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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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1903~1905년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 자녀들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개관.
1903년 1월 2일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갤릭호는 1월 13일 아침 하와이 호놀룰루 제2 부두에 도착했다. 갤릭호에는 기아와 기근, 정치적 혼란을 피해 조국을 떠난 102명의 한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 102명의 한인들이 미국에서 첫 한인 사회를 형성하는 모태라고 통상 일컬어진다. 그런데 이들 102명 중에는 남자 56명, 여자 21명 외에 25명의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아이들과 청소년은 미국으로의 한인 이주가 시작될 때부터 역사를 같이 한 존재들인 셈이다. 이후의 이주 행렬에도 아이들은 꾸준히 포함되어 있었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3년 동안 65차례 선편으로 7,394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이민했는데, 이 가운데 부녀자가 755명,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447명 포함되어 있었다.
부모님과 먼 항해 길을 함께하였던 초기 한인 하와이 이민자 자녀들은 재미 한인 1세와는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재미 한인 자녀들은 어른들보다 영어를 빨리 익혔고 생활에 대한 적응도 빨랐다. 미국식 사고방식을 배우며 성장했고 또한 미국 땅에서 태어난 동생들을 돌보고 공부를 봐주는 역할을 맡았다. 어린 자녀들은 부모들이 낯선 땅에 정착해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을 같이 경험하며 성장했다. 때로는 재미 한인 1세들의 정착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많은 도움을 준 존재들이기도 했다. 재미 한인 1세들은 토지 구입이나 또 다른 경제 활동을 위해 자녀들의 명의를 빌리기도 하였고, 자녀들의 도움으로 언어 장벽을 극복하고 주류 사회와 소통하기도 하였다.
초기 이주민 사회에서 어린 자녀들은 어른과 같이 노동하는 존재였다. 어린 자녀들의 노동은 가계에 도움을 주기도 했고, 학비를 버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하와이 농장에서는 수확기가 되면 사탕수수 농장의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많은 일거리가 생겼다. 아이들은 수확기가 되기 전에는 잡초를 뽑는 일 정도를 떠맡았지만 수확기가 되면 어려운 일을 수행했다. 아이들은 사탕수수를 베고, 사탕수수의 이파리를 잘라내 차곡차곡 쌓아 놓는 일을 했다. 성인 남성이 하루 65전을 받았다면 그들은 50전을 받았다. 말을 탄 루나로 불리는 노동 감독관들이 아이들에게 잡초 뽑기나 수확물 정리 등의 특정한 노동을 부과하기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워킨 밸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헬렌의 회상에 따르면, 이런 아이들의 노동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헬렌은 다섯 살 때 새벽 4시 30분부터 밭에 나가 일을 하였다. 아직 별이 떠 있는 시간에 일을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노동을 계속하였다. 헬렌은 부모님을 도와 도랑을 파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딸기와 포도를 수확하는 노동을 하였다. 헬렌은 노동의 대가로 한 시간에 겨우 1센트씩 지급받았다.
자기 소유의 농장을 가진 소작농의 경우에도 아이들의 노동은 필수적이었다. 10여 명의 독신 남성 노동자를 거느린 소작농조차도 자기 아이들을 노동에 동원해야만 하였다. 소작농이 빌릴 수 있는 땅은 대부분 백인들이 개간하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소작농은 자신의 노동력을 전적으로 활용하고 다른 일꾼의 노동력을 빌리고 자기 아이들의 노동력도 동원하여야만 겨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개간, 재배 그리고 수확까지의 모든 노동을 끝낸 다음 그들이 자기 몫으로 취하는 것은 전체 수확량의 10%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로 노동을 시작한 것은 농장에서 일한 한인들의 자녀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도시의 한인들도 세탁업, 식당, 채소 도매업 등의 다양한 자영업을 하면서 자녀들을 노동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세탁업을 하는 집의 여아들은 수선을 위해 맡긴 옷의 솔기를 따는 일 정도를 맡았다. 채소 도소매업을 하는 집의 남아들은 채소 운반을 도왔다. 아그네스 박권의 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독신 노동자를 위한 음식 조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그네스의 형제들은 야채를 다듬고 씻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자녀들은 어려운 삶을 개척하는 이민자 가족의 일원으로서 10대가 되면 공장으로 취업을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김 헬렌의 경우는 13세부터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시간당 10센트를 벌었다. 하루 종일 중 15분 휴식 시간만이 주어졌다고 한다. 화장실이나 휴게 시설도 없어 공장 근처 숲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용변을 해결하였다. 헬렌의 오빠도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부상을 당해 일을 못하게 되자 14세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는 16세 되던 해 빚 4,000달러를 청산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김 헬렌은 무척 똑똑했지만, 스스로 벌어서 공부해야만 하였다. 14세부터 학업과 일을 병행하였다. 그러면서 두 명의 남동생까지 돌봐야 했다.
이민자 중에는 사업 수완이 좋아 거대한 부를 일군 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가난한 하층민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민자 자녀들의 증언은 20세기 초반 미국 하층민의 생활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김 헬렌은 농장 노동자로 살던 어린 시절 죽음과 폭력을 목격하는 것은 일상이었다고 기억한다.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목을 매어 자살한 주검을 직접 발견하기도 하고 독약을 먹고 자살한 친구 어머니의 주검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웃에서 죽은 아이를 마대에 싸서 강에 버리기도 했다.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가족과 동반 자살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가난 때문이었다. 헬렌의 가족은 한 달에 5달러의 임대료를 내는 집에 살았는데, 이는 꽤 안정적인 가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헬렌은 우유를 마셔본 적이 없고 고기는 일 년에 한 번만 먹을 수 있었다. 대부분 밥과 피클로 연명하며 살았는데, 생일날이라 하더라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당시 아이들의 삶은 비참했다. 헬렌은 9~10세 정도에 토마토소스 캔을 선물을 받았는데, 먹을 것이 생겨서 몹시 기뻤다고 한다. 그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빈곤한 삶은 착취를 일상화시켰다. 농장주는 노동자를 착취했고, 앞서 온 이민자가 늦게 온 이민자를 착취했다. 남성은 여성을 착취했다. 남편을 따라 노동 현장에서 똑같이 10시간 노동을 하고 집에 들어와 식사 준비, 아이들 시중, 빨래 등등의 가사 노동까지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들 아래에서 아이들은 반쯤 방치된 채로 성장하였다. 한 사진 신부의 진술이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우리는 애들이 다섯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는데, 우리 막내는 세살 반, 그래 학교에 보낼 수 없어 매일 아침 데리고 나가서 포도원에서 김을 매는데 그러니깐 젖도 먹이지 못하고 밭에서 재우면서 일하는 거야요. 애들이 참 불쌍했어요. 그래 하루 종일 밖에 있다 집에 오면 너무 고단하니깐 또 자는 거야. 그래 제 끼에 먹지도 못하고 굶다시피 자라는 거야요. 이월 달 아침 새벽에 일어나면 땅이 얼었고 그러니 애 귀가 얼지 않아요. 피가 나오고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번 돈이 얼만지 알아요? 한 시간에 15전이요.”
백인 동네에 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개인 소유의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철도 건너편 동네의 외곽에서 닭장같이 작은 판잣집에서 살았다. 그 판잣집은 철도 건설에 동원되어 착취당했던 중국인 막노동꾼들이 1880년대까지 살던 곳이었다. 창문이나 선반이 하나도 없고 매우 좁은 공간이었다. 그마저도 딸린 가족 수에 상관없이 한 가족에 판잣집 한 채씩 배당되었다. 이메리의 아버지는 너무 더럽고 먼지투성이인 그곳을 그나마 아이들이 잘 수 있는 보금자리로 만들기 위해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벽을 따라 선반을 설치하고 거기에 건초 꾸러미를 올려 건초침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메리는 어린 시절의 이 건초 침대에 익숙해져 16세 때까지 스프링 침대에서 잠을 자지 못했다. 의복 역시 변변한 것이 없었다. 이메리의 가족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만들어 써야 했는데 의복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밀가루 마대자루로 만든 옷을 입었다. 어떤 날은 비스킷 한 조각을 삼등분해서 하루 끼니를 때울 정도로 캘리포니아 이주 첫 1년은 극심한 가난을 견딘 세월이었다.재미 한인들은 소작농 또는 2세 명의로 농장을 소유해서 경작하는 경우에는 일반 농장노동자보다는 형편이 다소 나았다. 그들의 자녀들 역시 조금 나은 삶을 살았다. 한인들은 대체로 소작농을 하는 한인들끼리 공동체를 이루고 모여 살았다. 삼일절과 같은 기념일이나 공휴일이면 한인 가족들은 집을 돌아가면서 모여 친목을 도모했다. 이때 아이들도 함께 모였는데, 고기, 국, 국수, 김치 같은 음식을 같이 먹고 다함께 마루에서 잠을 잤다. 겨울 농한기가 되면 아이들은 꽁꽁 얼은 호수에서 얼음을 지치고 놀았다. 한 곁에서는 불을 지피고 그 위에 핫도그를 구워 먹었다.
미주 이민 초기의 한인들이 겪었던 인종 차별 경험은 크게 공공장소에서의 불평등, 폭력, 주거지 분리로 인한 불평등으로 구분 가능하다. 한인들은 이발소, 음식점, 극장, 유흥 장소 등에 입장이 거부되기 일쑤였다. 1905년 무렵 한인들이 미국 본토로 들어오는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는 동양인에 대한 배타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당시 백인들은 한인들을 ‘더러운 중국인’이라고 불렀다. 백인들의 한국인 혐오 때문에 백인 근처에서 하는 일을 찾을 수 없었고 농장 노동만이 가능했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에도 백인들의 집으로 들어가 일할 수 없었다. 집안일을 제외한 농장일, 과일 따기 등의 실외 일거리들은 가능했다. 한인 2세들도 법적으로 미국 시민이었지만, 동양인이었기에 인종 차별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메리는 학교에 간 첫날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가 학교에 들어섰을 때, 여러 아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며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다. 그러고는 노래가 끝났을 때 한 명씩 그녀에게 다가와서는 목을 때렸다. 그때 그들이 부른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칭’ ‘총’ 새같이 떠드는 중국인이[Ching Chong Chinaman] /담장 위에 앉아 있네[Siting on a wall]/ 담장 따라 백인이 와서[Along come a White man]/ 그의 모가지를 잘라버렸네[and chopped his head off]”
또 다른 재미 한인 2세에 의하면 “나는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이었다. 어느 날 백인 학생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파티는 시작되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한인 2세는 “나는 인종 차별과 더불어 살았다. 인종 차별은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성장하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재미 한인 2세들이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당한 인종 차별은 학교에서 배운 이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재미 한인 2세들이 미국 사회에 동화되기보다는 한인 사회로 집결되게 하였다. 재미 한인 2세들은 독립할 나이가 되어도 경제적 지위를 갖기가 힘들었다. 백인 소유의 회사에 취업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한인 공동체는 독자적인 경제 체제를 유지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노동자가 되어야 했고, 이런 현실은 아버지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열망을 갖게 했다. 한인 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통해 이런 현실을 극복하려 했다. 한인들의 높은 교육열은 학교 출석률에 반영되었다. 1930년 캘리포니아 지역의 인종별 출석률을 보면 평균치에 비해 한인은 13% 정도 높고, 백인이나 중국인에 비해서도 10% 내외로 높다. 더구나 5~20세 한인 남아의 84.7%, 여아는 81.2%가 학교에 출석함으로서, 여성도 남성과 거의 동등한 출석 비율을 보여 주었다.
재미 한인 2세의 학교 출석률에서 잘 나타난 것처럼 재미 한인 1세들은 딸과 아들을 평등하게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재미 한인 부모는 가부장적 가치관과 권위를 강조하기보다는 자녀의 미래를 위하여 디딤돌의 역할을 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전통적인 한국적 가치관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자녀를 위한 희생과 지원은 일반적으로 전통적 가치관으로 분류되지만, 엔지니어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의 특정 분야를 교육하려 한 것 그리고 아들 선호 의식이 약화된 것은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온 하상옥 부부는 세탁업에 종사했다. 하상옥 부부는 불경기에 빵 하나 살 여유가 없어 유통 기간이 지난 빵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경제적 고통 속에서도 딸을 보스턴 줄리아드음악학교에 보내 교육시켰다. 하상옥 부부의 기억 속에는 이 시기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역설적으로 학교 다니는 딸을 바라본 가장 행복한 시기로 남아 있다. 선우 소니아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 역시 아들 딸 구분 없이 자녀들이 동등하게 악기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부는 아들들에게는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딸인 소니아에게는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당시 악기를 가르치는 것은 비싼 비용이 들었지만 이탈리아인 강사를 고용하여 매주 30분씩 레슨을 시켰다. 그러나 이민 전에 한국에서 전통 사회를 경험한 일부 한인 부모들은 양성 평등의 가치관으로 변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아들과 딸을 동등하게 배려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유교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자녀들을 대했다. 소니아의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잔악한 일본에 의해 조국이 식민지화된 상황을 깨우쳐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으로서 요조숙녀가 되어야 한다며 유교적 행동거지를 주입하려 하였다.
1916년 사진 신부로 도미한 윤도연은 오클랜드에서 남편 윤용호와 식당을 경영할 때, 자녀 다섯 중 셋은 학교에 다녔고, 둘은 어렸다. 집에서 식당은 여섯 구역 떨어져 있었고, 윤도연은 새벽 4시 반에 식당에 나와 밤 11시에 문을 닫을 때까지 고되게 일했다. 자녀들은 하교 시간이 각각 달랐고, 윤도연은 손님이 있어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배가 고픈 아이들부터 먼저 음식을 주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한 채 자녀들에게 우선권을 준다고 남편이 불평했을 때, 윤도연은 “난 손님이 아니라 아이들을 먼저 생각한다. 그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만약 아이들의 건강이 희생된다면 어떤 행복을 가질 것인가? 그러니까 손님들 앞에서 내게 소리 지르지 말라.”라고 남편에게 강하게 대응했다. 윤도연은 남편과 가치관이 대립할 때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실천하여 양성 평등에 한 발 다가간 면모를 보였다. 이런 변화된 의식은 재미 한인 2세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본토에서 농장을 하는 재미 한인들의 경우 재미 한인 2세 처녀들은 이른 시기에 결혼을 하였다. 오빠나 동생들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는 경우 또는 드물게 그 자신이 학업을 지속하는 경우가 아니면 16~17세에 농장으로 찾아온 구혼자들에게 시집을 갔다. 1920~1930년대 몬태나 뷰트의 한인 사회는 2세 처녀들이 많다고 소문이 난 곳이라 독신 남성들이 신붓감을 구하러 일부러 찾아오곤 했다. 사진 신부였던 이계만은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는 독신 남성 노동자와 한인 사회의 딸들을 중매하기도 했다. 조카와 친구의 딸들을 중매했는데, 이때 여자들의 나이는 16~17세 정도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한인 총각들이 이계만의 딸들과 결혼할 목적으로 이계만의 집에 자주 들락거렸지만, 이계만은 농장 노동자를 사윗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계만은 “시골에서는 총각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 1년 다닌 뒤 학업을 계속하기 싫어하는 딸을 시집보낼 목적으로 로스앤젤레스로 보냈다. 그리하여 이계만의 딸들은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학력이 높고 그녀들보다 20~25살이 많은 남성과 결혼했다.
이민 초기 한인 사회에서는 여성은 귀했고 부모들은 귀한 딸들을 부자 신랑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리하여 신랑감들이 부자인 척 거짓 행세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부의 나이는 어렸고, 신랑의 나이는 많았다. 당시 신랑의 나이는 신부보다 평균 15~20세 정도 많았다. 몬태나의 한 농장에서 성장한 재미 한인 2세 이루이의 증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몬태나로 신부를 구하러 온 한인 총각들은 모두 자신들이 부자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어떤 총각은 시카고에서 꽃집을 운영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재미 한인 2세 여성들이 이른 결혼을 선택한 데에는 결혼을 통해 가난한 집안에서 수행해야만 하는 가중한 역할을 벗어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대체로 딸들은 남자 형제들이 도시로 나가 학업을 하는 동안 노동을 해서 수입을 올리거나 계속 태어나는 동생들의 보모 역할을 해야만 하였다.
박유순은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재혼하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 두 살 때 하와이로 들어온 재미 한인 1.5세 여성이다. 박유순은 호놀룰루 한인 기독교 여전도사의 중매로 18세 때 37살이나 많은 안재창에게 시집갔다.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성사된 데에는 박유순의 의지가 있었다. 박유순은 어려서부터 학비가 가장 싼 공립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해서 태어나는 어린 이부동생들을 돌보고 살림까지 도와야 했다. 살림을 돌보느라 숙제를 할 수가 없었고, 동생이 아프면 학교를 갈 수 없었고 결국 결석 과다로 진급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집에서 일을 해야 해서 바깥나들이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안재창은 한인 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박유순은 결혼을 통해 현실을 탈출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재미 한인 1세 남성과 재미 한인 1.5세 여성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안재창의 결혼은 홀아비들이 절대 다수였던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에서 큰 화젯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