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20세기 초 미주 한인 이민자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국가 상징 이미지인 태극기를 통해 고찰.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책들에는 초기 이민자의 모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다. 초기 이민자들의 생활을 보여 주는 사진에서는 유독 태극기가 눈에 많이 띤다. 그 사진들에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가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많다는 점도 두드러진 현상이다. 태극기와 성조기, 이미 국권을 상실한 나라의 국기와, 정식 시민권조차 발부해 주지 않았던 나라의 국기를 그들은 왜 줄기차게 나란히 게양했던 것일까?
20세기 전반기 재미 한인은 ‘국가’라는 외피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인으로서 국가 정체성을 간직하고 한인들의 공동체성을 지탱하고자 노력하였다. 재미 한인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한국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미국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었다. 태극기는 비록 주권을 잃어버렸지만 ‘국가’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시각적 상징 역할을 했다. 재미 한인의 경우, 당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어떤 한인들보다 정체성 표현이 가장 자유로웠을 것이다. ‘조센징’으로 불리며 멸시를 받아야 했던 일본의 조선인들이나, 일본 제국의 감시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재중 한인들에 견주어 재미 한인은 일본의 직접적인 위해로부터는 자유로웠다. 그리하여 재미 한인들은 자유로이 태극기를 만들고, 태극 문장을 이곳저곳 그려 넣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태극기를 흔들었을까? 국권을 상실한 20세기 초반 대한제국 발행 여권이 법적인 효력이 없었듯이, 태극기 또한 법적인 효력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인종과 한인들을 구분해 주는 표지의 기능을 수행했다. 태극기는 한편으로는 재미 한인들을 결속하는 표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에서 하나의 집단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표지였다.
재미 한인들은 이민 초기부터 태극기를 사용했다. 특히 단체 활동 때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재미 한인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이 호놀룰루 부둣가에서 새로 오는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광경에서이다. 입항하는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에는 아이들과 함께 서 있는 여성들의 손에 태극기나 성조기가 들려 있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를 마치고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념 촬영한 사진에도 인물들의 뒤로 1m가 넘는 거대한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 게양되어 벽을 장식하고 있다.
이 가운데 1922년 5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 동포들의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40주년 축하 행렬 사진은 특별히 눈길을 끈다. ‘아메리코-코리안(Americo-Korean)’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크게 써서 밝히며 한복에 갓을 쓴 사람과 양복에 실크 모자를 쓴 사람이 함께 꽃마차에 타고 있다. 이들이 탄 꽃마차는 전체적으로 성조기와 태극기가 교대로 달린 줄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행렬은 마치 1882년 미국과 맺은 한미수호조약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조약 체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슈펠트의 회고에 따르면,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는 행사에서 한미 양국은 서로의 국기를 게양하고 그것을 교환했다고 한다. 이 행렬은 마치 그 행사를 재현하는 듯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다시 말해 재미 한인들은 40년 전의 한미 수교를 미국 땅에서 재현함으로써, 한국의 국권이 실재하지 않는 현실에서도 한국이 마치 존재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재미 한인들을 대표하는 신문이었던 『신한민보』에는 이러한 행사들에서 태극기가 애국심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를 보여 주는 기사들이 적지 않게 실려 있다. 1919년 7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1919년 7월 22일에 샌프란시스코 출정군을 환영하는 행사가 벌어질 예정이었는데, 한인들은 행사가 있기 며칠 전부터 행사의 중심 무대인 마켈 거리를 단장했다. 이때 한인들은 홍예[무지개] 모양의 환영문을 만들어서 거기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또 각종 단체에서 특별 행사를 할 때, 일반적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식장 전면에 교차 게양하였다. 1937년 9월 30일자 『신한민보』 기사에 따르면, 1937년 9월에 ‘항일 대전’이라는 구호 하에 열린 한인 대회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와 함께 국민회기를 걸어 단체와 국가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광경을 보여 주었다. 태극기와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국기를 교차 게양하는 것은 북미뿐 아니라 멕시코, 쿠바 등 남미 쪽에서도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국기의 교차 게양은 흔히 수교가 이루어질 때 하는 행위이지만, 미주 지역에서는 국가별 또는 문화별 융합이라는 의미로 이러한 형식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치기념일행사(國恥記念日行事)는 한인 단체의 행사 가운데에서 태극기를 가장 극적으로 활용했다.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매해 8월 29일에 모여 ‘망국(亡國)’을 기억하기 위해 중앙총회뿐 아니라 각 지역의 국민회에서 국치기념일행사를 치렀다. 그 가운데 식장 전면에 게양하였던 태극기를 내렸다가 다시 올리는 식순이 별도로 존재했다. 이날 행사를 보도한 『신한민보』 1917년 8월 30일자 기사에 따르면, 고아원 여학생들로 하여금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푼 채 주벽에 걸린 태극기의 깃 줄을 늦추어 태극기를 반쯤 내려 “당당한 대한제국이 원수에게 욕을 본 것”을 표현하며 「국치기념가」를 부르니 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눈물을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어떻게 하여 국치를 씻을까.”에 대한 연설이 이어지고, 연설이 끝난 뒤에는 다시 이 여학생들이 늘어진 깃 줄을 힘껏 잡아당겨 국기가 다시 벽면에 올라가게 하였는데, 이를 ‘국기 부활 예식’이라고 하였다. 국기가 주벽에 걸리면 국기의 게양이 마치 광복을 이룬 것처럼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만세를 불렀다.
망국의 날에 모여 망국을 잊지 않도록 기억하는 행사에서 국기를 내리는 행위는 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또한 고아원 여학생들로 하여금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풀게 하여 상복을 입은 듯한 모습을 연출하게 한 것은 극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장치였다. 그리하여 이 여학생들이 처량한 소리로 「국치기념가」를 부르자 그러한 슬픔에 잠긴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을 것이다. 연설에 이어서 국기를 다시 게양하는 예식을 국기 부활 예식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국기 게양으로 국가의 부활, 광복과 같은 효과를 내고자 하였다. 이런 행위는 재미 한인들에게 심리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국치의 슬픔을 딛고 광복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더 다지게 하였다. 이처럼 국기를 사용해서 애국심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국기 효과’라고 부른다면, 국치일의 국치 기념 행사는 그 어느 때보다 그러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날이었다.
북미 한인 단체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해마다 열리던 국치기념일행사는 1919년의 3·1 운동 뒤에는 삼일절기념행사에 자리를 내주었다. 삼일절기념행사는 국치가 아니라 ‘독립’을 기원하는 행사로서, 국치일의 무거움보다는 더욱 활기찬 분위기로 독립을 경축하는 행사로 치러졌다. 삼일절기념행사에도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감상적인 분위기의 유도보다는 독립을 기념하고자 하는 축제 분위기가 더 두드러졌다. 『신한민보』 1931년 3월 12일자에 따르면, 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회 주최로 남가주대학 대강당에서 열렸던 12주년 삼일절기념식에는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행사는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개최사와 기도, 축사 등을 거쳐 국기 게양식을 거행하고 이어 「국기가(國旗歌)」를 부르는 것으로 국기에 대한 예를 행했다.
태극기를 통해 고양된 애국심은 태극기의 보급으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양복점에서는 태극기를 제작하여 판매한다는 광고를 『신한민보』에 게재하였다. 광고에서는 명주로 만든 태극기 1본을 2달러에 판매한다고 되어 있다. 이 태극기는 사각형의 태극기가 아니라 긴 삼각 깃발에 태극기 형상을 넣고, ‘KOREA’라는 글자를 크게 집어넣은 변형된 형식의 것이다. 뉴욕에서는 국기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고 그날 소본(小本) 태극기를 발매하여 일반 청중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현재 독립기념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태극기 유물 가운데 1m가 넘는 대형 태극기는 손바느질이나 재봉틀을 통해 제작된 것들이나, 종이로 인쇄되어 다량 제작된 크기가 작은 태극기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소형 태극기들이 바로 한인들이 가두 행사를 벌일 때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대부분의 자료 사진들을 보면 행사에는 거의 언제나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거나 사람들 손에 들려져 있다는 점이다. 재미 한인들이 가슴속에 품고 밖으로 내세우는 깃발은 태극기이지만, 실제로 발 디디고 살고 있는 땅의 국기 곧 성조기는 재미 한인들의 현실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행사에서 재미 한인들이 들고 있는 국기는 자신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재미 한인들이 살고 있는 미국이라는 국가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민자 집단으로 이루어진 미국은 1777년 4월 국기를 제정한 이래, 외교에서뿐만 아니라 자국 행사에서도 국기의 게양이 매우 강조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래 유럽 각지와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모여든 서로 다른 인종과 종족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은 ‘국가’라는 연결 고리이며 이를 표상하는 것은 ‘국기’라고 생각되었다. 내부 갈등과 통합 과정을 거쳐 나온 미국의 성조기가 각 주의 숫자만큼 별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또한 미국 국기가 지닌 인종과 지역 연합을 보여 주는 특징이다. 미국에서의 행사에 성조기가 동원되는 것은 따라서 민족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드러내도록 하는 애국주의의 방편인데, 바로 이 점을 재미 한인들은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에 대한 인식, 나아가서는 태극기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끌어내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종의 자치 정부로서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미국에 있는 한인들을 통괄하고 보증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1942년에는 LA 시청에 태극기가 게양되는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또 1944년 미국 정부가, 구미 여러 나라들의 국기 우표를 발매했을 때, 주권국으로는 현존하지 않는 한국의 태극기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결국 재미 한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듦으로써 미국에서의 자리 잡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조국이 독립되는 것과는 별도로 현실적으로 미국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에게는 더욱 현실적인 성과였는지도 모른다.
“본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출정군 환영을 위하여 본항 마켈 거리에는 며칠 앞에서부터 휘황찬란한 단장을 꾸몄는데 특히 반공중에 높이 홍예 틀어 만든 환영문에는 광채 찬란한 우리 국기를 달았는데 화평의 기운이 반공에 날리더라.”
「태극 국기로 환영한 문 단장-찬란한 화기 반공에 가득」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위 『신한민보』 1919년 7월 15일자 기사는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치러진 행사를 보도하면서, 무지개처럼 생긴 문에 태극기가 달려 있는 모습을 “광채 찬란”하다고 칭송하며 태극기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였던 『신한민보』에는 이와 같이 재미 한인 사회에서 태극기가 지니고 있던 의미를 밝혀 주는 기사들이 적지 않게 들어 있다. 또한 단순히 태극기와 관련된 기사만 실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8월 29일의 국치일을 기념하는 관련 삽화가 게재되었다. 1916년 8월 31일자 삽화는 검은색 바탕의 태극기를 교차해 그리고 가운데에 ‘대한(大韓)’이라는 글자를 쓴 다음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부르기만 한다면 돌아오겠다는 지문을 곁들여 태극기가 대한제국의 영혼을 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문 기사에 나타난 국기에 대한 인식은 재미 한인을 비롯하여 신문의 구독자들에게 공유되었을 것이다. 이는 곧 베네딕트 앤더슨이 설파한 바와 같이, 다량 복제되어 배포된 인쇄 매체가 그 독자들에게 읽힘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곧 신문에 실리는 국기에 대한 인식은 국기로 상징되는 국가를 상정하게 함으로써 조선뿐 아니라 미주 지역 한인들을 국민으로 통합하는 효과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한민보』의 이와 같은 국기에 대한 계몽에도 불구하고, 태극기가 모든 사람에게 국기로서 흔쾌히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1914년 6월 6일자 『국민보』에 우당 이회영이 「국기」라는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태극기는 “망한 나라의 국기”로서 미래를 위한 비전은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이회영의 글은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 태극기가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국기로 받아들여지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치진(韓稚振)은 1927년 3월 27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우리 태극기에 대하여」라는 기사에서도 태극기의 국기로서의 위상에 대한 반대 의견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극기의 원리를 설명하여 이해시키고자 하는 한치진의 기고는 태극이나 팔괘가 중국의 주역에서 온 것임을 들어 주체성의 문제를 삼고, 그러한 것을 국기로 채택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태극기의 국기로서의 위상에 대한 이러한 이견의 존재는 한인들이 모두 태극기를 국가 상징으로 채택하는 데에 동일한 인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신한민보』는 1918년 7월 25일자 「하와이 한인의 손에 잡힌 태극기–임의로 기형을 변하였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태극기를 변형시켜 태극기를 일본인으로부터 감추려 한 사건을 보도한다.
“하와이 연합 중앙회 공고서 제53호에 기록한 ‘내무총장 환영회의 한국국기의 문제’에서 이승만 박사가 미국 내무총장 환영회에 한인 대표자로 한국 국기를 들일 때 한 일인의 배척을 두려워하여 임의로 국기의 형상을 변하여 건곤감리 4괘에서 진손간태를 더하여 8괘기를 만들어 들였다 하니 이것이 사실에는 큰 문제요 문자에는 큰 기록이다.”
이 기사의 요지는 미국 내무총장 환영회에 참가한 이승만이 같은 자리에 참석한 일인들의 눈에 뜨일 것을 두려워하여 태극기를 변형하여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이 사건에 노골적인 분노를 표시하면서, 사실 여부를 밝혀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태극기는 재미 한인들에게 단순한 ‘상상의 공동체’의 표상만은 아니었다. 태극기는 재미 한인들의 실존을 지켜 주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LA의 대한인국민회 기념회관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되어 있고, 한가운데에는 ‘KOREA’라는 글자가 적힌 배지들이 있다. 이 배지들에는 서로 다른 일련번호가 적혀 있는데, 그것은 1940년대에 국민회 회원들이 실제로 착용하고 다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의 공격에 노출된 매우 불안한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한인들은 차림새나 외모에서 일본인들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고, 특히 1910년 이후 미국으로 온 사람들은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일본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가해질 위해를 피하기 위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동시에 나란히 새긴 배지를 배포하여 부착하고 다니도록 했다. 이는 태극기를 그려 넣음으로써 이 배지를 착용한 사람이 일본인이 아니라 재미 한인임을 드러는 것과 동시에 성조기를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미국에 우호적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배지에 표현된 일련번호는 대한인국민회에 소속된 사람들의 명단에 적힌 번호로서, 각 사람에게 고유한 번호가 부여되어 있었던 만큼 이것은 일종의 신분증 역할을 했다.
배지를 부착한 것은 1940년대만의 일은 아니었다. 1919년 8월 14일자 『신한민보』의 기사에 따르면, 이 시기에도 백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으나 태극기 패표(佩瓢), 곧 배지로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알리고, 자신의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윌로우스 지방에 거주하는 어린아이가 갑자기 토사곽란을 일으켜 아이의 아버지가 미국 의사를 청하러 갔더니 의사가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진료를 거부하였으나, 우연히 그 동포의 옷깃에 태극기 패표가 있는 것을 보고 한인이냐고 물으며 어린아이의 진찰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의사는 애당초 그 재미 한인을 일본인으로 간주하고 자신은 일본인의 병을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일본인 배척 의식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매우 고조된 상태에서 외견상으로 일본인과 구분이 안 되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이 향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아이의 아버지의 경우 옷깃에 태극기 배지를 부착함으로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토사곽란으로 사경을 헤매던 자신의 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를 게재함으로써 『신한민보』는 태극기에 대한 애국심과 소속감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당시 한인들은 배지 착용과 같은 방식으로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 처한 존재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본국을 떠나 흩어져 사는 존재인 디아스포라, 그리고 그 본국이 현실적으로 지켜 주지 못하는 존재인 재미 한인들에게는 태극기라는 상징은 현실적인 국가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집착하게 되는 표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태극기라는 표상은 그 자체로서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주하는 곳의 국기가 받쳐 줌으로써만 힘을 지닐 수 있었다. 나란히 게양된 태극기와 성조기는 그 두 나라 사이에 불안하게 유동하고 있던 디아스포라적 존재로서 한인들의 삶의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대규모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로 이주했던 재미 한인은 대한제국 국민으로서 미국에 이주했지만 곧 모국의 국권이 박탈됨으로써 국적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재미 한인들은 모국의 국권뿐 아니라 자신들의 국적을 위해서도 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해 임시 정부로 결집된 독립운동을 후원하면서 미주 내에서 재미 한인들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이들은 태극기뿐 아니라 성조기를 함께 게양하기도 했다. 이는 재미 한인들이 모국과 거주국을 함께 기반으로 하는 이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유동하던 존재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재미 한인들은 태극기를 게양하거나 태극기 배지를 부착함으로써 일본인과 혼동되는 데서 비롯될 수 있는 위해나 피해로부터 재미 한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재미 한인들은 태극기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로 사용하였다. 주권이 상실된 상태에서 국기라는 국가 상징은 회복해야 할 주권에 대한 관념적인 표상일 뿐만 아니라 낯선 땅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조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