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1903년 이후 대한제국에서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로, 호놀룰루시에서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로 이주한 미국 이민 초기 한인의 이주 경로 개관.
“하와이여 하와이여/ 내 와서 보니/ 눈에 비치는 건 지옥뿐이네/ 농장 십장 놈은 악마요/ 감독 또한 그렇고 그런 똘마니여라."
- 사탕수수 농장 한인 노동자들의 노래 -
미국 초기 한인 이민자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려면, 그보다 먼저 한국인들에 앞선 동양계 이민자들의 족적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계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어떻게 들어갔고 어느 정도 규모의 인구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게 되면 미국 초기 이주 한인들이 어떻게 미국 사회로 유입되었고 어떤 이유로 계속 이동하며 삶을 꾸렸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동양인이 유입되는 시발점은 하와이였다. 1800년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번영은 설탕 수요의 증가와 함께 시작되었다. 하와이섬은 사탕수수밭으로 개간되어 갔다. 이 개간의 현장에 동양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1852년 광동 출신 중국인 노동자 293명으로 시작된 사탕수수밭의 동양인 노동자 유입은 1876년부터 1885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97년에는 중국인 노동자가 46,000명에 달했다. 초기에 이들은 일꾼으로서 평판이 좋았으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3년의 계약 노동이 끝나면 도시로 몰려가 싼 임금으로 백인들의 일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인 노동자들은 처음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처럼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아편을 하고 질병을 옮기고 중국인 특유의 생활 습관을 고수하고 집단촌을 형성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와이에서 중국인 수는 계속 늘어나 1884년 전체 인구의 약 1/4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런 중국인조차 사탕수수밭에서 점점 빠져나갔다. 무엇보다 임금이 너무 싸서 저축이라고는 꿈도 못 꾸는 농장 일을 인종 차별과 감독관들의 채찍과 횡포를 견디며 계속하려는 중국인은 없었다. 중국인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미련 없이 농장을 떠나 도시로 그리고 본토로 옮겨 갔다.
중국인들에 대한 대안으로 일본인들을 들여왔다. 1868년 최초의 일본인 노동자 148명이 일본 주재 하와이 영사의 주선으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후 15년간 일본인 이주자는 없었다. 그러다 1876년 하와이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설탕에 부가된 무역 관세가 철폐되고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이 급격히 확장되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국가 간 정식 계약에 의해 이주가 이루어진 1885년부터 1894년까지 대략 30,000명의 일본계 이민자들이 계약 노동자로 하와이에 이주했다. 1890년에는 일본인 노동자 수가 중국인 노동자보다 많아졌다. 일본인들도 중국인처럼 초창기에는 환영 받았으나 점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집단 태업(怠業) 때문이었다. 1890년에서 1897년까지 8년 동안 일본인이 벌인 태업은 29차례였다. 1900년에는 6개월 사이에 23건의 태업이 발생했다. 1902년 하와이의 일본인 노동자는 31,029명으로 전체 42,249명의 73.5%에 달했다. 중국인은 5,299명[9.3%]만이 남아 있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동양인 노동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하와이 도시 지역으로 가거나 미국 본토로 향했다. 미국 본토로 향한 동양인들은 대부분 샌프란시스코항을 거쳐서 미국 서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미국 본토에는 동양인 노동자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 서부 지역에는 중국 사람들이 이미 1840년부터 진출해 있었다. 그들은 동서 대륙 횡단 철도 공사 현장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철도가 완성되는 1869년까지 중국인 노동자 15,000명이 고용되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철도 공사 현장에서 백인 노동자들보다 1/3이나 낮은 임금을 받았다. 1860년 미국 거주 중국인 수는 35,000명 정도였는데, 20년이 지난 1880년에는 그 수가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고용 초기 중국인들은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호의적인 평가와 대우를 받았다. 중국인들은 “인내심이 있고 온순하며 계약을 준수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용주와 마찰이 적었고, 90% 정도가 독신 남성으로서 돈을 벌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으므로 노동 시장에서 크게 적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점점 불어난 중국인 노동자들이 철도 공사가 종료된 후 도시로 들어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인들은 엄청나게 낮은 임금으로 일거리를 차지했다. 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국인들은 저임금을 확산시키는 주범으로 여겨졌다. 중국인들은 하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 문화에 융화되지도 않고, 긴 변발과 자기네 의복을 고수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증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자, 절반이 넘는 중국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귀국하였다. 미국 땅에 남은 중국인들은 나이가 들자 도시로 가서, 땅 값이 제일 싼 철로 주변 지역에 차이나타운을 만들었다. 이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았다.
한편 일본계 이민자들의 미국 유입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1882년 「중국인이주금지법」이 제정되어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중단되자, 캘리포니아의 노동 현장에 필요한 막대한 노동력 충원에 문제가 생겼다. 캘리포니아의 농장주들은 중국계 이민자들을 일본계 이민자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임금 수준은 하와이의 2배였다. 이런 점은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건너오도록 유인하는 동인이었다. 일본에서 노동 주선업자들이 데려오는 일본인들도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도 점점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중국계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일본계 이민자들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대했다. 일본계 이민자들은 근면하였고, 대부분이 모국에서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농장에 생산력 향상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제공하는 전문적인 노동 기술에 비해 처우가 낮다고 느꼈고,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일본인들은 중국인이나 추후 들어올 한인들처럼 농장 일이 버거우면 떠나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조를 형성해 농장주와 대립했다. 하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집단 태업을 벌이면서 농장주와 지속적인 임금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자 일본인 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 일간지들은 일본인의 미국 본토 입국 반대 운동을 선동했다. 그 여파로 극심한 동양인 배척 동맹이 생겨났다.
하와이 농장주들이 조선인 노동자 수입을 고려한 데에는 앞서의 중국인 노동자들의 이탈과 일본인 노동자에 대한 불만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1900년부터 1905년 사이 일본계 이민 노동자들이 34회의 파업을 행하자 농장주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을 견제할 세력으로 한인 노동자 수입을 적극 추진했다. 농장주들은 한 명 수입에 250달러나 드는 백인 노동자들보다 70달러만으로도 수입 가능한 동양인 노동자를 선호했다. 1900년대 초 조선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미국인들이 보내온 조선인들에 대한 평가는 하와이 농장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인은 다른 동양 민족보다도 고용주에게 복종을 잘하며 더 고분고분하다.” 한인 이민 희망자 121명이 1902년 12월 22일 오사카 상선회사 소속 화물선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이들 중 까다로운 신체검사 과정에서 20명이 탈락해 101명의 한인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이 배에는 남자 56명, 여자 20명, 아이 25명이 타고 있었다. 1903년 1월 2일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갤릭호는 1월 13일 아침 하와이 호놀룰루 제2 부두에 도착했다. 이들 중 8명은 눈의 이상으로 입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하와이 이민자 수는 93명이었다. 호놀룰루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1903년부터 1905년까지 65척의 배로 한인 7,226명이 도착했다. 이 중 479명이 신체검사에서 탈락하여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1905년 11월 하와이 한인 이민을 중단시킬 때까지 하와이 이민자 수는 총 6,747명이었다.
한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한 동기는 경제적인 안정과 성공을 향한 욕구가 우선이었다. 구한말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구하더라도 임금이 형편없었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주거지를 보장하고 임금도 고정적으로 지급된다는 사실은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고정 임금과 고정된 노동 현장이 고통스런 올가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3년 동안 하와이로 이민 온 대부분은 도시 출신이었다. 농촌 출신은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지식인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항구 도시의 노동자나 하층 계급 출신 일반 노동자 계층으로, 6000명 이상이 20~30대 젊은 남자였고, 대다수가 미혼이었다. 일본계 이민자들이 대부분 히로시마, 와카야마, 야마구치, 오카야마 출신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국계 이민자들이 주로 광동 출신 농민들인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다.
한인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이민 왔지만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목표를 성취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초창기의 모든 노동자는 캠프에서 생활했다. 칸막이가 전혀 없이 누울 자리만 있는 큰 막사였다. 순전히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이었으니 숨이 막혔다. 식사는 큰 식당에서 같이 했는데, 어떤 농장에서는 몇 개의 식당을 만들어 국적별로 사용하도록 했다. 식사료는 월 평균 6달러 정도였고 세탁비는 1달러 정도였다. 일꾼들은 5시면 일을 나가야 했다. 6시에 일을 시작해 점심 먹는 30분을 제외하고 꼬박 10시간을 일했다. 농장주들은 매일 일꾼들이 일을 나가면 숙소를 검사했다. 그리고 들판으로 나가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이 끝나면 숙소로 와서 목욕과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과 명절을 제외하고 이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임금은 작업량에 따른 방식과 월급제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월급 제도는 1개월에 16달러에서 18달러였다. 하루 품삯으로는 65센트에서 75센트 정도였다. 여자들의 일당은 50센트에서 65센트 사이였다.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나 고국으로 송금을 했던 상당수의 사람에게 이 정도의 저임금은 생활비도 감당하기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노동자들은 방고(Bango)라고 불리는 작은 쇠붙이나 알루미늄판을 명찰처럼 달고 있어야 했다. 백인들은 이 판에 새겨진 번호를 이름 대신 불렀다. 이 방고는 민족별로 다른 도형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한인들은 둥근 모양의 방고를 달았다. 쉬는 날이면 노동자들은 종일 잠을 잤다. 일부는 도박과 술에 빠져 있었다. 친구를 찾아가거나 교회를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와이 농장의 대부분 한인들은 열악한 조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빨리 빠져나가기만 고대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고국으로 귀국하거나 미 본토로 이주하거나 하와이의 다른 도시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1905년 하와이 농장의 한인 노동자는 4,619명이었으나, 1910년에는 2,017명으로 감소했고 1932년에는 442명만이 남았다. 1905년부터 1916년까지 고국으로 귀국한 한인은 1,304명이었다. 한인들은 하와이로 올 때 일을 해서 배삯을 갚는 조건으로 왔기 때문에 임금에서 그만큼을 제하여 받았다. 그리하여 빌린 배삯을 다 갚고 다시 돌아갈 배삯을 벌어 귀국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지배에 들어간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희망적인 일도 아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발생한 노동력 부족 현상은 한인들을 본토로 유인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곡물 위주의 농업에서 과일, 땅콩, 채소 위주의 특용 작물 생산 농업으로 전환 중이었다. 농장주들은 작물의 재배, 수확, 포장, 수송에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캘리포니아의 한 농장주는 과일 수확기에 하와이로 모집원을 파견하여 노동자를 구하면서 일당 1달러 50센트라는 조건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인들은 하와이를 떠나 하와이 임금의 두 배를 준다는 미 본토로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영어 구사가 가능한 한인을 중심으로 수십 명씩 짝을 지어 떠났다. 1903년부터 1907년까지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한인의 수는 남자 950명, 여자 54명, 어린이 33명으로 모두 1,037명이었다. 미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총 6,747명 중 1,015명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하와이로 한인의 공식적인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03년 당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모두 합쳐 100명이 채 되지 않을 정도의 소수였다고 한다. 한인 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하와이 한인 이민자 중 일부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1905년부터였다.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온 대부분의 한인들은 농장에서 고된 노동만 하느라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직업을 구할 특기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본토로 떠나온 것이다. 한인들은 이민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공탁금을 기탁한 뒤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인들에게는 본토에 도착하면 내야 하는 상륙비 2달러와 짐 찾는 비용 50센트조차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신체검사를 담당했던 드루 박사[Dr. Drew]가 조선에서 선교사로 일한 인연이 있어 한인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공립협회 간부들은 한인들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사람들은 선창으로 마중 나가 샌프란시스코에 첫발을 내딛는 한인을 대신해 비용을 지불하고 짐도 찾아주었다. 그들은 한인들을 공립협회나 한인 감리교 전도소로 데리고 가 숙식을 제공하고 각기 신입 회원으로 포섭했다. 그리고 이들을 일자리가 있고 한인 밥집[여관]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도착한 한인들이 특별히 어딘가로 가야 할 행선지가 있을 때는 편도 기차표까지 사 주면서 떠나보냈다.
1905년경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더러운 중국인(칭크)’이나 ‘경멸스러운 일본인(Jap)’으로 불렸다. 이들은 수적으로 매우 소수여서 한인이라고 인식되지도 못하고 다른 동양인으로 오인되었다. 이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겪는 차별을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다. 1905년 무렵 한인들이 미국 본토로 들어오는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는 동양인에 대한 배타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던 한 여성이 남긴 기록은 당시의 동양인 배척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에 1906년 12월 도착해 배에서 선창으로 내려갈 때 젊은 백인 남자들이 서성거리며 구경거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웃으며 우리 얼굴에 침을 뱉고 엄마의 치마를 발로 걷어차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으로 우리를 놀렸다.” 미국 본토로 넘어오는 한인의 수가 증가하자 한인 지도자들이 한인들의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도산 안창호는 중국인이나 백인들이 경영하는 농장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부탁했다. 캘리포니아 주 남부 리버사이드에서 농장 일을 직접하며 한인 일자리를 얻어 주기도 했다. 이에 따라 직업을 알선하는 한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기가 모은 노동자들을 노동 현장에서 감독하는 십장들이었거나 철도 공사장의 갱리더(gang leader)였다. 이들은 유창한 언변과 갖은 수단을 동원해 경쟁적으로 한인을 모집했다. 때로는 이 과정에서 다툼이 벌어져 폭력을 휘두르고 경찰이 동원되기도 했다.
1900년대 초반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건너 온 한인 이민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가족이 해체된 이민자들의 삶은 특히 비참했다. 그 이민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차이나타운에 있는 동양 여성을 위한 피난소[Shelter, Elen Srark Ford Home]에서 일하던 여성 봉사자가 남긴 두 한인 여아들에 관한 보고서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호텔에 버려진 두 한인 여아와 그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05년 9월 호텔에 버려진 한인 여아 두 명을 호텔 종업원이 발견하고 피난소로 데려왔다. 아이들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농촌에 일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 오랫동안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1908년 1월 26일 여아들이 피난소로 온 지 2년 3개월 후에 아이들의 어머니가 피난소로 찾아왔다. 아이들을 다시 되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사회 봉사자의 표현에 따르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고 짐승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이들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사망했다고 말했다. 재혼한 남편은 좋은 의붓아버지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오클랜드의 호텔로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사회봉사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사회봉사자는 그 다음날 아이들의 어머니가 사는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다음날 사회봉사자가 발견한 아이들의 어머니 집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만한 집이 아니었다.
“이튿날 나는 그녀가 말한 호텔로 갔는데 내가 아이들을 그녀와 함께 보내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호텔은 중국인 집 지하실을 여섯으로 나누어 방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벽은 거친 나무판자를 세워 신문지를 발라 만들었고 40㎝ 높이 나무판자로 단을 놓고 멍석을 깐 것이 침대였다. 그녀는 아이들이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에 관심을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왜 아이들을 호텔에 그렇게 오랫동안 버려두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아이들을 호텔에 버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기독교인인 내가 아이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라 생각해 아이들을 내게 보내달라고 호텔 직원에게 부탁했다고 답했다.”
이민자들을 고달프게 한 것은 이혼과 같은 가족 해체 또는 폭력 사태와 같은 인재(人災)만이 아니었다. 천재(天災)는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더 가혹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재해는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지진 같은 재난이 발생하면 이민자들은 경제적 피해뿐 아니라, 주류 사회가 보내는 증오의 표적이 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전 도시가 불에 탔으며 이재민만 20여만 명이 생겨났다. 사망자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모두 100여 명 정도였는데, 절반 이상인 53명이 재난을 당했다. 그나마 다행히 희생자는 없었다.
캘리포니아 백인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은 날로 커져가자, 한인들도 함께 반일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외교권을 상실했고, 1906년 2월부터 한인은 일본 영사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 교육 당국이 1906년 10월 11일 일인 아동에 대해 공립 학교 입학을 금지하는 법을 공표하였을 때, 한인 아이들도 함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1907년 3월 초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포한 「행정명령 589」는 하와이, 멕시코, 캐나다 등을 경유하여 미 대륙으로 입국하려는 숙련, 비숙련 일본인 및 한인 노동자들의 이민 길을 막았다. 법적으로 일본 신민이 된 하와이의 한인 노동자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모국으로부터의 이민이 중단된 상태에서 「행정명령 589」에 의해 하와이 한인들의 이주마저 중단되자 캘리포니아 한인 사회는 타격을 입었다. 1907년 이후로 한인 사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소수 중의 소수 집단으로 남게 되었다.
1907년의 「행정명령 589」가 한인들에게 치명적인 악재였다면, 1908년 신사협정의 결과로 1910년부터 사진 신부가 이주할 수 있게 된 것은 호재였다. 이미 미국에 거주하는 노동자의 부모, 자녀, 배우자는 여권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조항을 이용해 한인 사진 신부들도 캘리포니아로 이주할 수 있었다. 사진 신부들 덕분에 독신남성 위주의 한인 사회는 점차 가족 중심 사회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1905년 대한제국에서 미국으로의 직접 이민이 중단되었고, 1907년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의 이민이 중단되었으며, 1924년 사진 신부의 입국마저 중단되었다. 이는 한인 인구의 분포와 세대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1920년대부터는 캘리포니아 지역 한인 인구의 분포도에서 미국 출생자인 한인 2세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이민자 대비 4.6%에 불과하던 미국 출생자가 1920년 30.6%에 이르고 1930년에 46.6%에 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