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촌[화룡시]

한자 梨樹村[和龍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숭선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행정촌
개설 시기/일시 1895년 전후
마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숭선진
정의

길림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화룡시(和龍市) 숭선진(崇善鎭)에 있는 행정촌.

개설

이수촌은 남동쪽으로 두만강과 인접하여 있으며, 북·서쪽은 넓은 밭으로 이루어진 언덕인데, 이 언덕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이수촌은 현재 마을의 원로들마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이라 언제, 누구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84년 통계 조사에 의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지명지에 의하면, 1895년 전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2월 조선주차 헌벙대 사령부에서 작성한 「도문강 도선장 및 도섭장 위치 약도 1/500,000」에는 이수촌을 한문으로 대간곡(大間曲)으로 표기하였으며, 북한의 간곡(間曲) 마을과 건너다닐 수 있는 도선장이 있었다.

1916~1917년에 걸쳐 실측한 「한국 오만분의 일 지형도」에는 6개의 블록으로 구획되어 있어 적어도 6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고, 중국측 서남쪽에는 삼밭구비(麻田曲), 샘즐(間灘) 마을이 있으며, 북쪽에는 사득(沙得), 사전리(四屯里), 오전리(五屯里), 사정구비[射亭曲] 등의 마을이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북한의 큰 셋구비[大間曲] 마을과 마주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광덕(光德) 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현재 지도와 답사를 통해 살펴보면 이수촌중국측 서남쪽은 간평(間坪) 마을, 북쪽은 토성리(土城里)와 사정곡, 동쪽으로는 북한의 간곡 마을, 남쪽으로는 북한의 흥암(興岩) 마을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독립운동자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 흩어져 있는 마을을 모아 집단 부락을 만들고 부락 주위에 토성을 쌓아 집중적으로 관리하였다. 이수촌은 일제 강점기의 집단 부락으로, 1916~1917년에 실측한「한국 오만분의 일 지형도」의 사득, 삼밭구비, 배나무 구비 마을을 합병하여 현재의 이수촌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사전리가 현재의 토성리 마을이고, 오전리가 사정구비와 합병하여 현재의 사정곡이 되었으리라 추측되며, 샘즐이 현재의 간평 마을이다. 집단 부락을 만들면서 쌓은 토성은 현재 모두 없어진 상태이고 약간의 터와 돌들이 남아 있다.

명칭 유래

이수촌의 명칭은 1911년 2월의「도문강 도선장 및 도섭장 위치 약도」에서는 대간곡으로 표기되었으며, 1916~1917년에 거쳐 실측한「한국 오만분의 일 지형도」에는 한글 명칭으로 배나무 굽이로 되어 있고, 한문으로 이수곡(梨樹曲)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터뷰에 의하면 마을에 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그 이외에도 옛날 분들은 마을 명칭을 배나무굽, 배나무동, 또는 사듥, 꼬지개, 굿수당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이 명칭을 계속 사용하다가 1959년에 한문을 직역하여 이수촌이라 명명하였다.

형성 및 변천

이수촌은 1895년 전후에 형성된 마을이다.

자연환경

이수촌은 남·동쪽으로 두만강과 인접하여 있으며, 북·서쪽은 넓은 밭으로 이루어진 언덕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참고문헌
  • 최효성·임진화·김태영,「두만강 북안 조선족 농촌 마을 공간 구조의 형성과 변화」( 『대한 건축 학회지』 23-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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