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특별한 이야기

에스닉 커뮤니티로서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의 에스닉 커뮤니티로서 성장과 변화의 과정.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에스닉 커뮤니티

우리말로 흔히 ‘민족 분산’ 또는 ‘민족 이산’으로 번역되는 디아스포라(Dispora)는 단지 한 민족 집단 성원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과정뿐만 아니라 분산한 동족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본디 ‘유대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의 분산’을 가리켰던 이 용어는 현대에 들어서 ‘이주민, 국외로 추방된 난민, 초빙 노동자, 망명자 공동체, 소수 민족 공동체’도 포함하는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한민족의 이민 역사에서도 우리는 민족 이산의 경험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 비유하여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가운데 미주 지역의 한인 이민사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로 구한말의 기근, 빈곤과 압정을 피해서 이주를 선택한 이들과 일제 통치 시기에 생산 수단을 뺏긴 농민과 노동자들, 정치적 난민과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룬다. 다음으로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고 이후 한반도 주둔에 따라서 국제 결혼한 여성과 전쟁고아, 입양아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는 미국 이민법이 개정된 1965년 이후 특히 1970년대 이후로, 이때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주한 한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차별이었다. 인종, 민족,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의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고 차별 받던 시기에 이민자들에게 일자리와 심리적 안정과 지지를 제공하고, 민족 종교와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보호된 환경을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에스닉 커뮤니티(ethnic communiy), 즉 민족 공동체였다. 민족 공동체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개인주의적인 생활이 주를 이루는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이민자들에게 초기 정착에 필요한 물적·정신적 토대를 제공하여 주류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 하는 교두보 역할을 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전 세계의 이민자 집단은 1세대가 민족 공동체에서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자녀 교육에 대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이에 따라 이민 2세대들이 좀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통해서 주류 사회의 노동 시장에 참여함으로써 점차 언어와 문화면에서도 주류 사회로 동화되며 편입되는 과정을 겪었다. 재미 한인도 이런 전통적인 동화의 과정을 거쳐 미국 사회에 편입되었지만 다른 민족 집단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한인 타운은 미주 한인들의 동화 과정이 타민족과 구별되는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온상이라 할 수 있다.

한인 타운의 형성과 특징

미주의 한인 사회는 오랜 역사를 거쳐 정착하고 발전하였다. 머나먼 이국땅에 첫 발을 디뎠던 재미 한인들은 당시 동양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미국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식당이나 호텔, 이발소 등에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심지어는 공공장소에서 폭력을 당하기도 했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이민 온 한인들은 생계를 위해서 미국 사회에 정착하려면 자체적으로 실업 환경을 조성해야 했다. 더욱이 그들은 일제 치하에서 국내의 자본을 도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재미 한인들은 에스닉 커뮤니티를 통해 일자리를 제공받거나 민족적 종교나 문화를 나누고 심리적으로 서로 기대면서 미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이민 첫 세대들이 미국 현지에서 적응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영어 교육이었다. 이민 1세대 한인의 대부분은 이주 당시 현지인과 의사소통을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영어 교육은 재미 한인의 정착과 생업에서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당시 동양인은 백인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 한인 사회 지도자들은 앞장서서 재미 한인의 적응을 돕기 위해서 영어 교육을 통해 언어 장벽을 개선하고 외국인과 친밀해지며 미국 사회에 점차 융화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영어 교육의 문제와 더불어 정체성 문제는 재미 한인들이 미국에 융화되어 갈수록 확립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한인 타운이 형성되기 전부터 재미 한인 사회에서는 민족 정체성 확립과 성공적인 이민을 위해서 주로 한인 교회 학교나 사설 야학을 통해 영어를 비롯해 국어, 역사, 지리, 문화 등을 교육했다. 대표적으로 대한인국민회의 교육 사업이었던 클레몬트 학생양성소는 재미 한인 사회 최초의 공립 학교로 독립을 위한 민족정신 배양을 목표로 운영되었다. 그 결과 재미 한인 사회 지도자들을 다수 배출하였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인들은 미국인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사업에 진출하거나 여러 서류 작성 시에도 불이익을 당하는 일을 점차 줄이면서 자신들의 생활 범위를 확장할 수 있었다.

초기 한인들은 주로 여관, 상점, 음식점, 세탁소와 같은 상업 부문 외에도 서비스업과 철도 및 공장 노동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 갔다. 이후 이민 1세대들은 경제적 안정을 이룩하면서 적극적으로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지만 자녀의 교육을 통해서 미국의 중산층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닉 커뮤니티로 구성된 한인 타운은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특성을 보여 준다. 한 가지는 에스닉 커뮤니티를 통해서 기반을 마련한 후 교외로 진출하는 속도가 다른 민족 집단에 비해서 매우 빠르다는 점이다. 미주 지역에서 한인들은 주로 서부와 동북부에 밀집되어 있으며,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광역 지역 내에서도 한인들은 중앙 도시보다는 교외에 더욱 많이 살고 있는 형세이다. 최근 수십 년간 미국에서 교외화 현상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인들의 교외화는 미국 평균의 50%를 상회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아시아계 중에서 인도인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인들의 교외화가 높은 이유는 이들의 소득 수준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녀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으로 인해 교육 환경이 좋은 교외로 이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1990년 이후로는 교외로 바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재미 한인의 교외화가 높아지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민족 공동체에 있어서 타민족 집단은 혈연과 지연 등이 기반이 되지만 재미 한인은 교회가 주된 토대가 된다. 미주 지역 한인들의 지리적 집중도를 살펴보면 미국 전체 인구에 비교하면 높은 편이지만 다른 아시아계 집단에 비해서는 낮은 편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 유의영은 “이미 역사가 짧은 한인들이 일본계와 중국계처럼 특정 지역에 강력한 민족 연결망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미주 한인사회에서 교회는 단지 종교 적인 기능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인 이민자들에게는 교제의 장소이자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후세대에 계승하는 사회 문화적 기능도 수행한다.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성격과 활동을 특징지은 이들은 1903~1905년 사이의 하와이에 도착한 사탕수수 노동자들로, 이들의 이민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알렌(Horace Allen)과 존스(George H. Jones)와 같은 선교사들이었다. 따라서 한인 노동자가 배치된 하와이의 농장마다 예배처가 세워졌고, 이때부터 한인 교회는 이민자들의 공동체적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 교회와 같은 자발적 결사체에 의해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재미 한인 사회는 초기부터 결사체적 성격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1962년 남한 정부는 잉여 인구를 이국으로 내보내서 국내의 인구 압력을 감소시키고 해외의 교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이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불어 1960년대 중반에 미국과 캐나다가 이전까지는 북서구 유럽계 이민자들을 선호하던 이민법을 개정해서 문호를 한인에게도 개방하자 많은 수의 한인들이 더 넓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찾아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했다. 미주 지역에서 한인들이 집중된 주를 살펴보면 캘리포니아와 뉴욕이 단연 앞선다. 2000년 통계를 보면 1/3이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은 에스닉 커뮤니티로서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 초기 한인 사회의 형성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코리아 타운은 다른 지역들보다 역사가 빠른 편이다. 시카고나 워싱턴 지역과 같이 대부분의 코리아 타운이 1970년대 형성되기 시작했던 반면에, 로스앤젤레스는 처음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주했던 한인 노동자들이 1905년 이후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같은 미국 본토 서부 지역으로 재이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경 로스앤젤레스에는 대략 60여 명의 한인이 있었는데 주로 하와이에서 건너온 사람, 유학생, 인삼 상인 등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근처 남부에서는 오렌지 농사를 하면서 정착 기반을 닦아 나갔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장로교선교위원회[Presbyterian Missionary Extension Board]의 도움을 받아서 한인 장로교회를 조직해 다운타운 내의 벙커 힐(Bunker Hill)이라는 곳에서 매주 종교 집회를 가졌다. 초기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한인들은 버몬트 가(Vermont Street)와 웨스턴 가(Western Street)에 주로 거주하면서 1930년대 초반까지 잡화점(grocery store), 세탁소, 구두 수선점을 운영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기 한인 거주 지역이 버몬트와 웨스턴 가에 형성된 이유는 이곳이 아시아인들의 집중도가 높았기에 인종적으로 관대한 지역이었고, 부동산 가치가 낮아 상대적으로 낮은 임대료가 형성되어 있었고, 다운타운과 가깝기 때문에 일자리 구하기가 쉬웠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쉬웠다는 점 때문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의 형성과 발전

1960년대에 초반이 되면 로스앤젤레스 남부 지역의 흑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유대인, 아시아인, 백인들이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재미 한인들이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재미 한인 사회의 중심지가 올림픽 대로[Olympic Boulevard]와 크렌쇼 대로[Cresnshaw Boulevard] 등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서쪽 지역과 10번 고속 도로의 북쪽 지역 일대로 점차 이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1968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희덕이었다. 이희덕은 한인 거주 지역을 한인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희덕은 웨스트 올림픽 대로 3014에 영빈관이라는 음식점을 개업해서 한인을 위한 주요 공동체의 기능을 제공하기도 했고, 한인 사업가들과 부동산 중개인들로 구성된 코리아타운발전협의회[Koreatown Development Association, KDA]를 조직해서 주변의 저렴한 토지를 구입해 한국 상인들에게 임대하는 일도 하였다. KDA는 1973년에 한국어 간판 걸기 캠페인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얼마 되지 않아서 한인들이 경영하는 상점들이 올림픽 대로와 크렌쇼 대로를 중심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옛 코리아 타운은 이제 나이든 한인들 소수만이 남게 되었고, 새로운 코리아 타운을 중심으로 한국 잡화점, 은행, 음식점, 병원, 그리고 여러 유흥 시설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에는 한인 공동체가 로스앤젤레스시로부터 공식적으로 코리아 타운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로스앤젤레스 지역 한인 교회의 역할

재미 한인 사회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요인 중에는 한인 교회도 있었다. 미국 이민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한인 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한인 교회는 재미 한인사회와 코리아 타운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미주의 한인 교회는 1965년 이후 이민의 증가와 거의 정비례하여 급속히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초기 이민자들이 세운 교회로 모였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 지역에도 불과 4개의 한인 교회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새로운 이민 물결이 일기 시작했던 1965년 이후로 특히 지금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1982년에는 이 지역에만 한인 개신교회가 319개, 가톨릭교회가 5개나 되었다.

이렇듯 한인 교회는 이주 지역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기반으로 작동했다. 먼저 교회는 한국 이민 1세에게는 한국인(Korean)이라는 정체성을, 2세에게는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acn)이라는 정체성을 보강하는 기능을 한다. 유럽 중심주의적인 문화, 백인 우월 사회에서 소수 민족 신분으로 정체성에 혼동을 겪게 되는 재미 한인들에게 한인 교회는 신앙적 정체성과 함께 교인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종족적,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 및 보강을 통해서 내부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 교회는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공동체로 기능한다. 한인 교회는 타국의 문화가 익숙지 않은 대부분의 이민자들에게는 자연적으로 말과 문화, 그리고 정서가 통하는 한인들 간의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각종 예배와 모임을 통해서 교인과 교인, 교회와 교회, 그리고 교회와 기타 단체들이 필요와 기능에 따라서 서로 연결되어 한민족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와 같이 재미 한인들이 비교적 많이 집중되어 있는 곳에서는 교회가 커뮤니티 봉사기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는 여성 폭력 피해자 쉘터로 푸른초장의 집, 청소년 선도 기관인 젊음의 집, 장애인 사역기관으로 물댄동산과 밀알선교회, 홈리스사역 등을 교회 계통의 봉사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도 한인 교회는 한글과 같은 전통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장이 되기 하였고, 때로는 독립운동을 비롯해서 노동 운동과 민주화, 통일 운동의 조직적인 후원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코리아 타운의 교외화와 계층화

1970년대에 들어서자 한인들은 양질의 교육 환경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위해서 로스앤젤레스의 중심부에서 외곽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로스앤젤레스 외곽 지역의 재미 한인 인구가 많이 증가했다. 특히 1980~1990년대에는 로스앤젤레스 남부 외곽 근교 지역이 한인의 주요 거주 지역으로 부상했다. 토런스(Torrance), 가데나(Gardena), 세리토스(Cerritos) 등과 같은 지역이 바로 그에 해당하였다. 교외 지역의 재미 한인들은 그들만의 클러스터(Cluster)를 형성했다. 한인들의 교외화 현상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더욱 심화되어 LA카운티 외곽 지역인 라크레센타(La Crescenta)/글렌데일(Glendale), 세리토스, 토런스 지역의 재미 한인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는 재미 한인 인구는 전체 한인 인구 비율로 7%가 감소했다.

따라서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교외 지역의 한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경제적 격차가 발생하였다. 현재 코리아 타운은 주로 거주지를 옮길 여력이 없고 전통을 고집하는 노인, 가난한 한인 거주자, 사업체 소유자들이 주를 이루면서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아울러 코리아 타운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대다수의 거주자들이 라틴계 이민자들이며, 여러 인종들이 이 공동체 내에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로스앤젤레스만이 겪고 있는 현상은 아니다. 동부의 시카고 코리아 타운 역시 기존의 한인 타운에는 근로자 계층 또는 저소득층 한인들의 주거지 및 작업장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으며, 교외 지역은 전문직 종사자나 기업인, 중산층으로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북미주 한인의 역사』(국사편찬위원회, 2007)
  • 윤인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재외 한인의 이주, 적응, 정체성』(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 박원석, 「한인 이주민의 정착 과정에서 한인 네트워크 역할 및 활용 방안-미국 LA 지역 한인 이주민 사례를 중심으로」(『한국지역지리학회지』21-2, 한국지역지리학회, 2015)
  • 이하희, 「1900~1910년대 샌프란시스코 한인 사회의 형성과 성격」(국민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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