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美國韓人-政治參與運動-政治界-進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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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항목명 | The Political Participation Movement of Korean Americans in the United States and Their Entrance into Polit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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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한 재미 한인들의 정치참여 운동과 정치계로의 진출.
199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일어난 4.29폭동은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을 거의 파괴하는 정도에 이르러 한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백인을 중심으로 한 국가권력과 언론의 작동 방식, 흑인들의 한인에 대한 심각한 갈등은 한인들이 미국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한인 이민 1.5세나 2세가 좋은 대학을 통해 전문직으로 진출이 크게 늘어났지만 이것만으로는 차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는 한인이 크게 늘어났다. 정치와 공직에 많이 진출해야 한인에 대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한인회, 시민 단체, 한인들이 보다 적극적인 후보자 등록 운동과 선거 출마 지원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인들이 선출직이나 공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미국 백인의 인구 비율이 점차 줄고 있고 히스패닉(Hispanic)과 아시아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점차 소수인종 출신의 정치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 상원과 하원에서도 소수인종이 계속 증가하고 있어 2021년에는 미국 상하 양원에서 비 백인이 128명, 그중 아시아계가 17명을 차지하게 되었고, 한인도 하원에 4명이 진출하였다.
1965년 미국이 이민을 허락하면서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인 인구도 계속 증가하게 되었다. 이민 1세들은 다수가 자영업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꾀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고, 싸게 가게를 구할 수 있는 소수민족의 거주지로 많이 진출하였다. 특히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민권운동과 도시 폭동으로 흑인의 빈민촌에서 많은 상인들이 철수를 하였다. 비어 있는 가게가 많아서 임대료가 브루클린(Brooklyn)과 같은 뉴욕시의 빈민촌에서도 월 300달러 등의 저렴한 상가가 많았다. 따라서 자본이 없는 한인들도 계(契) 등을 통하여 목돈을 마련하여 어떻게든 가게를 열어 돈을 열심히 벌었다. 빈민촌 상가의 빌딩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한인 1세들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의 학력은 높은 편이었지만 영어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주류사회로 진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상업을 통해 돈을 번 경우가 많고, 상인 단체 등 한인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만들어져, 백인이나 흑인 정치인들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권력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1992년 4월 29일 흑인과 라티노(Latino)의 폭동으로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은 파괴되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경찰의 흑인 폭행과 이에 대한 무죄 평결이었다. 무죄 평결이 알려지자 폭동이 시작되었다. 한인들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과 주 방위군이 정치력이 강한 백인 위주로 보호하고 정치력이 약한 한인들의 한인타운을 방치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한 흑인들도 약자인 한인들을 주로 공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언론이 흑인과 국가권력인 백인 경찰의 갈등을 한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보도하며 한흑 갈등으로 만들자 이에 한인들은 분노하였다.
4.29폭동은 한인이 미국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고 미국의 권력구조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어, 한인들도 미국의 일원이며 독자적인 정치적 힘을 가져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한인 사회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또한 한국인이라는 의식보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었다. 4.29폭동을 거치면서 억울함을 극복하려면 미국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한인의 힘을 기르고 정치나 공공 직위에 진출하여야겠다고 생각한 한인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 전역에서 나타났다.
이전에도 간혹 주류 정치계에 진출하는 1세들이 있었지만 1992년 4월 29일 이후 조직적으로 주류 정치계 진출을 촉진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서부뿐만 아니라 뉴욕을 포함한 동부 지역에서도 한인 단체, 교회, 시민 단체-유권자 등록 운동이 적극적으로 벌어졌다. 한인 후보를 찾고 후원하는 모임도 크게 증가하였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녀 미국 문화에 익숙한 1.5세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학교를 다닌 2세들이 선거운동 및 정치활동에 유리한 측면이 있어 1.5세와 2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주류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1.5세와 2세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고 동시에 정치적인 진출도 크게 늘어났다. 관료, 교육위원회, 시의회, 주 의회, 시 공무원이나 관리, 시장 등으로의 진출도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미국 동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한인들의 정치 진출을 도모하는 단체가 뉴욕권에서는 시민참여센터(Korean American Civic Empowerment, KACE)[대표 김동찬] 그리고 연방 차원에서는 워싱턴 D.C.에서 한인 정치인들을 지원하는 미주 한인유권자연대(Korean American Grassroots Conference, KAGC)[소장 김동석]이다. 1996년 한인유권자센터[Korean American Voters' Council]를 뉴욕시에 설립하여 활동하다가 뉴욕권과 연방권에서의 전문적인 활동에 주력하기 위해 2019년 뉴욕권과 연방 차원으로 조직을 분리하였다.
김동석과 김동찬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한인이 희생양이 되는 것을 보고, 한인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과 뭉쳐 단체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유대계의 정치 로비 활동을 모델로 삼고 한인 정치 원동(原動)을 시작하였다. 또한 연방 의원들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정치자금 모집에 개인별 액수의 한도가 있어 지속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아 주고 이를 통해 인연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계속 정치자금을 모집하고 기부하여 정치인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적극 노력을 하고 있다.
시민참여센터와 미주 한인유권자연대는 적극적으로 한인 커뮤니티의 이익과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이나 정치인 배출을 위해 노력해 왔다. 풀뿌리가 강해야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풀뿌리 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그동안 한인 단체나 교회와 연합하여 지속적으로 한인 유권자를 등록시키는 운동을 하면서 1996년 이후 25만 명이 넘는 한인 유권자를 등록시켰으며, 한인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어로 선거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치인 토론회나 선거 포럼 등을 조직하여 한인들의 정치참여를 적극 지도하고 있다.
시민참여센터와 미주 한인유권자연대는 한인의 유권자 등록률 80%, 투표 참여율 80% 달성을 목표로 하는 ‘8080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뉴욕과 뉴저지의 경우만 해도 한인 유권자 등록률은 51~53%, 투표 참여율은 37~40% 정도로 아직 낮은 편이지만 유대계는 등록률 90%, 참여율 96%였다. 시민참여센터는 한인의 투표율을 높이는 풀뿌리 운동, 주민 권익보호 활동, 정부와의 소통, 한인 커뮤니티 결속 및 이익 증진, 시민교육, 지역사회 조직화 등의 일들을 하고 있다. 한인들의 유권자 등록과 투표율이 크게 올라가자 정치인에 대한 영향력도 커졌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인들을 정치계로 진출시켜야 한다는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후보를 발굴하여 출마를 지원하면서 당선되는 한인 정치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워싱턴 D.C.의 단체들은 전국에서 출마할 아시아계에게 정치 워크숍을 제공하기도 한다. 선거에서 당선된 경험이 있는 정치인, 전략가, 정치 분석가, 기금 모집 전문가, 홍보 전문가, 언론인들이 당선에 필요한 각종 노하우를 제공하고 훈련시키고 있다. 미주 한인유권자연대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 의회연구소[The Asian Pacific American Institute for Congressional Studies]도 이미 당선된 사람들에게 리더십 아카데미를 제공한다.
4.29폭동 이후 한인들의 정치 진출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면서 많은 단체와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유권자 등록 운동을 하고 있다. 뉴욕 같은 경우 한인 단체들이 한두 명이 유권자 등록을 하더라도 한인 교회를 찾아가 등록을 처리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한인들 전체적으로 소수인종으로서 차별받지 않기 위해 발언권을 확보해야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해졌다. 더불어서 아시아계가 뭉쳐야 한다는 의식도 많아져 아시아계의 연합단체들과 연대활동에의 참여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한인들의 정치참여 활동과 함께 한인들의 정치계 진출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20년 선거에서 한인 연방 하원의원이 4명이 당선되었다. 이전에는 1992년에서 1998년까지 캘리포니아(California)주에서 세 번 당선한 김창준 하원의원이 있었다. 2018년 처음 당선하여 2020년 재선한 뉴저지(New Jersey)주의 앤디 김이 있다. 2020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영 김(Young Kim), 미쉘 박 스틸(MIchelle Park Steel) 등 2명, 워싱턴(Washington)주에서 매릴린 스트릭랜드(Marilyn Strickland)1명이 추가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한인이 소수인 선거구에서 적은 표차로 당선되어 한인들의 정치 진출에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당선은 연방 정치에서 한인들의 정치력이 크게 신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0년 선거에서 주 상원과 하원에 당선된 한인들이 13명으로 임기 중인 3명을 합하면 총 16명으로 주 상원과 하원의원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중남부와 동부 지역의 주 의원에 당선된 사람들을 살펴보면 버지니아(Virginia)주에서는 마크 김(Mark Kim)이 2010년부터 계속 당선되었고, 뉴욕주의 론 김(Ron Kim)과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의 패티 김(Patty Kim)은 하원의원으로 2013년 이후 계속 당선되고 있다. 메릴랜드(Maryland)주에서는 데이비드 문 (David Mun)과 마크 장(Mark Chang)이 2015년부터 하원의원에 계속 당선되었다. 조지아(Georgia)주의 샘 박은 2017년부터 계속 당선되었으며, 마리아 로빈슨은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하원으로 재선을 하였다.
2020년 선거에서 초선으로 위스콘신(Wisconsin)주에서 홍윤정이, 미주리(Missouri)주에서 에밀리 웨버, 텍사스(Texas)주에서 제이시 제튼이 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조지아주의 샘 박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조 바이든(Joe Biden) 후보 지지 연설을 할 정도로 떠오르는 정치인이다. 미국은 자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주 상원과 하원의원은 실생활에 더 밀접한 정책들을 결정하고 있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는 연방 의원들보다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은 초선들이 대선에 어렵지만 두세 번 당선되면 계속 당선되는 경향이 커서 앞으로도 계속 한인 정치인들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론 김이 한인으로서는 뉴욕에서 처음으로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뉴욕주 하원의원에 현재 5선이 된 론 김은 더 높은 선출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1년 선거에서 한인 사상 처음으로 뉴욕시 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린다 이 뉴욕 한인봉사센터 회장과 줄리 원 후보가 당선되었다. 린다 이 시의원은 이전에도 출마하여 여론조사에서 우세하였지만 떨어진 적이 있다. 하지만 계속 뉴욕시 시민참여위원회 위원, 커뮤니티보드 멤버로 활동하며 지역에 기여해 왔고 또한 한인 봉사 단체의 회장으로서 교육, 노인복지, 의료, 이민 등의 분야에서 한인 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해 왔으며 이민 1.5세로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지난 2009년 뉴욕시 제19지구의 케빈 김이 아시안 표를 결집하고 유대인 표를 얻어 백인 후보들을 물리쳐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민주당 지역이라 당선이 무난하리라고 생각하여 최초의 한인 뉴욕시 의원으로 당선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공화당의 백인 후보가 계속 무차별적인 인종 관련 네거티브 선거전을 감행하여 인종 대결 양상으로 흘러가 아시아계의 수가 적은 상황에서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가 공화당 후보를 찍어 케빈 김은 낙선하였다.
뉴욕 주변의 아시아계 정치는 중국계가 주도하고 있다. 차이나타운과 플러싱을 포함하는 지역의 주 상하 의원에 중국계가 많고 한인은 주 하원의원 한 명에 불과하다. 또 플러싱 지역 연방 의원에 중국계가 당선되었다. 아시아계 정치인들끼리 대체로 협조하는 관계이지만 때로는 격렬하게 선거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인들이 중국계와의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물론 아시아계가 서로 협력관계이지만 중국계나 한인계가 아무래도 자기들 후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뉴욕 인근의 뉴저지에는 작은 시들이 많이 있는데, 시 인구의 30% 이상을 한인이 차지하는 팰리세이즈 파크(Palisade Park), 포트리(Fort Lee), 테너플라이(Tenafly), 엥글우드 클립스(Englewood Cliffs)의 지방선거에서 한인들이 대거 시의원에 계속 당선되고 있다. 한인들이 가장 커다란 민족 집단인 지역에서 당선되어 한인 경찰과 한인 공무원을 늘리는 공약을 하는 등 한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선거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한인이나 아시아계가 많지 않은 지역에서는 드물게 시의원에 당선된다.
뉴욕 인근 팰리세이즈 파크는 인구가 2만 명 정도인데, 한인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서 인구의 50% 이상을 한인이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시의원 6명 중 4명이 한인이며 시장도 한인이 맡고 있다. 미국에서 한인이 시장과 시의회를 장악한 유일한 도시이다. 초기에 한인이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도 시의회도 백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인 상가에 대한 위생이나 교통 단속이 심하였고, 백인 시장의 어머니가 선거 과정에서 한인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뉴욕 시민참여센터와 팰리세이즈 파크 한인유권자위원회는 적극적으로 인종 혐오에 대한 항의 데모를 주도하여 한인들을 각성시키고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통하여 한인이 시 정치를 장악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뉴욕시와 인근 지역에서 한인들의 밀집 주거지에서 한인들이 1.5세, 2세를 중심으로 커뮤니티 보드, 교육위원,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커뮤니티 보드, 교육위원, 정치인의 보좌관으로의 진출은 한인들이 어느 정도 살고 있는 애틀랜타, 북버지니아, 메릴랜드, 필라델피아, 뉴욕시 부근, 보스턴 등 동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경험을 발판으로 다양한 선출직에 도전하고 있다. 한인뿐만 아니라 아시아계의 각성과 정치참여가 늘어나면서 아시아계의 투표율도 빠르게 높아지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커지고 있고 아시아계 정치 진출과 공직 진출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