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서숙

한자 和龍書塾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중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개교 시기/일시 1904년 5월 14일
이전 시기/일시 1932년
개칭 시기/일시 1932년부터 1936년 사이
성격 교육 기관
정의

1904년 5월 화룡현(和龍縣) 영암촌(英岩村)에서 천주교 신자 김성덕이 개인적으로 설립한 후 발전하여 대랍자 해성학교(大拉子 海星學校)로 불린 교육기관.

개설

간도(間島)의 화룡현 삼원봉(三元峰) 영암촌에 있던 천주교 교육기관으로 천주교 삼원봉 공소에서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훗날 덕흥학교, 대랍자 해성학교(大拉子 海星學校)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한글과 천주교 교리를 주로 가르쳤지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변천

간도에 한인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형성되면서 교리와 한글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생겨났다. 성당이 있는 곳에는 학교가 있고 학교가 있는 곳에는 성당이 있다고 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학교들이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세운 학교로는 1905년 용정에서 개교한 삼애학교(三愛學校)가 최초이다.

화룡서숙은 1904년 5월 14일에 화룡현(和龍縣) 영암촌(英岩村)에서 천주교 신자 김성덕이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설립 1년 후에 덕흥(德興)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가, 1911년에 가서는 덕흥학교(德興學校)라 하여 정식으로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7년에는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1922년에 경제 사정으로 인하여 두 학교를 통합하여 남녀공학으로 운영하였다. 1931년에 화재로 학교 건물이 소실되자, 1932년에 학교를 대랍자(大拉子)로 이전하였다. 학교 명칭도 왕심(王心), 덕흥 등으로 몇 차례 바뀌다가 최종적으로는 대랍자 해성학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룡서숙 이외에 1918년에 연길현 팔도구 본당에 조양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21년 용정 해성학교, 1924년 명월구 해성학교, 1931년 연길 해성학교, 1934년 훈춘 해성학교 등이 차례로 세워졌다. 당시 이 학교들은 모두 연길 지목구에서 운영하였으며,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교육하였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 학교들이 생겨날 때에는 각 지역 본당의 이름을 따서 학교 명칭을 정했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 연길 지목구 내의 대부분의 천주교 학교들은 해성학교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어 나갔다. 또 각 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학생들의 종교를 보면, 전체적으로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인 경우가 가장 많았다.

교육 활동

학교마다 교과목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역사와 한글, 수신, 윤리, 지리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러한 상황은 외국인 선교사나 한인이 운영하는 여타의 사립학교들과 유사하였다. 간도 지역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학교에서는 암암리에 한인 학생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래서 “광복을 기도하고 민족의 안심입명을 구하라”는 내용의 교육이 있었다. 이처럼 비록 천주교 성직자들이 교리 학습을 위해서 개설한 학교였지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키워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1925년에 조선 총독부 교육령이 제정되면서 4년제 교육이 보통과 6년제로 바뀌었고, 또 이전에 한글로 수업하던 것이 일본어로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현황

1936년 당시에 교원 수 4명, 학생 수 98명이었다. 그 중에서 천주교 신자인 학생은 53명, 예비신자 1명, 개신교 신자 10명 등이고, 나머지는 비신자였다. 또한 졸업생은 총 150명이었다.

참고문헌
  • 고병철, 『일제하 재만 한인의 종교운동』(국학자료원, 2009)
  • 고병철 외, 『간도와 한인 종교』(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 종교 연구소, 2010)
  • 김병찬, 「연길교구의 교육사업 개황」(『가톨릭 청년』 41, 1936)
  • 「간도 교회」(『한국 가톨릭 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