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특별한 이야기

플러싱 한인타운의 역사와 현재

한자 -韓人-歷史-現在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미국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 12월 19일
원어 항목명 Queens Flushing Koreatown-From the hometown of the first generation of immigrants to the source of the Korean Wave
정의

1960년대 이후 한인들이 이주하여 형성된 미국 뉴욕시 퀸스보로 플러싱 일대 한인타운의 변천 과정과 현황.

개설

플러싱 일대의 한인타운은 1965년 「이민 및 민족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65] 개정 이후 이민 온 한국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된 미국 동부의 최대 한인 집중 지역이다. 뉴욕 대도시권 지역에는 한인 교포들이 집중 거주하며 형성된 한인타운과 상업지구가 몇 군데 있는데, 이 중 플러싱 지역의 한인타운은 미국 동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크다. 플러싱 한인타운은 1970년대 말부터 발전하였는데, 1980년 후반부터 노던 블러바드를 따라 플러싱 동쪽 베이사이드 지역으로 상업지구가 확대되고 연결되면서 플러싱-베이사이드 한인타운이라고도 부른다.

맨해튼을 중심으로 한 뉴욕 한인 커뮤니티의 시작

뉴욕에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21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에 뉴욕 한인회[친우회]가 조직되고, 뉴욕 한인교회북미 대한인유학생총회가 창립되는 등 뉴욕 한인들에게는 의미가 큰 해이다. 1960년대 이전의 뉴욕 일대 한인 인구는 500여 명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주로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맨해튼이 이들의 생활 근거지가 되었다. 컬럼비아대학생이 제일 많아서 컬럼비아대학교 건너편에 세워진 뉴욕 한인교회는 1960년대 이전의 한인들에게는 중요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 즉 1960년 뉴욕 한인회가 설립되기 전까지 뉴욕 한인교회는, ‘Korean Church and Institute[한국 교회와 연구소]’라는 독특한 영어 명칭에 창립 이념이 반영되어 있듯이 예배와 성경 공부, 이민자를 위한 기독교 교육의 범위를 넘어 한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는 한인 이민의 양적 증가와 더불어, 교포 사회의 주역이 정부 관료나 유학생이 아닌 일반 사업가로 대치되며 한인 거주 지역으로서 퀸스가 새로이 부상하게 된다.

퀸스 플러싱을 중심으로 한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퀸스에 정착한 아시아 이민 민족은 주로 한인과 대만인 및 인도인이었는데, 이들이 퀸스에 집중하여 살게 된 이유는 뉴욕시 다섯 개 보로의 상황을 검토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보로 중 맨해튼은 주거비가 너무 비싸서 이민자들이 정착하기에는 부적당하였고, 스태튼아일랜드는 뉴욕시와 너무 떨어져 있었다. 브루클린은 흑인이 너무 많아서 한인 이민자와 다른 아시아 이민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으며, 브롱크스 역시 저소득층의 푸에르토리칸이 집중 거주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퀸스보로는 주로 백인 중산층이 거주하고 학군도 좋아서 아시아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정착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현재 한인과 중국인이 각각 타운을 형성한 플러싱과 베이사이드 지역은 뉴욕에서 가장 좋은 학군에 속하며, 교외 지역의 전원 주거 지역인 롱아일랜드와 가까워 교외 도시의 분위기를 갖고 있으면서 지하철 7호선과 롱아일랜드 레일로드[LIRR]를 이용하면 맨해튼으로 쉽게 통근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플러싱에 한인들이 언제부터 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체로 1964~1965년 뉴욕세계박람회가 플러싱 지역에서 개최되었을 때 한국에서 참가한 300여 명의 행사 요원 가운데 200명 정도가 미국에 잔류하였는데, 그중 일부가 플러싱에 거주하면서 플러싱 한인의 이민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플러싱은 맨해튼에 비해 주거비가 비교적 저렴하면서 맨해튼과 지하철로 연결되고, 경제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라과디아공항 옆에 자리 잡은 곳이다. 1970년대부터 지하철 7호선의 노선을 따라 서니사이드, 우드사이드, 잭슨하이츠, 애머스트 등에도 한인 이민자들이 정착하였지만 1980년대 종착역인 플러싱 다운타운에 한인 상가들이 들어서고 가족 초청 등 이민자 규모도 절정에 이르면서 플러싱은 1990년대까지 한인들이 가장 밀집하며 발전한 미 동부 최대 한인 거주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대동연회장으로 잘 알려진 대동면옥과 목양교회처럼 서니사이드에서 시작했지만 한인들이 플러싱에 대거 정착하면서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있던 한인 업소들도 플러싱으로 이전하였다. 1980년대 초부터 플러싱의 메인스트리트 역을 중심으로 한인 상업 지역이 나타나며, 그 주변으로 한인들이 형성한 민족 집적지가 점차 가시적으로 드러나 한인 이주자 엔클레이브(Enclave)[소수민족 거주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밖에도 플러싱 일대가 한인타운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당시 외부적 배경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0년대 아시아 이민자들이 몰려들기 전 플러싱은 거의 완전한 백인 지역이었다. 1970년에 백인들이 플러싱을 포함한 퀸스 지역 인구의 96%를 차지하였으며, 주로 중산층의 이탈리아계, 유대인계 및 독일계였다. 1960년부터 시작된 롱아일랜드 여러 지역의 신흥 주거지 건설과 1970년대 초 뉴욕시의 재정 위기 등으로 플러싱 지역의 백인들이 롱아일랜드 교외 신흥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생겨난 빈 공간에 한국계와 대만계 이민자들이 유입된 것이다. 이때 아시안계 미국인들이 큰 충돌 없이 백인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안계의 성공적인 동화 내러티브’에서 연원한 모델 마이너리티 담론이 수반한 사회적 효과도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당시 미국은 성공한 아시안계 미국인의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소수 인종에게도 얼마든지 기회가 열려 있다는 이미지를 원하였고, 성실하고 근면한 아시안계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될 수 있다고 여겨지면서 그들을 향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조금은 사라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뉴욕 한인들이 이민 초창기 퀸스의 플러싱과 엘름허스트(Elmhurst) 같은 지역, 그리고 최근 뉴저지 버건카운티나 롱아일랜드 나소카운티와 같은 학군 좋은 백인 중심 교외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흑인들이 겪었던 종류의 차별은 대체로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메리칸 커뮤니티 서베이(American Community Survey)[ACS]의 분석 결과, 2019년 뉴욕시의 한인 인구는 9만 5743명으로 추산되는데, 뉴욕 시내 보로 가운데 퀸스의 한인 인구가 5만 4539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맨해튼이 2만 3842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플러싱에서 베이사이드로 확산한 한인 커뮤니티

1980년대까지는 가장 우세한 아시아인으로 한국인이 주류를 이루던 플러싱에 1990년대부터 중국인이 한인보다 더 많이 유입되면서 한인들은 서서히 플러싱 다운타운을 벗어나 주거지와 상권을 옮기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2000년을 전후하여 플러싱 다운타운의 상권은 중국인이 장악하게 된다. 중국인의 급증과 공격적 상권 확장, 다운타운의 임대료 상승이라는 경제적 이유 외에도 보다 쾌적한 거주지와 자녀 교육을 원하는 안정된 한인 올드커머(Oldcomer), 그리고 이주자 엔클레이브에서 적응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뉴커머(Newcomer)들은 플러싱 다운타운을 떠나 교외 지역, 혹은 뉴욕 각지로 이주를 서둘렀다. 그러다 보니 플러싱 다운타운의 한인 거주자들 중에는 노인의 비중이 아주 높다. 백인의 비중이 높은 롱아일랜드나 뉴저지의 교외 지역은 자녀 교육에 유리하고 범죄나 소음 등이 낮아 거주에 쾌적한 장점이 있지만, 부모 세대 노인들은 한인 가게와 한인 단체가 없으면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자식을 따라가지 않고 플러싱 지역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에 있는 친구들과의 친목을 우선순위로 하는 경우가 많다. 플러싱 다운타운 지역에는 한국어 간판을 가진 수백 개의 한국 가게가 있고 노인들을 도와주는 복지 기관도 많이 있어 영어를 못하는 한국 노인들이 별다른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플러싱에서 한인 거주지가 확산하면서 퀸스에서 플러싱 지역 다음으로 한인이 많이 사는 곳은 플러싱과 이웃한 베이사이드 지역이 되었다. 한인 상업 지역이 노던 블러바드를 따라 플러싱에서 베이사이드까지 연속되어 있는데, 노던 블러바드 한인 상업 지역을 중심으로 남북 양쪽으로 많은 한국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뉴욕시립대학교 석좌교수이자 재외한인사회연구소장인 민병갑은, 이곳 한인타운은 플러싱 한인타운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플러싱-베이사이드 한인타운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베이사이드를 포함한 커뮤니티 11지역에는 2010년 당시 약 1만 7000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공립학교가 플러싱 지역보다 더 좋고, 교통이 덜 복잡하며, 지역 주민들의 경제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곳으로 거주지를 옮겼던 한인들 중에는 이곳에 영원히 정착하는 경우가 많다.

플러싱과 베이사이드에는 한인들이 많이 살 뿐 아니라 한글 간판을 단 한인 가게들이 집적된 모습에서 이 일대가 한인타운임을 더욱 잘 보여 주고 있다. 한국 식당과 한국 식품점, 한국 주점 등을 위시하여 지역 내 한인 외에도 인근 거주 한인들까지 고객으로 하는 1,000여 개의 다양한 상점과 전문 서비스업이 분포하고 있다.

플러싱-베이사이드 한인타운

플러싱-베이사이드 한인타운은 다른 민족의 집중 거주 지역처럼 한인 상업 지역을 형성하여 미국인들의 시선을 끈다. 이곳 한인 상업 지역에 있는 1,000여 개의 한인 가게가 한국어 간판을 달고 한국음식이나 다른 한국 문화 상품을 주로 판매하기 때문에 한국 이민자들에게는 향수와 안전감을, 비 한인들에게는 이색적이고 흥미로운 케이컬처[K-Culture]를 느끼도록 한다.

플러싱 지역의 한인 상업 지역은 플러싱 다운타운에서 가장 번잡한 메인스트리트에서 198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메인스트리트는 점차 중국인들의 상업 지역으로 변화되어 갔으며, 한인 상점들은 메인스트리트에서 동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유니온 스트리트[플러싱 41번 애비뉴와 노던 블러바드 사이]로 점차 이동하였다. 노던 블러바드를 따라 동쪽으로 한인 상업 지역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플러싱과 베이사이드를 연결하는 노던 블러바드는 오늘날 명실공히 한인 상업지구로 변화하였다.

1990년 말에서 2000년대 초만 해도 플러싱 중심 지역을 벗어난 노던 블러바드 주변은 아직 비즈니스가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여서 플러싱 다운타운에 비해 렌털비가 저렴하였으나, 자동차 구매가 증가하고 대형 한인 마트가 등장함에 따라 선형 상권이 가능해졌고 이에 한인 커뮤니티의 발달도 가속화되었다. 노던 블러바드를 교차하는 2개의 거리인 162번가와 벨 블러바드에도 한인 상권이 추가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한인 상권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롱아일랜드 레일로드 역이 있는 149번가와 150번가 머리힐역 일대에는 머레이힐 먹자골목도 형성되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한국음식점, 다양한 콘셉트의 주점과 카페, 제과점, 미용실, 의류점, 병원, 회계와 법률 등 전문직 사무실 등이 들어오게 된다. 선형으로 형성된 노던 블러바드 상권보다 높은 집적 효과를 보이는 머리힐역 중심의 상권은, 편리한 교통과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과 주점들이 밀집된 지역적인 이점뿐 아니라, 먹자골목 지정과 한류 효과에 힘입어 맨해튼 32번가 한인타운 못지않은 지역 브랜드 파워를 가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타민족 대상으로 비즈니스 확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 활동

2010년 당시 뉴욕과 뉴저지 일대 한인 커뮤니티에서의 인구조사 때 자신을 ‘한인’[복합적 인종 선택 포함]으로 답한 사람은 22만 명이 넘었다. 이 중 10만 명 이상이 뉴욕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뉴욕시 거주 한인들 가운데 퀸스에 살고 있는 한인은 약 64%였으며, 이들 퀸스 지역 한인들 가운데 플러싱 일대[커뮤니티 제7지역]에는 42% 정도가 살고 있었다. 플러싱의 한인 인구가 뉴욕과 뉴저지 일대 한인 인구의 11%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이곳을 한인타운으로 고려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 제일 큰 한인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는 데다 30여 개의 중요한 한인 단체가 있고, 또 이곳이 뉴욕 한인의 문화 및 사회 활동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1980년 창립한 플러싱 한인회는 2008년 12월 중부 퀸즈 한인회와 통합하여 뉴욕 퀸즈 한인회로 새 출발하였다. 뉴욕 한인회와 함께 뉴욕 퀸즈 한인회는 각종 한국 문화 및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중요한 문화 및 사회 활동들은 뉴욕 한인 커뮤니티의 중심지로 간주되는 플러싱 지역에서 특히 활발하다. 우선 한국 문화와 전통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할 수 있는 한국 전통 명절 축제는 음력 1월 1일 설 축제와 음력 8월 15일 추석 명절인데, 이 두 명절 축제 모두 플러싱에서 오래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음력 설 축제 행사의 하나로 중국인과 한국인이 공동으로 음력 1월 1일 아침 플러싱 다운타운에서 퍼레이드를 개최한다. 중국인과 한인은 물론 이 지역의 많은 미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의 사물놀이와 중국의 용춤을 선두로 플러싱 다운타운 거리를 행진하며, 가두 행진이 끝나면 오후에 한인들은 플러싱 지역의 학교 강당을 빌려서 제기차기, 널뛰기 등 여러 가지 한국 민속놀이를 함으로써 한국 문화 전통을 한인 이민자뿐 아니라 한인 2세와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플러싱-베이사이드 한인타운에서 설날 가두 행진보다 더 중요한 한국 전통 명절 행사는 음력 8월 15일 추석날을 전후하여 주말 이틀 동안 플러싱 메도스 코로나 파크(Flushing Meadows Corona Park)에서 거행되는 추석 행사이다. 한인들의 추석 축제는 한국에서 가수들을 초청하여 한국의 대중음악 및 춤을 선사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지만, 한국의 전통 결혼식과 씨름, 널뛰기, 제기차기 등의 민속놀이도 보여 준다. 또한 2013년 6월부터는 머레이힐 먹자골목에서 매년 지역사회와 어우러지는 아시아 다문화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민병갑 교수는 2009년 9월 뉴욕시립대학교 퀸스칼리지 안에 재외한인사회연구소[The Research Center for Korean Community]를 설치하였다. 재외한인사회연구소는 미국 동부에서는 최초로 재외 한인 사회를 연구하는 연구소이며, 한인에 대한 연구 결과와 미국 센서스 자료를 분석해 플러싱 한인 커뮤니티에 소개하는 한편, 정기적인 강연회와 세미나 등을 개최하며 한인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이 밖에도 플러싱 지역에서 한인 문화, 사회 활동을 매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인 ‘코리아 빌리지’에서는 거의 매일 한인 문화, 사회 활동 이벤트가 진행된다. 코리아 빌리지에 있는 대동연회장은 주로 칠순잔치나 돌잔치, 결혼식 및 단체들의 모금을 위한 장으로 사용되며, 1층은 각종 한국 옷과 상품들을 파는 고급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또한 지하에는 ‘열린 공간’이라고 하여 한인 단체들이 여러 가지 회의나 세미나를 무료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열린 공간에서도 거의 매일 주로 저녁에 각 단체의 모임이나 강연회가 개최되는데 미술품 전시 같은 문화 행사도 많이 열린다. 월드컵이나 다른 중요한 국제 운동경기에 한국팀이 출전을 하면 코리아 빌리지의 대동연회장에 1,000명 이상의 한인 이민자 및 2세들이 같이 모여 큰 스크린으로 운동경기를 보면서 한국팀을 응원한다. 플러싱 지역에서 코리아 빌리지 다음으로 한인 행사가 많이 진행되는 곳으로는 식당인 ‘금강산’도 있다.

참고문헌
  • 최병현,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뉴욕 한인교회 70년사』(깊은샘, 1992)
  • 『미주 한인이민 100년사-아메리칸 드림을 찾아서』(한미동포재단·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남가주기념사업회, 2002)
  • 임영상, 『코리아타운과 한국문화』(북코리아, 2012)
  • 민병갑·주동완, 「뉴욕 플러싱, 베이사이드 지역의 한인타운」(『글로벌문화콘텐츠』5,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0)
  • 이찬행, 「칼라 블라인드: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적 인종주의에 관한 연구」(『서양사론』120, 한국서양사학회, 2014)
  • 곽동근·임대근, 「80년대 플러싱 한인 상점의 분포 현황과 시사점: 1983~4년 플러싱 상인번영회 회원록을 중심으로」(『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대회자료집』,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8)
  • 「‘머레이힐’ 한인상권 뜬다」(『미주한국일보』, 2002. 4.)
  • 「뉴욕 한인타운 중국계가 몰려온다」(『경남신문』, 2002. 7.)
  • 「WP “뉴욕 한인타운 중국계가 몰려온다”」(『한국경제』, 2006. 4. 2.)
  • United States Census Bureau(https://data.census.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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