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미국에서 최초의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여 한인 군사 훈련을 꾀한 독립운동가의 생애 조명.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주도, 새크라멘토를 지나 50마일 정도 북쪽으로 가다보면 윌로우스(Willows)라고 하는 작은 농촌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윌로우스에서 북쪽으로 레딩(Redding)에 이르는 이 지역은 벼농사로 유명하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농경지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조한 기후지만 산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을 끌어들여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쌀이 생산되고 있다. 윌로우스의 벼농사가 처음 시작되었던 1910년대, 벼농사로 미주 한인 최초로 백만 장자가 된 인물이 바로 ‘백미 대왕[King of Rice]’ 김종림이다.
김종림은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의 자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로 인해 김종림의 가치관을 조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김종림이 실천하고 이룩한 삶을 근거로 평가한다면 진정 김종림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이 시대의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무엇이 김종림을 그렇게 행하도록 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김종림은 자신이 이룩한 부를 아낌없이 재미 한인들과 조국 독립을 위해 기부했고, 한인 비행사 학교를 설립하여 비록 이국땅이었지만 암울한 시대의 한인들이 기개를 펼칠 수 있도록 후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김종림은 재미 한인 100년사에서 기록되어야 할 ‘전설’적 인물임은 분명하다.
함경도 정평 출신인 김종림은 국운이 저물기 시작했던 1906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9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Salt Lake) 철도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공립협회 솔트레이크지방회 회원으로 입회하면서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후 캘리포니아 비살리아(Visalia), 프레즈노(Fresno) 등지에서 노동일을 하였다. 1909년 2월 국민회가 결성되었을 때, 김종림은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의 법무원, 총무 겸 학무원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한인 2세들을 위한 한글학교나 대학생, 그리고 공립신보사에 대한 재정적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1910년에 김종림은 고국에서의 농사 경험을 되살려 땅을 임대해 농업을 시작했다. 당시 재미 한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았기에 자연히 경험이 있는 농사일을 선호했다. 따라서 농촌의 한인들은 채소와 과수원, 그리고 벼농사 소작농이나 자작농에 뛰어 들었다. 1911년에 일시적으로 김종림은 그간 번 자금으로 스톡턴(Stockton)에서 상점을 열기도 했고, 1912년부터 프린스턴(Princeton)에서 벼농사를 시작했지만 크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5년에 이르러 100에이커[1에이커는 4,046.85642㎡]의 면적에서 6,200여 석(䄷)을 수확하는 풍작을 거두었고, 이후 점차 임대 토지를 늘여, 1919년에는 3,300에이커를 경작하여 약 21만여 석을 수확하였다. 1918년 3월 김종림은 치과 의사의 딸, 최원희[앨리스 최]와 결혼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은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골드러시(Gold Rush) 돌풍이 불었던 1850년대에 수십만 여명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캘리포니아에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는 4만여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먹을 쌀을 소규모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산업적인 벼농사는 1912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김종림은 상대적으로 일찍 벼농사에 뛰어든 셈이다.
김종림의 쌀농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곡물 가격의 폭등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쌀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이때부터 캘리포니아의 농장주들도 다른 작물 대신에 벼농사를 시작했고, 벼농사에 익숙한 한인 농부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임금을 받고 농사 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김종림이 토지를 많이 소유했던 것은 아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양인은 법적으로 농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종림은 백인 파트너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임대 농업으로 성공했다. 농지를 임대할 경우 김종림은 소득의 10%밖에 받지 못한다. 20세기 초 캘리포니아에는 ‘10% 계약’ 조항이 있었는데 땅 소유주가 90%의 이익을 갖고 소작농은 10%의 이익을 받도록 했다. 1919년에 김종림은 임대 농지 계약의 가혹한 조건 가운데서도 약 8만 달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소득을 올렸다. 이는 김종림에게 백미 대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질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절에 김종림은 한인 최초로 백만장자의 서열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김종림에게 시련이 닥친 해가 1920년이었다. 10월초 김종림의 논은 폭풍우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추수를 코앞에 둔 시기에 벼들이 폭우와 강풍에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쓰러진 벼는 인력으로 수확해야 하는데 인건비가 이전의 2배 이상 소요되었고, 더욱이 저온으로 벼의 성장도 더디었기에 추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시점이어서 쌀 가격도 하락세였다. 결국 김종림은 60여만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유타주 솔트레이크(Salt Lake)시의 철도 건설 노동자 시절부터 김종림은 남다른 기부 정신과 봉사 정신을 보여 주었다. 1909년 공립협회에 의연금 10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던 김종림은 이듬해 정월 『공립신보』의 신문 기계 구입을 위해 30달러를 기부했다. 당시에 30달러는 가난한 철도 노동자에게는 큰돈이었다. 1913년 흥사단이 창립되었을 때에 8도 대표 중 함경도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흥사단원과 대한인 국민회원들이 주주로 참여한 북미실업주식회사에도 주주로도 참여하였다. 1918년 『신한민보』 식자 기계 구매를 위해 200달러를 기부했는데, 『신한민보』는 김종림의 기부를 “10년의 미국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종림은 어려움에 처한 동포들을 지원하는 데도 인색함이 없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1919년 대략 1년 동안 재미 한인들이 총 30,388달러 25센트의 독립 의연금을 냈는데, 그 가운데 최대의 기부자가 3,400달러를 낸 김종림이었다. 김종림은 그러한 공로로 임시 정부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1919년은 그 어느 때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열정이 재미 한인 사회를 달구었던 한해였다. 비록 3·1 운동이 일본의 총칼에 무너졌지만 독립을 향한 염원의 불길은 더욱 높이 타올랐다. 독립을 위한 모금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군대 양성을 위한 재미 한인 사회의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1919년에서 1920년에 이르는 시기 김종림은 대한인국민회 지방위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직접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금 모집에도 힘을 쏟아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 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무력 투쟁의 일환으로 비행기대의 편성 방침을 마련한 바 있었다.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은 대한인국민회 총무직책을 맡은 곽림대(郭臨大)의 제안에 따라 함께 캘리포니아의 윌로우스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부에 있는 한인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비행술을 가르칠 수 있는 양성소 건립 방안을 세웠고,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윌로우스의 백미 대왕 김종림에게 협조를 구하려 했던 것이다. 세 사람의 뜻은 일치했고, 한인 비행사양성소는 노백린 장군이 교장이 되고, 김종림이 총재를 맡으며 곽림대는 훈련생 감독 역할을 담당하기로 했다. 양성소는 김종림의 지원으로 40에이커[161,874.257㎡, 1,224.204평]의 부지를 확보했고, 최근 문을 닫은 퀸트학교[Quint school]를 교사로 임대했다. 한 해 동안 김종림은 비행사양성소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3만 불을 제공하여 교관 및 정비사의 보수와 운영비 일체를 감당했다. 비행기 구입과 유지를 비롯하여 김종림이 기부한 돈은 5만 달러가 넘었고, 매월 3,000달러의 운영비도 부담했다. 김종림의 후원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가 되는 윌로우스 한인 비행사 양성소가 탄생할 수 있었다.
1920년 3월 문을 연 비행사양성소는 7월 공식 개교식도 갖고 훈련기도 자체 보유하면서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체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비행사양성소는 편제상 비행 학교의 상급 기관이자 후원 기관으로 일종의 회사인 비행사양성사를 설치했고, ‘비행사양성사 장정’까지 채택했다. 장정에는 양성소의 출범 취지를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비행가를 양성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했다. 양성소에는 15명의 훈련생을 선발하여 비행 훈련에 돌입했고, 멀리 중국에서 한인들이 훈련을 받으러 오기도 했으며, 한때 학생수가 3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비행사양성소가 위기를 맞은 건 재정 후원자인 김종림의 농장이 그해 10월 폭풍우로 결정적 타격을 입으면서 부터였다. 설상가상으로 1921년 4월 10일 조종사 시험 중 기체 사고로 비행기가 추락하여 임대 비행기에 대한 보상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에 이르렀다. 김종림은 재미 한인 사회에 지원을 호소하는 등 비행사양성소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4월 중순경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20년의 폭풍우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김종림은 사업 재건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게를 열고, 간장 공장을 설립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이전과 같은 사업 성공의 신화를 쓰지 못했다. 1920년 가족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지만 김종림은 임페리얼 밸리(Imperial Valley)에서 다른 한인들과 함께 벼농사로 재기를 시도했지만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 김종림은 89세까지 소작농으로 힘든 삶을 이어 갔다.
경제적 어려움이 김종림을 괴롭혔지만 김종림의 애국적 활동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소식에 접하면서 미주 한인 사회는 학생 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각 지역에서 한인공동회가 설립되었다. 김종림 역시 1930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공동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 대공황 가운데서도 대한인국민회 교육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국어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김종림은 나성 한인공동회의 회원들과 함께 중국후원회를 조직했고, 1940년 5월에 결성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 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김종림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에 지원했다. 김종림의 두 아들 역시 미 해군에 지원하여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다. 큰 아들 김진원은 알류샨열도[Aleutian Islands]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작은 아들 김두원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2년 8월에 개최된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에서 회장에 피선된 후 로스앤젤레스 동지회 북미 총회관 매수와 동지회 북미총회 기관지 『북미시보(北美時報)』 창간을 주도하였다.
김종림의 애국 활동은 조국의 독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김종림은 도산에게도 지지와 후원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이승만의 지지파로 남아 있었고, 1946년에는 동지회 북미총회 제5차 연례 대표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비록 많은 후원과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지만 재미 한인 사회에서만큼은 김종림은 민족의 지도자로 대우 받았다. 1946년 장남의 결혼식장에 400여 명이 넘는 하객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국민보』의 보도에서 당시 김종림이 재미 한인 사회에서 가졌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광복 후 김종림은 북미 동지회를 이끌며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후원하기 위해 6,873달러를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농사에 매진하면서도 고아원과 양로원을 건립하는 등 사회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국이 수해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대한부인구제회와 협력하여 한국의 이재민 동포 구제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종림은 자신이 후원한 양로원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73년 1월 2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89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김종림은 로스앤젤레스 잉글우드 공원묘지[Inglewood Cemetery]에 묻혔으나 김종림의 유해는 2009년 4월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종림은 동포에 대한 헌신과 조국에 대한 사랑의 표본으로 미주 한인사의 숨은 보석에 해당한다. 김종림이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면서 그 첫해에 기부한 5만 달러는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200만 달러를 상회한다. 그러한 기부는 김종림이 백만장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김종림의 기부와 헌신은 남다른 조국애와 동포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종림이 결코 달러로 환산할 수 없는 영예(榮譽)를 남긴 고귀한 한인임은 분명하다.
김종림은 1971년 광복절에 “오랜 기간 해외에 거주하면서 한국인 사회의 융화와 복리 증진에 기여해 왔으며, 국위 선양에 이바지한 공”으로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김용식 명의의 표창장을 수여받았고, 2005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