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촌[매하구시]

한자 火星村[梅河溝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길림성 길림시 매하구시 복민가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행정촌
면적 6,200여 무
인구[남/여] 2,000여 명
개설 시기/일시 198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
마을 길림성 매하구시 복민가도
정의

길림성 길림시 매하구시(梅河口市) 복민가도(福民街道)의 한인[조선족] 마을.

개설

길림성 매하구시 복민가도 화성촌은 1930년대 평안도 출신의 이주자들로 형성된 매하구시 최대 한인 마을이다. 화성촌은 6,200여 무(畝)의 농토에 2,000여 명의 조선족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본래 농촌 마을이었는데, 최근 매하구시에 편입되면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19030년 이전 평안도 출신 이주자들이 건설한 농촌 마을이었다. 당시 남자가 술을 만들기 위해 냄비를 설치하고 길가에 ‘화성주관(和盛酒馆)’이란 간판을 내걸고 술을 팔았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이곳을 화성보(和盛堡), 화성포(和盛铺) 등으로 불렀다.

광서(1871~1908) 초기에 해은사(海恩社)에 속하였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뒤 1912년 연화포향(莲花泡鄕)화성둔(和盛屯)이라 고쳐졌다. 1933년 반석현(磐石縣)의 한인 가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논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짓게 되면서 연산촌(連山村)에 속하게 되었다. 1947년 농지개혁 당시 6구(區) 삼인반촌(三人班村)과 업가촌(業家村)에 속했다. 1956년에는 이로향(李炉鄕) 신생활고급사(新生活高级社), 1958년에는 서광인민공사(曙光人民公社) 화성관리구(和盛管理區), 1962년 화성대대(和盛大隊)가 건립되었는데, 조선족 마을로 이로인민공사(李炉人民公社)에 속했다가 1983년 화성촌으로 바뀌었다. 1993년 구역이 확대되어 광명가도(光明街道)에 편입되었다가, 2001년 복민가도(福民街道)에 편입되었다.

현황

매하구시 도시 건설 확장 정책으로 화성촌에 아파트가 건설되고 조선족 집중촌 건설이 추진 중이다. 화성촌에는 매하구시 조선족 중학교, 매하구시 짚대 발전소가 건립되었고 8차선 남환 도로, 8차선 건국 도로가 화성촌 경내를 지난다. 이러한 각종 건설에 화성촌의 350무의 땅이 수용되었다. 특히 조선족 중학교 이전의 영향으로 주변으로부터 조선족이 유입되고 있다. 매하구시에서 새로운 조선족 집중촌이 형성되었다.

화성촌은 2008년부터 벼 생산 전 과정에 기계화를 도입하였다. 많은 조선족 마을에서 주민들이 외지로 떠나고 농토가 타촌 촌민에 의하여 경작되면서 조선족 마을이 황폐화 되어가고 있지만 화성촌은 마을 주민들이 모든 농토를 경작하고 있다.

화성촌은 2008년부터 벼 생산 전 과정에 기계화를 도입하였다. 많은 조선족 주민이 외지로 떠나고 농토가 다른 지역의 촌민에 의하여 경작되면서 조선족 마을이 황폐해져 가고 있지만 화성촌은 마을 주민들이 모든 농토를 경작하고 있다.

화성촌의 벼농사가 잘되는 이유는 조선족들의 벼 생산 기술 능력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촌 지도부가 벼 판매, 대부금, 비료, 농약 구입 등을 책임지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끼다고마찌 벼를 재배하여 쌀 수출을 통해 많은 이익을 보았다.

2008년 봄 화성촌 지도부는 7호의 벼농사호를 묶어 주식 합작사인 화성 농업 기계화 생산 전문 합작사를 건립하였다. 이에 최대 재배 면적이 600무에 도달하였고 2,400무의 논에 기계화가 도입되었다. 기계화 합작사는 중국 정부의 농기계 구매 보조금 60만 원[RMB], 촌민투자 60만 원으로 설립되었다. 이런 자본금으로 수확기 2대, 소형 이앙기 14대, 하우스 60동, 파종기 4대, 트랙터 5대 등을 구입하였다.

매하구 화성촌 현대화 농업 조선족 집중촌으로 거듭 (『중국 조선족 종합 뉴스』, 2009. 1. 21)

(http://www.korean3040.com/bbs/board.php?bo_table=0301&wr_id=9400&page=18)

참고문헌
  • 재외 동포 재단,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마을 현황 연구』(재외동포재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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