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현대/현대 |
미국에서 재미 한인이 주도하는 사업 분야 가운데 하나인 뷰티 서플라이 산업 이야기.
다민족 국가에서 나타나는 경제생활의 한 단면으로 특정한 민족이 특별한 업종에 상대적으로 많이 종사할 경우, 이를 에스닉 비즈니스(ethnic business)라고 말한다. 재미 한인들 역시 비록 이주의 역사가 오래 되지도 않았고, 인구 비중도 전체의 약 2.5%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주력산업으로 에스닉 비즈니스를 성장시켰다. 흔히 재미 한인의 3대 에스닉 비즈니스로 간주되는 업종이 세탁업, 식료품 사업, 뷰티 서플라이(beauty supply) 사업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뷰티 서플라이 사업은 재미한인들이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성공 신화를 창조한 대표적인 에스닉 비즈니스이다. 뷰티 서플라이는 샴푸·염색약 등의 각종 케미컬에서부터 가발·헤어피스·헤어 악세사리를 포함하는 헤어, 화장품, 뷰티 관련 잡화들을 망라하여 취급하는 유통업체와 채널을 일컫는다. 미국의 뷰티 서플라이 사업은 크게 백인 뷰티 서플라이 사업과 흑인 뷰티 서플라이 사종으로 나눌 수 있다. 한인들이 비록 백인 뷰티 서플라이 사업에 뛰어들기는 어려우나 흑인 뷰티 서플라이 사업에서는 거의 독점하다시피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아랍인들, 동남아시아인들, 중국인들이 뷰티 서플라이 업종에 가담하고 있으나 아직은 한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뷰티 서플라이 사업의 주요 제품인 모발과 가발의 생산 및 도소매는 한인들이 독점하고 있고, 반면에 약품과 미용 재료의 제작은 백인과 흑인이 독점하고 있다. 현재 미국 전역에 한인이 운영하는 뷰티 서플라이 업체의 수는 대략 8,500개이며, 매출액은 200억 달러에 이른다. 그렇다면 미주 한인들은 어떻게 흑인 뷰티 서플라이 사업을 독점할 수 있었고, 현황은 어떠한가를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미국의 뷰티 서플라이 사업에서 한인들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한국의 우수한 가발 생산 기술이 기여한 바가 크다. 1965년에 미국의 새로운 이민법이 제정됨에 따라 한인의 새로운 미국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고,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미국 사회에는 가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미국의 가발 유행은 흑인의 인권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은 ‘검은 것이 아름답다(black is beauty)’라는 표어에서 볼 수 있듯이 흑인들의 고유 문화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흑인의 인권 운동과 더불어 가발은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식생활 다음으로 중요한 생활용품이 되었다. 흑인의 머리카락은 곱슬머리일 뿐만 아니라 납작하여 머리카락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흑인들은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꿈꾼다.
미국의 가발 유행 때문에 1960년대에 한국에서는 한인 머리카락을 미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에게 수출하였다. 원래 한인 머리카락은 검고 거칠어 가발 재료로서는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염색약이 개발됨으로써 한인 머리카락도 좋은 가발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조만간 한국의 수출업자들은 한인 머리카락으로 직접 가발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1967년 일본에서 인모 대용 제품인 합성 섬유 카네칼론(Kanekalon)이 발명되었는데, 한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은 독점적으로 이 기술을 이용하여 미국에 인조 가발을 수출하였다. 한국의 가발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중요한 대미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가발 수출액은 1971년 한국 총 수출액의 6.5%를 차지하였을 정도였다.
1960년대 이주한 한인들에게 가발은 그들이 미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적절한 품목으로 인식되었다. 본래 가발 사업은 유대인의 업종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한국산 가발이 수출되면서 한인 이민자들이 가발 장사에 뛰어들기가 상대적으로 훨씬 용이했다. 즉, 가발이 한국에서 수입되었기에 구매의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미국 주류 상인들이 흑인 시장의 구매력을 예상하지 못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1970년경에 한국에서 생산한 인조 가발은 가격이 매우 저렴하였기 때문에 미국 흑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초에 한국산 인조 가발을 파는 한인 가게가 저소득층 흑인 동네를 중심으로 많이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의 가발 제조업자들과 미국의 한인 가발 수입업자들은 흑인 동네에 가발 가게를 개업하는 것으로써 사업의 확장을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재미 한인들이 가발 장사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한인 유학생들 중에도 공부를 포기하고 가발 장사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 인모 가발은 인조 가발보다 수십 배나 비쌌기 때문에 백화점에서나 팔리고 있었다.
한인들은 가발의 생산에서 수출, 판매까지 완전히 독점하면서 흑인을 상대로 한 모발 상권을 장악하였다. 한참 경기가 좋을 때는 3달러짜리 가발을 150달러에 팔기도 하는 등 당시 한인 업자들의 표현대로 “‘딸라’를 부대에 주워 담았다.”라고 한다. 흑인들은 머리카락에 민감하기 때문에 다른 인종보다 월등하게 많은 양의 모발 제품을 사용한다. 특히 흑인 여성들이 모발 제품에 호기심이 많다. 이들은 특히 쉽고 빠르게 자기가 원하는 헤어스타일로 바꿀 수 있어 상품화된 모발제품을 좋아한다. 흑인들의 곱슬머리 가락을 곧게 펴는 약을 릴렉서(relaxer)라 하는데 이것은 흑인 뷰티 서플라이의 중요한 용품이 된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릴렉서 이외에 모발 영양 제품, 보조 제품 등이 개발되고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전역에 흑인이 거주하는 곳에는 어디나 할 것 없이 뷰티 서플라이 상점이 생겼다. 1980년대에 번창한 뷰티 서플라이 산업은 l990년 중반에 절정기를 맞이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인들의 가발 사업은 위축되기 시작했고, 특히 가발이 아닌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상품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발장사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이로 인해 한인들은 단순한 가발 장사에서 뷰티 서플라이 사업으로 업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흑인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하던 가게를 인수하여 염가로 대량 판매를 시도하면서 서플라이 사업은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한인들은 가발과 헤어 그리고 모든 헤어 관련 제품을 취급하는 판매 전략을 통해 크게 성공하가에 이르렀던 것이다. 말하자면 재미 한인이 미국의 뷰티 서플라이 산업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인 뷰티 서플라이 업계는 상업적 질서를 유지하고 소매상들의 공동 구매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을 결성했다. 대표적으로 2개의 조직이 있는데, 소매상들의 협회인 NBSDA와 도매업자의 협회인 NBSWA가 그것이다. 소매업자의 협회로는 미주 미용상인중앙협의회가 있고 그 산하에 지역 협회를 두고 있다. 뷰티 서플라이 사업의 외곽에 해당하는 도매상, 모발 수입상 , 잡화상, 네일상, 미용인 등도 전국미용재료도매인 협회, 미주 모발수입업자 협의회, 미주 모발업도매업자협회, 뉴욕 한인잡화협회, 뉴욕 한인네일협회, 한인미용인연합회 등을 결성하였다. 협회는 회원들의 상업을 돕기 위해 상품을 공동 구매하며 상품 세미나를 개최하고,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를 유도하기도 한다. 협회들이 흑인 교회 지도자 또는 흑인 상공인 단체를 지원하는 것은 고객의 대부분이 흑인들이기 때문이다. 협회들의 중요한 기능 중 또 다른 하나는 도매상의 횡포를 방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도매상들은 고객인 소매상에 호의적이지만 때로는 도매상이 의도적으로 한 소매상을 죽이기 위해 가게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팔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협회는 상거래 질서를 어지럽히고 상도덕을 위반하는 도매 업소에 대하여 소매업자 협회가 단결하여 항의하거나, 질서를 위반한 도매상에 대해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미국 서부 지역의 워싱턴, 오리건, 네바다, 캘리포니아에는 동부 지역 다음으로 많은 뷰티 산업체들이 몰려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는 한인들의 뷰티 서플라이 사업 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이다. 가주 뷰티서플라이협회[CBSDA]에 따르면, 흑인이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하나 헤어 케어 시장 매출의 30%를 차지하며, 흑인 미용 재료 시장의 80%를 한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한인 가게들은 잉글우드 캄튼 밸리, 리버사이드, 샌 버나디노 등지에 분포하며, 대표적인 인조 모발 생산 및 유통 업체로는 미드웨이 인터내셔널, 웨스트 배이 임포트, 로얄 아이맥스 등이 있으며. 샴푸, 릴렉서 등 케미컬 영역도 뉴스트, 시그너스 등 한인 유통 업체들이 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업체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외에도 텍사스의 세븐스타나 벤스가 전국적 영업망을 갖춘 대형 한인 유통업체이다. 가주 뷰티서플라이협회는 미주 뷰티서플라이총연합회에 가입하고 있으며, 설립된 지 24년에 이르고 있다. 가주뷰티서플라이협회에 소속된 회원 사업소는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지역에 약 500여 개에 이른다.
현재 한인 뷰티 서플라이 사업은 무한 경쟁 상태에 놓여 있다. 헤어 종류부터 샴푸 종류, 비누 종류, 화학 제품 종류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신제품 개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쟁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재미 한인 1.5세나 2세가 산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재미 한인 1.5세나 2세들이 점포를 인수하면서 상점의 분위기나 디스플레이, 판매 전략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대상 고객도 흑인에서 백인으로 조금씩 전환되고 있다. 이에 따라 백인들의 새로운 판매 및 제조 기술이 한인업계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대형 슈퍼마켓과의 경쟁도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다. 월그린에서는 드럭스토어에 흑인용 화학 약품을 진열하였고, 월마트와 케이마트(KMart)에서는 백인 뷰티 상품과 나란히 흑인 뷰티 제품을 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들과 경쟁하기 위하여 가주 한인 소매상들은 흑인들이 좋아하는 뷰티 잡화를 진열하고 선전을 확대하는 등 큰 슈퍼마켓이 할 수 없는 판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제품을 발 빠르게 진열하여 마트와 차별화하며 경쟁하고 있다.
뷰티 서플라이 사업은 재미 한인 l 세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면서 개척한 사업 영역 가운데 하나다. 즉, 흑인을 상대로 영어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힘들게 시작한 어려운 직종이었다. 생소한 사업 세계에서 상업적이지 못한 의식을 갖고 그나마 자기들이 개척한 영역에서 오로지 성실과 열성을 다하여 유지해 온 영역이었다. 이제는 미국에서 성장한 재미 한인 1.5세와 2세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뷰티 서플라이 업계도 합리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하고 판매 전술의 근대화도 시도되고 있다. 재미 한인의 3대 업종인 뷰티 서플라이 산업은 마치 재미 한인 전체의 오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