의 동정과 도덕적인 지원을 보낼 것, 둘째, 한국 민족이 지금까지 받아 온 일제의 학정과 부당한 대우를 가능한 더 이상 재발되지 않도록 미국민의 도덕적 영향력과 호의적인 조정을 사용할 것, 셋째, 한국에 관한 진실한 정보를 미국민에게 알릴 것, 넷째, 세계 모든 민족과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증진시키며 하나님의 법이 온 세계에 수립되도록 돕는 것으로 하였다. 어려움에 처한 한국인의 부당한 학정을 직시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철저한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한국친우회는 미국 내 친한 동정 여론을 일으키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뉴욕, 보스턴, 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전역의 21개 지역으로 확장, 결성되었다. 한국친우회 결성은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 집회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인을 돕기 위한 미국인들의 뜨거운 열기를 잘 보여 주었다. 한국친우회는 미국 지역 외에도 1920년 10월 26일 영국 런던, 1921년 5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도 결성되어 사실상 국제적인 친한 단체로 발전하였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1922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다 1923년 말쯤 사라진다. 수많은 대중 집회를 통해 순순하게 외국인 위주로 구성된 한국친우회는 국제적인 도움이 절실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1919년 당시 한국이란 존재가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한국인을 돕기 위해 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한 것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볼 때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었다.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열망을 지지해 주고 한민족의 핍박과 고통을 마음으로 동정하고 지원해 준 한국친우회의 존재에 대해 오늘날 한국인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으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이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과의 인연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의 인연이 각별한 또 한 사람은 독립운동과 무역 사업을 함께한 유일한(柳一韓)[1895~1971]이다. 유일한은 미시간대학교에 재학 중 3.1운동의 영향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필라델피아로 건너와,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이란 주제의 기초위원장이 되어 김현구·조안우와 함께 결의안을 만들었다. 유일한이 기초한 10개 항의 결의안은 장차 독립될 대한민국의 헌법 대강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제1차 한인회의를 주관한 서재필과 참석자들은 이 결의안이 새로 건설될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를 담을 건국의 청사진으로 간주할 정도로 매우 중요시 여겼다.

필라델피아에서 유일한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과 경기 침체 등으로 서재필이 사업을 접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925년 4월 서재필, 이희경(李喜儆)[1890~1941], 정한경 등 독립운동가들과 필라델피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유한주식회사[New Il-han&Company Inc.]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였다. 회사 사장은 서재필, 부사장은 정한경, 전무는 이희경이 맡았다. 회사는 본부 사무소를 필라델피아에 두는 대신 지부를 유일한이 거주하는 디트로이트에 두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업이 잘 경영되지 않은 데다 서재필이 1926년 9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 특별 학생으로 입학하면서 종료되었다. 그렇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맺어진 서재필유일한 간의 인연은 광복 후에도 계속되어 오늘날 유한양행의 유한재단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기념재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재필기념재단의 활동

서재필의 얼과 정신이 서려 있는 필라델피아에는 서재필의 유지를 받든 한인 의사들이 중심이 되어 주요 활동을 펼치고 있다. 8명의 한인 의사들이 1975년 1월 15일 의료봉사와 사회봉사, 교육 출판, 문화 사업을 목적으로 서재필기념의료원을 개원한 뒤 그 해 8월 15일 ‘서재필기념재단’이란 비영리재단을 설립하고 펜실베이니아주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초대 이사장으로는 현봉학이 추대되었다. 서재필기념재단은 필라델피아의 올드 요크 로드 6705에 있으며, 제이슨 의료센터[Jaisohn Medical Center]의 진료 활동 외에 출판문화 사업, 장학 사업, 이민 봉사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서재필의 유업과 업적을 찬양하고 그의 유지에 귀감이 되는 인물을 포상하기 위해 서재필상을 신설하고 1987년 1월 제1회 서재필상 수상자로 공병우 박사를 선정, 시상한 후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다. 특별히 서재필기념재단은 1925년부터 서재필과 온 가족이 거주한 미디어시의 서재필 생가를 매입하여 1990년 11월 24일 서재필기념관으로 재단장한 후 지금까지 운영하며, 한인 동포와 미국인을 비롯해 필라델피아를 찾아오는 수많은 한국인에게 개화 선각자 서재필의 독립 정신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참고문헌
  • 유일한전기편찬위원회 편, 『유일한-나라사랑의 참 기업인』(유한양행, 1995)
  • 홍선표,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현봉학, 『서재필의 생애와 사상-위대한 선각자 서재필의 정신을 이어』(서재필기념재단, 2000)
  • 『서재필과 그 시대』(서재필기념회, 2003)
  • 홍선표,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서재필기념재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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