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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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일제 강점기 초기 미국 이민 남성들과 결혼한 사진 신부의 삶을 통해 초기 여성 이민자의 여성 해방적 정신 개관.
사진 신부란 사진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 주로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결혼 이민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진결혼이란 초기 미국 이민 1세대들이 조선으로 사진을 보내 신붓감을 구하고, 신부를 자처한 이들이 사진만을 보고 신랑감을 골랐던 결혼 형식을 말한다.
한인 사진 신부가 미국으로 유입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일본인들의 미국 입국을 막기 위해 일본과 1908년 신사협정을 체결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사협정에는 일본인의 신규 여권 발급을 중단한다는 내용과 함께 이미 미국에 살고 있던 노동자는 자신의 부모, 자녀, 배우자를 초청할 수 있다는 인도적인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인은 이 조항을 이용해서 사진을 일본에 보내 원거리 맞선을 보는 방식을 고안했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한인들 역시 곧바로 이런 방식을 원용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과 하와이주 정부는 사진결혼을 법 제정을 통해 합법화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 독신이었던 동양인 노동자들의 일의 능률이 저조했기 때문이었다. 동양인 노동자들은 여성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술과 노름, 아편에 빠져들었고, 유부녀를 겁탈하는 일도 생겼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와이 원주민 여성과 독신 남성을 결혼시키기도 했으나 생활 습성과 말이 달라 오래가지 못했다. 본토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때문에 동양인과 백인과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다. 본토의 한인 남성들은 현지의 미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사진 신부 제도였다. 일제는 당시 남성 조선인들의 미국 이주를 억제하는 반면, 사진 신부의 이민은 허용하였다. 일제는 독신 한인 남성들이 가정을 가지게 되면 정치적 활동에 소원해질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한인 사진 신부의 이주 허용에는 미국 본토 및 하와이 한인들의 반일 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진결혼이 성행하면서 일본 제국의 여권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여성들의 수가 급증했다. 1911년 한인 이민자 8명은 모두 여성이었고, 1912년에 19명, 1913년 49명의 여성이 입국했다. 1910년 11월부터 1924년 10월까지 하와이에는 800여명, 미 본토에는 115명의 한인 사진 신부가 이주하였다. 하와이로 이주한 사진 신부는 한반도 남부[영남과 그 주변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본토로 이주한 115명의 대부분은 북부[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이었다. 본토 이주 여성들은 상해를 통해 입국했다. 사진 신부의 이주로 재미 한인 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재미 한인 사회는 독신 남성 위주였으나 사진 신부들이 유입되면서 점차 가족 중심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910년 한인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90.7: 9.3이었다. 그러나 사진 신부의 이주로 1920년에는 75.4: 24.6. 1930년에는 65.8: 34.2로 성비의 불균형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사진 신부의 이주는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종료되었다. 1924년 미국의 동양인배척법으로 일본인의 미국 입국이 금지되었고 일본 국적으로만 입국 가능했던 한인 사진 신부의 이주도 사실상 중지되었다.
결혼 이민자였던 사진 신부들은 다른 형태의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나고자 하는 이유와 일정 부분에서는 같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것이었다. 당시의 한국은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영향력을 피해 미국으로 가려는 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일본을 피해 미국에 갔는데 미국에서 일본인 농장주 밑에서 일하게 되는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20세기 초의 한국에서 기독교는 서구 사상을 전하는 통로였으나 유교적 가치관에 반하는 종교로 박해의 대상이었다. 기독교도였던 여성들은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을 동경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주 동기로는 구한말의 피폐해진 한국 민생 경제의 영향도 있었다. 미국에 가면 황금이 길바닥에 깔려 있다는 속설은 가난하고 배고픈 여성들에게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이런 일반적 이유들 외에 사진 신부들만의 독특한 이주 동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의 봉건 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당시의 여성은 바깥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교육의 기회도 없었다. 사진 신부들은 대개 기독교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었고 자기 삶에 대해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를 지닌 여성들이 많았다. 어린 소녀들은 당시 한국의 봉건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서구 문화가 스며들고 전해지는 것을 보고 듣고 있었다. 이런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은 교육을 받고 싶은 열망과 남성들처럼 사회적 활동을 하고 싶은 열망으로 구체화되었다. 사진 신부를 지원하였던 여성들 중에서 이런 동기가 뚜렷한 경우가 많았다.
선우 소니아(Sunoo Sonia)는 1977년 다수의 사진 신부를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에 등장하는 75세의 박계율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사진 신부로 지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부모님은 내가 열 살이 된 이후 집 밖에 나가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나처럼 지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사진 신부가 되는 것만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박계율은 이후에 사진 신부로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 가족들로부터 멸시와 핍박을 받았다. 또 다른 사진 신부 역시 사진 신부로 자원한 사실이 드러나자 “너는 우리 가문에 먹칠을 했다.”라는 비난과 “우리 집안에서 창녀로 팔려가는 여성이 생겨서는 안 된다.”라는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 신부가 된다는 것은 봉건 제도에 대한 거부 의식이 담보되어야 작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진결혼은 남편의 실물도 모른 채 시집을 간다는 면에서는 자유연애라기보다 봉건적 결혼에 가까웠지만, 집 안에서조차 남자와 마주치면 눈을 내리깔도록 교육받는 현실에서는 차라리 자유연애에 가까웠다. 성인 남자의 얼굴을 사진으로나마 똑바로 보고, 서너 장의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에는 집안에서 정해 주는 혼처로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형식보다는 여성의 의지가 중요했다.
이와 같이 미국으로 이주를 감행한 사진 신부들은 전통적 여성상에서 없는 진취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구한말 남성 우위의 억압적 사회에서 도피할 목적으로 결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14세에서 20대 초반의 사진 신부들 중 일부는 미국에서 신학문을 배워 애국하겠다는 교육적 목적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었다. 19세의 나이로 1913년에 도미한 사진 신부 김석은 12세에 서울의 사립 기숙사 학교로 유학을 간 지식인 여성으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교육을 위해 도미했다. 일본이 교육을 통제하고 한인들은 일본어를 배우고 사용하고, 말하도록 강요당했다. 자유가 없었고, 이것이 모국을 떠난 이유였고, 모국을 떠날 유일한 방법은 사진 신부로서 가능했다.” 17세의 나이로 1917년 미국으로 떠나온 강성학 역시 교육과 여행하려는 욕구가 사진 신부 지원 동기라고 밝혔으며, 김차봉[1915년 도미, 19세], 윤연도[1916년, 24세]도 마찬가지로 교육이 목적이었다. 윤연도의 회고에 따르면, “1916년 사진결혼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이주 동기는 결혼이 아니라 공부가 목적이었다. 모국에서 간호부로 일했는데 선교사로 돌아가 불쌍하고 병든 자들을 돕고 적절한 약을 먹이기 위해 공부하기를 원했다.” 교육 목적의 이민이 많았던 데에는 시대적 영향도 작용했다. 사진 신부가 이주한 1910년부터 1924년의 기간은 초기 이민자들과는 달리 모국에서 이미 근대식 교육을 받았거나 그런 교육에 대한 열망을 키우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노출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시 한인 남성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반면, 사진 신부들은 소학교 이상을 마친 경우가 많았다.
사진결혼 초기에는 하와이 이민 사회의 목사들이 중매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사진결혼이 성행하면서 사진결혼을 전문으로 하는 중매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이씨 부인’ 또는 ‘박 여사’와 같은 식으로 불렸다. 박계율은 사진결혼 중매인을 찾아서 제 발로 30마일이 떨어진 부산으로 찾아갔다. 부산에서 중매인을 만난 박계율은 남성들의 사진을 보고 신랑감을 골랐고, 자신의 사진도 찍어서 미국으로 보냈다. 이렇게 사진을 교환한 뒤 편지를 주고받았다. 짧으면 몇 달씩, 길면 몇 년씩 편지만 교환하는 기간이 있었다. 박계율의 경우는 3년간 편지를 교환한 후 전라도 시부모의 집으로 들어가 남편이 없는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다 시아버지 상을 치르고 상주 노릇을 하며 또 3년을 살았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결혼을 약속한 지 6년 만에 신랑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예정된 신랑을 만나는 경우는 다행이었다. 사진결혼을 빙자한 사기 사건도 많았다. 막상 미국에 가보면 신랑감이 바뀌어 있다거나 애초에 인신매매가 목적인 경우도 있었다. 1934년에는 호적상의 사진결혼만을 한 채로 9년간을 기다리다가 파혼한 사건도 있었다. 19세에 결혼하여 27세까지 기다린 이 여성은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약혼했다는 이유로 사진결혼 상대로부터 횡령죄로 고소를 당했다. 이 여성이 사진결혼 상대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서 썼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는 여성이 미국으로 입국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신랑이 조선으로 생활비를 보냈다.
미국의 독신 남성이 한국에 있는 신붓감들에게 자신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보내면, 신부 쪽에서 그중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자신의 호적 등본과 사진을 보냈다. 신부의 사진을 받아본 남성은 여성이 마음에 들면 신랑의 호적 등본과 여비를 보냈다. 이 여비를 부비(浮費)라 했는데, 보통 200달러 정도였다. 이 여비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전문 중개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권유원’ 또는 ‘인물 거간꾼’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당시 한국에서 하와이까지의 뱃삯은 70달러 정도였다. 사진 신부가 신랑으로부터 여비를 받게 되면 조선 내에서 혼인 수속을 밟아야 했다. 호적상의 아내가 되면 미국으로부터 초청 서류를 받았다. 이 초청 서류를 바탕으로 당국의 허가를 얻어 여권과 도항 면허장을 교부받았다. 그런 다음 일본의 고베나 요코하마로 갔다. 일본의 현청에서 일본 의사에게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신체검사에서 떨어지면 조선으로 돌아가거나 통과할 때까지 재검을 받아야 했다. 『매일신보』[1917년 9월 15일]에 따르면 당시 요코하마에서 사진 신부들은 여관 두 곳에 나누어 투숙하면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사진신부들은 적게는 20~30명씩, 많게는 40~50명씩 가나가와 현의 청사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안질환이나 내장병 등이 발견되면 승선이 거부되었다. 안질환의 경우는 3~4일이나 5~6일씩 여관에서 기다리면서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재검을 받았다. 신체검사는 까다롭게 이루어졌다. 5개월 동안 10번이나 안질환 검사에서 떨어진 여성이 자살 소동을 벌인 사건도 있었다. 신체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미국 입국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에서 떨어지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모든 검사와 시험을 통과해야 하와이행 배를 탈 수 있었다.
하와이행 배는 일본에서 출발하여 큰 배로는 대략 8일, 작은 배로는 13일 정도 항해했는데, 과정에서 멀미로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하와이가 미국 본토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미국 본토까지는 23일 정도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와이까지 간 여성들의 증언만으로도 그 고통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 본토로 가는 여성들은 더 심했을 것이다. 당시 동양인 여성들은 대개 3등 선실인 배 가장 아래층에 갇힌 채로 항해했다. 이 선실은 가축들을 싣는 화물칸이기도 했기 때문에 가축들의 오물 냄새를 견뎌야만 했다. 더구나 여성들은 갑판 위로 나갈 수 없었고, 바깥 공기를 쐴 수도 없었다. 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는 여성도 있었다. 항해를 무사히 마치는 경우에도 심한 멀미의 후유증으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신랑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약 13일 간의 항해 끝에 하와이의 호놀룰루항에 배가 입항하면 여성들은 신원 조회를 받았다. 그런 다음 신랑과 함께 이민국으로 가서 이민관의 입회하에 거수 선서를 통해 정식 부부로 인정을 받으면 상륙이 허가되었다.
사진 신부는 하와이에 입국하여 처음 남편의 실물을 보는 순간부터 좌절했다. 사진 신부를 초청한 남성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 노총각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돈을 많이 벌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며 혹독한 노동 현실을 십수 년 간 견디다가 고국으로 가는 꿈을 접고 미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30대에서 40대 정도의 남성들이었다. 그러나 사진 신부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처녀들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최소 1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났으며, 20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기도 했다. 게다가 이 남성들은 농장의 거친 환경 아래 오랜 노동으로 인해 신체적 노화가 더 빨랐다. 사진 신부들은 사진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실물에 실망하기 일쑤였다. 한인 독신 남성들은 어떻게든 결혼을 하기 위해 젊었을 때 사진을 보내 신부 쪽 가족들의 호감을 사려고 했다. 심지어 잘생긴 친구의 사진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사진 신부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동안 나이가 많은 남편들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졌다. 오랜 세월 혹독한 노동을 하여 생긴 후유증들과 질병에 시달리는 남편을 대신해서 그들은 노동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1910년 당시 하와이 한인 이민자 4,500명 중에 부인들은 300명에 불과했다.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매일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여성들은 아이들과 함께 잡초 뽑는 일, 사탕수수를 잘라 이파리를 잘라 내고 차곡차곡 싸 놓는 일 등을 수행했다. 여성들은 이러한 농장에서의 일 외에도 독신 남성들의 식사와 빨래를 담당하여 맞벌이 노동을 했다. 부인이 있는 가정이 경제적으로 빨리 안정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맞벌이 노동을 통해서였다. 유분조는 10명의 노동자들의 옷을 빨아서 다리고 한 달에 1인당 2달러씩 받았다. 당시 비누가 독해서 손의 허물이 벗겨져 나갔다. 손의 상처로 일주일간 입원을 하기도 했다. 연로한 남편이 병들자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을 했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도시로 이사한 후에는 일당 1달러 25센트를 받고 남의 집에서 세탁을 비롯한 가정부 역할을 했다. 이와 동시에 집에서도 세탁을 했다. 한 달에 1인당 5달러를 받으며 4명의 학교 선생 옷을 세탁했다. 자기 집으로 세탁물을 가져오는 손님들에게는 옷 한 벌당 15센트를 받았지만, 손님 집으로 찾아가서 해 주는 세탁 요금은 한 벌당 10센트를 받았다. 유분조는 이 많은 노동을 감당하기 위해 새벽 2시까지 세탁과 다림질을 해야만 했다.
사진 신부의 노동은 때로는 남편들의 적극적인 권유 속에서 이루어졌다. 박영진은 1913년 열세 살 연상의 남편과의 사진결혼을 통해 호놀룰루로 왔다. 남편 김홍순은 농장의 노동자였지만 노동 일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농장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던 남편은 아내의 노동에 의지하면서 살아갔다. 남편은 어떤 캠프에서 밥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고, 슬리퍼를 만들거나 옷을 수선해 줄 침모가 필요하다고 하면 아내에게 그 일자리를 얻어다 주었다. 이런 사례는 사진결혼이 남성들의 외로움을 달래는 수단을 넘어서 경제적으로 어린 신부에 기대려고 하는 더욱 적극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16세에 사진 신부로 미국을 들어온 유성기의 사례는 사진 신부가 떠안아야 했던 경제적 부담을 잘 보여 준다. 유성기는 일신여학교 재학 중에 선생님의 권유와 도움으로 사진 신부의 절차를 밟았다. 유성기가 결혼할 한태영이라는 남자는 실제 나이가 75세였는데, 40세라고 속여서 사진결혼을 청한 기막힌 경우였다. 이 약혼자는 심지어 이민국에 낼 담보금도 없어서 신부는 호놀룰루항에 내리지도 못하고 이민국에서 2주일간이나 억류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소녀는 노인과의 결혼을 진행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에 살고 싶은 욕구가 하나였고, 또 다른 하나는 봉건적 세계관의 압력이었다. 유성기는 “네가 약속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의리”이며 “그렇지 않으면 집안의 수치”라고 비난하는 부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16세 소녀는 “이빨도 없는 노인”과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노인인 남편은 유봉기가 22세 때 별세했고, 3남매를 키우는 것은 어린 신부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녀의 회고는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떠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릇 하나 없었고 심지어 수저도 없었어요. 이웃집에서 빌렸지요. 그 고생이란 말도 못해요. 사탕 농장에서 일했지요. 처음에는 손가락도 베고 배는 고프고 애가 생기고 먹을 것은 없고요. 그것이 생활이었어요. 그런데 늙은 남편은 한 달에 겨우 15일밖에 노동을 못하니 수입이 있어야지요.”
사진 신부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아 길렀다. “나는 항상 임신 중이었다.”라고 말하는 이계만은 5명의 딸과 5명의 아들을 낳아 길렀다. 박계율도 10명의 자녀를 낳아 길렀고, 유분조는 5명의 자녀를 낳아 길렀다. 많은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만으로도 생활은 벅찼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신부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많은 정성을 쏟았다. 높은 교육열은 한국인들의 자녀 양육에서 보이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진 신부들의 결혼 동기와도 연관되어 있다. 사진 신부들 중 많은 수가 미국을 ‘교육의 땅’이라고 믿고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 신부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사진 신부 윤도연은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더 공부하여 간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사진 신부를 자원했다. 당시 학교 교장이 사진 신부가 되는 것을 말렸으나 윤도연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계만의 경우에도 막연히 미국에 가면 더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옥자라는 가명의 여성은 가출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간 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사진 신부를 자원했다. 이들은 미국에 와서 그 교육에 대한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한 열망을 자녀들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컸다.
사진 신부 어머니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엄청난 노동을 감당했지만, 사실 많은 자녀의 학비를 조달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먹고 살기도 빠듯했고, 벌어들이는 돈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장남과 장녀들은 부모의 생업이나 농장 노동을 거드는 것은 물론이고, 동생들을 돌보는 일에도 큰 역할을 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해 더 배운 큰 아이들은 동생들의 공부를 돕는 일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한적하고 외진 농장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도시로 나가야했다. 때로는 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여성들은 도시로 이주했다. 어떤 경우에는 진학 연령의 아이들끼리 도시로 내보내 함께 살도록 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녀들은 학업과 노동을 동시에 해 내야 했다. 사실 이들이 도시로 이주를 하면 집세를 내고 먹고 살기도 빠듯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비까지 벌어야 했기 때문에 잠을 줄이고 교통비를 아껴가면서 노동과 공부를 병행했다. 자녀들이 고통과 고난을 견디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독려한 것은 어머니들의 큰 역할이었다.
어머니들은 생활고에 치여 허둥대다가도 자녀가 교육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녀 교육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유분조의 경우 남편이 사망하고 노동에 치여 막내를 큰 아이들에게 맡겨뒀다가 막내가 필리핀 아이들과 어울리며 필리핀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아이들 교육부터 챙겼다. 당시 하와이 사진 신부의 교육열은 개인의 출세에 초점을 맞춘 오늘날의 입시 교육열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정치 사회적 의식을 표현하는 행위로 민족의식 및 애국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여성들은 교회나 한인 단체를 통해 한글 교실을 열어 자녀를 교육했다. 이계만이 있던 몬태나주는 농장들이 서로 떨어져 있고, 겨울이 춥고 혹독한 곳이었다. 때문에 한인 부인들이 모여 한글 교실을 열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선생을 구할 수가 없어 매우 안타까워했다. 사진 신부들이 자식들에게 제도권 교육 이외에 한글 교육을 열성적으로 시키고자 했던 것은 민족의식의 발로였다. 여성들은 자식들이 훌륭히 자라나 민족 해방에 기여하기를 바랐다.
사진 신부들은 자녀 교육을 통해서 민족 운동에 이바지한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일본은 사진 신부를 허가하면서 독신 남성들의 반일 운동을 잠재우려는 목적을 가졌다면, 그러한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다. 사진 신부들은 진보적인 여성이었고, 사회적 문제와 정치에 의식이 있던 여인들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주머니를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여성들도 돈을 모아 독립 자금을 기탁하는 데 앞장섰다. 사진 신부를 통해 안정된 가정을 꾸린 한인들은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도 더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진 신부들은 맞벌이를 통해 생활을 안정시켰고, 그 일정 소득을 독립운동에 썼다. 여성들은 대한인부인구제회와 같은 부인회를 조직함으로써 정치적 활동을 했다. 여성들의 조직적 활동은 내부적으로 경조사를 챙기는 계모임을 시작으로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을 계기로 부인회의 결성으로 나아갔다. 한인 부녀자들은 1919년 4월 19일 대한인부인회를 이어서 대한부인구제회와 영남부인실업동맹회[영남부인회]를 조직했다. 1928년 조직된 영남부인회는 하와이 거주 영남 지역 출신 여성들의 구심점이었다. 영남부인회의 부인들은 수시로 김치와 떡, 대구무침 등을 만들어 팔아 그 수익금을 독립 자금으로 전달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여성들은 연극 공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한인부인구제회는 3·1절이나 국민회 창립 기념식 같은 행사에서 연극을 기획하고, 실제 공연에서 연출, 무대 장치, 미술, 음악, 배우 등의 역할까지 주도했다. 이런 연극 활동은 일종의 민족 운동과 문화 사업의 일환이었다. 연극의 내용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반일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공연의 수익금으로 고국을 돕기 위한 의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노년의 사진 신부들은 많은 자손들을 두고 다복한 삶을 누렸다. 박계율은 1977년 당시 75세의 나이로 열 명의 자녀, 스물두 명의 손주와 세 명의 증손주를 본 상태였다. 유분조는 100세가 된 1999년 8월 29일 온가족이 모두 모여 생신을 축하했다. 유분조는 4남 1녀를 통해 18명의 손주와 29명의 증손주를 보았다. 사진 신부 유분조는 이듬해 101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사진 신부들은 노년이 되어서도 독립적인 삶을 꾸리려는 경향이 강했다. 윤도연은 1975년 83세에 4남 1녀 자녀를 두었지만 함께 살지 않고 부부끼리만 따로 살고 있었다. 피차에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진 신부 순희의 남편은 막내딸이 임신 중에 있을 때 노환으로 별세했지만, 순희는 노년에 혼자 살았다. 자녀들 곁에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진 신부들의 노년 삶은 사진 신부들의 독립심과 자의식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심과 자의식은 재미 한인 2세들의 결혼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사진 신부 출신 여성들은 이민 2세들의 자유연애 사상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동포 중심 결혼에 대해서도 더욱 유연하게 대처했다. 구체적 예로 유분조의 딸 앨리스 김이 한국인 며느리를 원했을 때 유분조는 그녀를 많이 말렸다. 자식은 뜻대로 안 되며 강요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용적 태도는 한인 남성 이민 1세들이 자녀들에게 보인 강압적 태도와 봉건적 결혼관에 대비되는 것으로 사진 신부들의 진취적 사고를 반영한다.
노년에 자녀와의 삶을 분리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자 한 사진 신부의 자세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1914년 10월 21일 하와이에 사진 신부로 들어온 송정윤이 보여 준다. 송정윤은 둘째를 낳고 자궁 절제 수술을 해야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둘째가 사망하자 송정윤은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가난한 아이들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장남을 결혼시키고 손주까지 보고 난 1954년, 송정윤은 40년 만에 귀국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 60세 고령의 나이였기 때문에 송정윤을 믿고 기부하는 단체도 없었다. 송정윤은 무일푼으로 홀로 귀국하여 고아들을 돌보면서, 고아원을 만들고 학교를 운영했다. 이러한 송정윤의 일생을 송정윤의 아들은 ‘희생’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했다. 송정윤의 손녀 또한 “할머니는 용감했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했다.”라고 송정윤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이런 삶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는 사진 신부들이 봉건 제도를 거부하고 태평양을 건너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가슴에 품은 삶의 태도이다. 사진 신부들은 애당초 자신의 삶을 부모나 인습의 손에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진 신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 왔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노년에서도 자신의 삶을 누구로부터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꾸리기를 원했다. 박계율은 두 아들을 잃고 어렵게 살아야 했을 때 주변에서 복지 혜택을 받으라고 권고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모두 건강했고, 나 또한 건강한 신체를 가진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66년 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구걸해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진 신부들은 자신의 선택을 기반으로 주체적인 삶을 개척했다. 자신들의 선택으로 생겨난 자식과 병든 남편을 위한 생계 활동을 그렇게 긍정하고 헤쳐 나왔다. 주체적 의지를 바탕으로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되뇌며 살아 왔다. 박계율은 1977년 인터뷰 말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인생철학을 요약했다.
“나의 인생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면, 나를 박계율로 불러 달라. 나의 아버지의 성은 김이라서 원래 내 본명은 김계율이지만, 결혼 후 박계율로 성을 바꿨다. 젊은 시절 나는 참 용감했다. 영어도 하나 모르는 내가 미국에 와서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열 명의 자녀를 키웠다는 게 대단한 것 같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당신이 그 일을 견뎌낼 수 없다고 느낄 때, 어느 누구든 극복할 수 있다고 되뇐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노력해 왔다. 이게 바로 내 인생철학이다.”
한국에서 사진 신부들이 꿈꾸었던 미국은 거리에 황금이 깔린 풍요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적인 풍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봉건 제도를 벗어나서 20세기 초반 한국 사회가 남성의 영역으로 테두리 친 부분 속으로 도전하고픈 꿈과 열정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진 신부들이 꾼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고, 처음 도미할 때의 꿈꾼 많은 것들은 거리에 깔린 황금처럼 환상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사진 신부들이 죽는 순간까지 지녔던 높은 자존감과 도전 정신 그리고 책임 의식과 희생정신, 또한 그 모든 내면의 가치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대한 실현해 낸 생존력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말해 준다. 사진 신부들은 혹독한 삶의 고난들이 좌절시키고 굴복시킬 수 없는, 불멸의 해방 정신을 지닌 여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