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디촌[길림시]

한자 알라디村[吉林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길림성 길림시 용담구 우라가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행정촌
면적 경작지 394㏊(2009년 기준)
가구수 총 654가구 2660명, 조선족 2400명(2009년 기준)
개설 시기/일시 1932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8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8월 14일
정의

길림성 길림시 용담구(龍潭區) 우라가진(乌拉街镇)에 있는 한인[조선족] 마을.

개설

알라디촌은 길림성 길림시 용담구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리적으로 제2송화강 동쪽 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길림시로부터 약 40㎞ 떨어져 있다. 『아라디촌지』에 의하면, 이 지역은 오랫동안 초목이 우거지고 유목이나 수렵하던 지역제 만족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였고, 청나라 때인 1727년(용정 4)에 이르러 ‘용길주’가 관할하는 자연 촌락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1930년대 경상북도안동, 예천, 상주 등지의 한인들이 이주해서 불모지를 옥토로 일구어냈다. 그들의 삶과 문화는 이주 후 정착 과정에서 한족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지만, 언어를 비롯한 생활과 민속은 주로 경상도에 뿌리를 둔 것이다.

알라디촌은 한때 500가구가 넘고 2,000명이 웃도는 한인[조선족] 마을이었지만, 최근 들어 인구감소와 고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조선족 2세, 3세 젊은 층들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한국이나 중국 내 대도시로 떠난 상황이다. 지금은 한족이 대거 이주하여 살고 있어 조선족 마을이라고 규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명칭 유래

‘알라디’는 본래 ‘언덕’이란 뜻의 만주어 ‘알라’와 ‘아래’란 뜻의 ‘디’를 합한 말이다.

형성 및 변천

한인들이 알라디촌에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이다. 당시 장도관, 남광호, 도판동이 이주하였다. 일제 패방 후 1946년 국민당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서 알라디 사람들은 피난을 떠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었다. 1948년 중국 내 국공내전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와서는 습지를 다시 개간하면서, 점차 인구가 증가하였다. 2009년 8월부터 조선족 민속 마을 건설에 착공하였다.

이주 1세대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이주해 온 경우가 많았다. 10세 전후에 부모님을 따라온 이들은 고향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이주 후에도 한족 문화를 직접적으로 겪기보다는 부모 세대가 행했던 생활풍습을 배우며 자랐기 때문에 다른 세대들에 비해 이주 시점의 한국 문화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자연 환경

자연 환경은 산지가 거의 없고,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지대 습지여서 300여 개의 늪이 있었다. 주변 하천으로는 제2 송화강이 있다. 알라디 지역은 척박한 환경 탓에 사람들이 살 수 없었던 불모지였다. 인근 마을 주민들이 간혹 가축을 방목하는 곳으로 활용했으나, 생업 활동 장소로 활용되지는 않았다.

현황

길림 시내와 30㎞, 우라가만족진과 8㎞ 거리상에 있는 알라디촌은 8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동서 길이 4㎞, 남북 길이 3㎞, 총 면적은 6.05㎢에 달하며, 알라디촌의 전체 경작지는 394㏊에 달한다. 총 654가구에 2,660명의 인구중 조선족이 2,400명이다. 알라디촌은 중국에서 가장 큰 한인[조선족] 마을 중 하나였다.

알라디촌은 문화 대혁명 시기부터 모범촌, 부유촌으로 이름났다. 알라디에는 30여 개의 기업이 있으며 전 촌의 연간 생산액은 4,120만원에 달한다. 1980년대 개혁개방 후 알라디촌 역시 사람들이 도시로, 한국 등 해외로 빠지면서 인구가 격감했다. 이에 세대 수가 600여 세대에서 2010년 7월 기준 200세대로 줄었고, 마을의 상주인구는 800여 명에 불과하다.

알라디촌의 소학교는 1937년 세워졌다. 교명은 영진 알라디 국민 우급 학교(永眞阿拉底國民優級學校)였다. 구성원은 교사 15명, 학생 300명이 있었으며, 1945년까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편성되었다. 당시는 일본 강점기였기에 강제적으로 일본어 수업을 받아야 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는 중국 국민당과 팔로군의 해방 전쟁으로 학교 수업이 중단되었다. 1948년에 알라디 마을이 해방을 맞은 이후 촌민의 노력에 의해 학교가 다시 정상화되었으며, 당시 학교의 이름이 ‘영북현 요강구 동명 완전 소학교’로 바뀌었다.

이때 교사 6명, 학생 190명이 있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중국 제1차 5년 발전 계획 기간에 학제가 5년제로 변경되었다. 1957년에 알라디 민영 중학교가 개설되었다. 당시 교사 19명, 소학생 300명, 중학생 25명에 달했다. 1969년에 문화 대혁명의 영향으로 교사들이 수업을 못하게 되고, 학교 교육은 큰 어려움을 겼었다. 1975년 마을에서 민영 고중까지 개설되었고, 학교 이름이 ‘알라디 십년제 학교’로 바뀌었다. 이 시기 학교 교사는 34명, 소학생은 304명, 중학생은 140명, 고등학생은 55명이 있었다. 또한 대대가 자금을 지원해서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4세부터 6세까지의 마을 어린이 120명이 무료로 입학했다. 1981년 중국 정부가 민영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대학 진학 자격을 제한하면서 학교 이름이 알라디 조선족 중심 학교로 바뀌었다. 알라디 고등학교가 개설된 후 7년간 15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대학 진학자는 50명에 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어 1990년대에는 입학생은 없고 졸업생만 생기는 현상이 벌어졌다. 2013년 4명의 학생이 졸업하면서 2014년에 폐교되었다.

2009년 11월, 알라디촌에서 알라디 조선족 민속촌 프로젝트 설명회가 열렸다. 알라디촌에서 주최하고 길림시 조선족 군중 예술관이 주관한 이번 회의에서 용담구 정부 대표, 길림 시민위, 길림성과 길림시 각계 조선족 대표, 중앙 민족 대학, 연변대학의 민족학 교수, 한국 동양 일보사 조철호 회장 및 길림 신문, 요령 조선 문보, 강성 일보사 등 매체 기자 총 100여 명이 참석했다.

알라디 촌 지도부는 알라디 민속촌을 건설하여 관광 자원을 개발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용담구 정부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에 2억 800만원을 예산으로 3년에 걸쳐 민족 공업 구역, 상업 구역, 민속 마을, 신촌 구역, 원주민 개조 구역, 문화 광장, 학교, 운동장, 노인 복지 회관 등을 완성했다. 2010년 8월, 국제 온돌 학회는 알라디 민속촌을 ‘국제 온돌 학회 실습 기지’로 정한 뒤, 회원 30여 명이 길림시 알라디 민속촌에서 전통 온돌 놓기 시공을 벌였다.

알라디촌의 인구 변화를 보면, 세 가구로 시작하여 2011년 약 600여가구가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1960년 이전에는 대부분이 조선족이었지만, 대외적인 환경 변화에 따라 한족과 만주족들이 이주해 와서 현재는 200여 명의 한족과 만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2011년 2,600여 명의 조선족 중 800여 명은 한국으로 건너 갔고, 1,200여 명은 중국길림시 등 대도시로 떠나갔다. 소학교는 재학생 3명이며 유치원생은 5명이다.

참고문헌
  • 『중국 알라디촌 조선족의 생활과 민속(해외 한민족 연구 총서2)』(민속원, 2014)
  • 『중국, 경상도 마을을 가다』(한국 경상북도·(사)인문 사회 연구소, 2011)
  • 「알라디 중국 조선족 제1민속촌 꿈꾼다」(『길림 신문』, 2009. 11. 26.)
  • 「아라디촌 조선족 소학교 현황」(『길림 신문』, 2010. 7. 22)
  • 「알라디 민속촌 온돌 문화로 다시 뜬다」(『길림 신문』, 2010. 8. 17)
  • 『길림 신문』(http://kr.chinajilin.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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