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水田 開發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재만 한인들이 벼농사를 짓기 위해 했던 수전 개발 사업.
중국 동북 지역의 수전 개발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청의 압록강 대안[북안, 北岸] 지역에 대한 봉금(封禁)이 완화되고 북방 지역 한인(漢人)들의 한전(旱田) 위주의 개발 붐에 힘입어 1875년에 압록강 상류의 대안인 통화 지역에서의 재배 성공을 시점으로 한인들에 의해 개시되고 줄곧 담당되었다.
1932년 9월 만주 사변 전 사회 경제 전반에 결정적 역할을 한 동북 지방 당국의 중국인 개개인과 도전 공사(稻田公司)에 의한 벼농사 권장 정책, 전문적인 관리 기구인 수리국, 수리 분국의 설치를 통한 수리 분쟁 조정과 수리 관리의 강화, 저습지를 포괄한 황무지의 지속적인 감가(減價) 불하 정책 등은 객관적으로 재만 한인의 수전 개발에 결정적인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동북 지방 당국의 벼농사 권장은 어디까지나 중국인 위주의 벼농사 권장이었다.
19세기 중엽으로부터 동북 각지로 이주해온 조선 이주민들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험난과 싸우면서 진펄을 갈아 물도랑을 빼고 논둑을 만들고 강물을 끌어들여 논을 풀고 벼농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중국 동북 지구는 한국과 압록강,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예로부터 한중 백성들은 빈번히 왕래하였고 관계가 밀접하였다. 1644년 청나라가 중원으로 들어간 후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1,000여 리 되는 지역을 청나라의 발상지로 삼아 봉금 지구로 정하였다. 따라서 조선 정부도 변금 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인의 월경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한반도 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이 봉금령을 어기고 강북 쪽에 와서 몰래 농사를 짓는 현상은 종래로 중단되지 않았다. 비록 청나라에서 조선 개척민들의 곡식밭을 짓밟고 집을 허물며 개척민들을 국경밖으로 쫓았지만 조선 개척민들은 여전히 계속 강을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고, 봉건 통치 계급의 압박 또한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1860년부터 1870년까지의 기간에는 조선 북부에 해마다 큰 재해가 들었고 그후 청나라가 봉금령을 페지하고 이민 실변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조선 기민(饑民)들이 강을 건너 중국 동북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항일 애국 지사들과 파산한 농민들이 대거 중국 동북으로 들어왔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동북 지구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인구는 해마다 급속히 늘어났다. 1894년에 6,500명, 1904년에 78,000명, 1910년에 109,000명에 달하였고 1918년에는 무려 36만 명에 달하였다. 연변 지구에만도 1907년에 16,300여 호에 77,000여 명에 달하여 연변 지구 총인구의 80%를 초과하였다. 이는 동북 지구 수전 개발에 풍부한 인력 자원을 제공해주었다.
근대 동북의 수전 개발은 두 개의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시험 단계로서 19세기말부터 1910년대 이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벼 재배 규모가 작고 재배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다. 두 번째 단계는 대규모적인 보급 단계이다. 1910년대 이후 벼재배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동북 지구에서 제일 먼저 벼재배를 시작한 지방은 남만이다. 연변지구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이 비록 많기는 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조선 북부산구의 주민들로서 벼재배 경험이 부족하였다. 이는 연변 지역의 수전개발이 남만보다 늦어진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1846년 조선인 농민들은 혼강(渾江) 입구 부근에서 벼재배를 하였고 1861년 안동(安東)(지금의 단동(丹東))의 삼도랑두(三道浪頭) 부근에서도 조선인 농민들이 벼재배를 하였다. 그러나 두 곳의 벼재배는 계속 전해지지 못하고 후세에는 벼재배의 흔적만이 남았을 뿐이다.
동북 지구에서 비교적 일찍 벼농사를 시작하여 오늘까지 계승하여온 곳은 요령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하전자(下甸子)이다. 김씨라는 조선인 농민이 이곳으로 이사한 뒤 몇해 동안 애쓴 보람으로 1875년에 벼재배에 성공하여 풍성한 수확을 얻었다. 뒤를 이어 1880년에 안동 탕산성(湯山城)과 봉성현(鳳城縣) 사리채 등지의 조선인 농민들이 벼재배에 성공하였다. 또한 1883년에 김화룡 등 수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통화(通化) 소만구로부터 유하(柳河)로 이주하여 벼를 시험적으로 심어 성공하였다. 그후 1921년까지 유하현의 삼원포(三源浦), 대화사, 소사탄, 선인구, 녹미구 등지의 2,000여호의 조선인 농민들이 3,500여정보의 논농사를 하였다. 1894년에 최효덕이라는 조선인 농민이 벼재배에 성공한후 통화현에서 벼재배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벼재배는 길림성과 동북 지구에서 급속히 늘어났다. 1900년에 유하의 조선인 농민들이 해룡(海龍), 동풍(東豐), 서풍(西豐), 개원(開原) 등지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였다. 이때로부터 해룡현의 대황구, 하마구, 도목구, 하수도자, 사마구, 동풍현의 사평가, 양목림자, 횡도하자, 서풍현의 대청앙, 두영자, 평강, 고려모자, 개원현의 상황지, 하비지, 철령현의 소청자, 이천호툰 등지는 점차적으로 벼가 많이 나는 지구로 되었다.
1905년 조선경상남도 합천군 용정면의 손재두는 네 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동풍현 화수하로 이주 해와 수전을 개간하였으며 같은 해에 또 평안남도 평원군의 김응룡이란 농민이 와우산으로 이주해와 수전을 개간하였다. 1914년 이인선 등 26호에 406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동풍현 사평가, 보안, 녹양, 육합, 영흥, 안락, 노황영 등 7개 지방에서 땅 1,052무를 세맡아 수전을 풀었다. 통계에 의하면 동풍현의 수전 면적은 1922년에 5,045무에 달하였고 1931년에는 9,300무로 늘어났다가 1945년에는 2,608무로 줄어들었다.
1908년에 일부 조선인 농민들은 영길현(永吉縣)으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였으며 후에는 또 송화강(松花江)과 휘발하(輝發河)를 따라 점차 휘남(輝南), 반석(盤石), 교하(蛟河) 등지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였다. 반석현의 수전 개발은 1917년경에 시작되었다.
『동북 3성 수전지』에 따르면, 1877~1878년 요령성 신빈현(新賓縣)의 한족 지주 조은해는 조선인 농민들을 고용하여 하공태보라는 곳에서 6,7㏊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었는데 이해에 풍작을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또 50~60명의 조선인 농민들 받아들여 수전 면적을 늘렸다. 그 결과 봉천의 탑만, 북릉, 신빈의 공태보 등 지방도 이름난 벼재배 고장으로 되었다. 1923년경에 북릉, 탑만, 소가둔, 오가황, 진가황, 신빈현의 공태보, 수림자 등지에서 5,000여 정보의 논이 개간되였는데 해마다 15만석의 벼를 수확하였다.
중만 지구의 회덕현(懷德縣) 대유수(大楡樹), 채가, 삼가자, 조양보 및 이통현의 허루쑤 등지에서도 동요하(東遼河)의 물을 끌어들여 수전을 재빨리 개간하였다. 1921년, 공주령, 장춘 및 길림지구의 수전 면적은 5,170㏊에 달하여 벼 수확고가 115,170석 남짓하였다.
서만 지구에서는 1918년경에 50여 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남만 철도를 따라 정가둔을 거쳐 바옌타라[巴彦塔拉]로 와서 수전 117쌍을 풀었으며 후에 점차적으로 통료(通遼), 백성 일대까지 확대시켰다.
북만 일대는 기후와 지리적 조건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논농사를 다른 지방보다 좀 늦게 시작했다. 이곳으로 이주해온 조선인 농민들은 수전농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보다 간고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30년 흑룡강성 수전 면적은 24.19만무(畝)에 달하였으며 1무당 수확고는 100근 가량 되었고 총 수확고는 약 2,500만근에 달하였다.
1945년에 이르러서 흑룡강성 수전 면적은 185.8만무로 늘어나 1930년보다 7.7배 증가되였으며 1무당 수확고는 300근에 달하여 총수확고는 5.38억근으로서 1930년보다 21.5배 성장하였다.
개척 초기에 많은 사람들은 연변은 두만강 유역의 산간지대에 위치해있고 기후가 한랭하고 무상기가 비교적 짧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벼농사를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현상에 만족하지 않은 일부 조선인 농민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나가면서 시험적으로 벼 재배를 하여 끝내 성공하였다.
1927년에 액목(額穆), 돈화 방면의 수전조사단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1868년경 두만강 연안 지구에서 벼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1890년에 두만강안 종성위자(鐘城崴子)에서도 벼를 재배하였다. 1900년에 조선함경남도에서 이주해온 일부 농민들이 해란강(海蘭江) 유역의 세전이벌과 지신 대교동 부근에서 습지를 개간하여 논을 풀어 벼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이곳의 수전면적이 점차적으로 확대되었다.
연변 지구의 조선인 농민들은 해란강, 부르하통하 가야하, 혼춘강의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논을 풀었다. 1906년에 연변지구의 수전면적은 12.50㏊였는데 1912년에는 183.75㏊, 1935년에는 15,975㏊, 1943년에는 24,622㏊로 늘어났다.
연변의 수전분포는 대부분이 세전이벌, 평강벌, 구수하벌, 혼춘벌, 백초구벌, 대석두벌 등 6개 평원에 집중되였는데 총면적은 736㎢평방에 달한다.
수전 개발 및 벼재배의 발전과 더불어 수리 관개 시설도 끊임없이 발전되었다. 1906년 6월, 연길청 용지사 대교동의 조선인 농민 14명은 스스로 자금을 모아 길이가 22정(1정은 109.2메터임)에 달하는 인수로를 파서 7정보의 논을 관개하였다. 이는 연변지구에서 최초의 수리관개시설이다. 1911년 연길현 상의향 팔도구 조선인 농민들도 길이가 12정에 달하는 인수로를 파서 95정보의 논을 관개하였다. 1926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에 대소 50여 개의 수리시설이 있었고 수전 관개 면적이 3,967여㏊에 달하였다.
그 중 논 100㏊ 이상씩 관개할 수 있는 관개 공사가 8개가 되었다. 화룡현 사광사의 관개수리조합에서 경영하였던 광종, 광소 지방의 관개공사는 1922년 2월부터 시작하여 1924년 4월 30일에 마무리지었는데 총길이는 6.73㎞이고 관개 면적은 362.98㏊에 달하였다. 이밖에 또 혼춘현 순의향(純義鄕)의 관개공사(길이 5.43㎞, 관개면적 991.74㏊)와 연길현 수신향(守信鄕)[지금의 화룡현(和龍縣) 두도구(頭道溝) 일대] 평강, 오도구의 관개 공사[길이 1.96㎞, 관개 면적 403.64㏊] 등 비교적 큰 관개 공사가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1920년에 이르기까지 동북 지구의 수전은 대부분 조선족 농민들이 개간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 동북 지방 정부는 벼농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일부 적극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1912년, 봉계 군벌 정부는 봉천 수리국(奉天水利局)을 설치하였다.
수리국은 북릉, 공태보, 오가황, 탑만 등지에서 조선족 농민들을 여용하여 6,000쌍의 수전을 개간하였다. 벼농사가 한전농사보다 수확고가 높고 이익이 크다는 것을 안 봉계 군벌 정부는 또 ‘벼재배 장려 규정’을 반포하였다.
1932년에 세워진 만주국에서도 1935년에 ‘알곡관리법’을, 1943년에 ‘수리조합설립요강’을 반포하였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동북지구의 벼를 약탈하기 위해 취한 조치이긴 했지만 이는 벼농사를 발전시키는 면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20세기 초 국제상의 농업 생산 상황도 동북지구에서 벼생산을 발전시키는데 아주 유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럽의 농업 수확고가 전쟁 전보다 절반 가량 줄어들어 국제 시장에서 쌀값이 폭등하자 벼농사가 여러 농작물 재배 가운데서 이윤률이 제일 높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동북의 수전농사가 희망이 있다.”는 여론이 파다히 일어 각지의 부자들이 앞다투어 땅을 사고 조선족 농민들을 고용하여 대대적으로 수전을 개간하였다. 이에 따라 1918년경부터 동북 3성에서 벼농사 붐이 일게 되었다.
당시 각지의 논 면적을 보면 개원지구가 9,900쌍, 무순지구가 5,700쌍, 간훈지구는 6,350쌍되었다. 1929년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전 동북지구의 수전 면적은 111,000여 쌍에 달하였다. 1930년까지 동북 각지의 조선인들은 황무지를 총 643,242ac 남짓 개간하였는데 그중 수전이 23.5%를 차지하였다. 수전 개발과 더불어 벼 수확고도 급속히 늘어났다.
벼농사의 급속한 발전은 동북지구의 대외무역 발전에 추진력을 실어주었다. 벼는 수확고가 높고 판로가 넓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가 동북 지구에 침투됨과 더불어 입쌀의 상품화가 심화되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20년대 말 동북지구 조선족 농민들이 생산한 농작물 총 수확고 가운데서 64.8%가 상품이 되었는데 그중 입쌀의 판매률이 75%이상 되었다고 한다. 입쌀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러시아와 조선, 일본 등지에 대량으로 판매되었다.
조선족들은 길림성과 동북 기타 지방에서 부지런히 수전을 개간함으로써 발해 시기 이후 1,000여 년 간 중단되었던 벼농사를 회복, 발전시켜 밭농사만 하던 단일한 국면을 개변시키고 동북 지구의 농업 발전에 역사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과정 속에는 조선족들의 부지런함과 과감하게 자연을 정복해나가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