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現代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1945년 8월 해방 이후 재만 한인의 변천사
1945년 8월 당시 재중국 조선인의 수는 200여 만 명에 달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만주[동북 지방]에 거주하였으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일본 항복 이후 치안의 부재와 일부 중국인들의 배척 정서 때문에 관내 지방 조선인 대부분, 그리고 일부의 만주 조선인들은 한반도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100만 이상의 만주 잔류 조선인들은 현지에서 무장 조직을 결성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삶의 터전을 지켜나갔다.
일본이 항복하자 관내 지방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조선 의용군은 급속히 만주로 이동했는데 제1 지대는 남만주에 제3 지대는 북만주, 제5 지대는 연변으로 진주하였다. 이들은 현지의 조선인 무장 조직을 흡수하여 부대를 정돈하는 한편 동포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만주에서 국·공 내전이 발발하면 공산당 편에 가담하여 국민당 세력과 싸웠는데 그 과정에서 인원을 확대하고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1948년 말 공산당 군대가 전 만주를 평정한 후에도 일부 조선인 부대는 만리장성을 넘어 양자강 이남까지 국민당 군대를 추격하였다.
당시 부대를 이끌었던 조선인 최고 지휘관들은 중국 혁명에 참가하여 중국에서 조선인의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야 하며 또한 전투 역량을 길러 조국 한반도로 돌아가 남북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중의 사명 의식을 지녔다.
국공 내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선인 거주 지구에서는 친일파 청산 및 토지 개혁 운동이 진행되었다. 토지가 없거나 적은 조선 농민들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분배받아 소유할 수 있었다. 1948년 말 중국 공산당은 만주 조선인들은 토지 소유권이나 거주권 등을 갖는 중국 경내의 소수 민족이라고 규정 하였다. 그러면서도 아울러 한반도에 조국이 있는 소수 민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선인들은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먼저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7월 조선 사단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과 제164사단이 북한으로 건너와 각각 인민군 제6사단과 제5사단이 되었다. 이듬해 봄에 다시 인민해방군 4야전군 독립15사단은 입북하여 인민군 제12사단이 되었고 뒤이어 1개 연대가 입북하여 인민군 제18연대(제4사단 휘하)가 되었다. 중국 조선인 부대의 이같은 입북이 있음으로 해서 북한 최고 지도자들은 남북전쟁을 결심할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 전선에 걸쳐 북한 인민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중국에서 입북한 부대 대부분은 이때 선봉 부대로 참전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인민군 제18연대는 서울의 중앙청을 점령하는데 앞장섰으며 오산에서는 미국의 스미스부대를 격파하였다. 이후 제6사단은 호남을 석권하고 진주를 넘어 마산 근처까지 진출하였고 제5사단은 포항 인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대부분 낙동강 전선에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한 타격을 받았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구(이후 자치주)가 건립되었다. 이 무렵부터 공식적으로 조선인은 조선족으로 불리게 되었고 중국만이 유일한 조국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1952년에는 농업의 집단화가 시작되었다. 연변의 경우 그해 연말까지 초급합작사 74개가 설립되었는데 전 경지면적의 88%가 여기에 속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 고급합작사 설립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1956년 2월까지는 연변 전체 농호의 98.2%가 참여하였다. 고급합작사에서는 토지는 물론이고 가축이나 대형 농기구 등을 모두 공유로 하였다. 다시 1958년에는 생산과 행정을 통합한 인민공사 체제로 개편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구 성립 이후에도 일반 조선족들은 여전히 한반도를 자신들의 조국으로 인식하였다. 대약진 운동[1958] 실패로 기근이 만주에 만연하자 6-7만 명의 조선족이 불법적으로 강을 건너 입북한 것도 그와 같은 조국관 때문이었다.
중국은 조선족을 한반도 조선인[한국인]과 분리시키고 중국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대중 운동을 일찍부터 전개했다. 그 첫 번째는 1957년의 반우파 투쟁과 그것의 연장인 1958년의 민족 정풍 운동이었다.
이 운동 과정에서 조선어의 순수성 유지를 주장하거나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도 조국이라는 다조국론자, 연변자치주의 영역을 확대하고 산재 지구 조선인을 끌어들여 성(省)급의 자치구를 건설하고자 했던 지식인이나 간부들이 고난을 당하였다.
민족 정풍 운동은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중단되었지만 1966년에 발발하여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 속에서 동화 정책은 더욱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의 여타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지식인을 비판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지킨다는 홍위병 세력이 대두하여 전통 문화 파괴에 나섰다. 특히 1966년 8월말부터는 기존의 집권파 타도를 목표로 하는 반란파 군중조직이 도처에 결성되는데 이들 군중 조직들 사이에는 경쟁 차원을 넘는 상호 무장 투쟁까지 전개되었다.
이런 전개 가운데 한반도와 거리를 두게 만드는 조작이 조선족 사회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1967년 8월 초 연변의 한 조선족 반란파는 김일성·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모함을 받았다. 특히 1968년 봄부터 진행된 계급 정리 운동 시기에는 수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의 특무로 조작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다수가 죽거나 장애인이 되었다.
17년간 중국에서 조선족을 대표했던 연변자치주 주장 주덕해가 특무 혐의를 쓰고, 고난 끝에 숨진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람들은 이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북한과 의도적으로 멀어져야 했고 북한과 김일성을 비난해야 하였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에 조선족의 민족 문화는 큰 손상을 입었다. 사찰이나 교회 혹은 비석 같은 조선족의 유적·유물은 대량으로 파괴되었으며 조선족의 풍습이나 고유 신앙은 탄압을 받았고 조선어 대신 한어 사용이 강요되었으며 조선족 역사에 관한 연구는 중단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계급 투쟁 이론을 청산하고 당의 사업 중점을 경제 건설로 전환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농업, 공업, 과학 기술, 국방 등 4부문에서 현대화가 추진 되었다. 한편 개혁개방 시기에는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의 급진적 동화 정책의 기조였던 “민족 문제는 계급 문제”라는 신조가 부인 되었다. 이상과 같은 방향 전환은 조선족에게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과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진행되었다. 연변의 중공 당위원회는 1978년 6월 주덕해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 시켜주기로 결정하였다. 뒤를 이어 그간 누명을 썼던 많은 사람들의 명예가 속속 회복되었다.
개혁개방 시기에는 특히 민족 문화 회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81년에 중국조선족 학회가 창립되었고 1988년 8월에는 언어 문자 사업에 대한 법률이 공포되어 조선어문을 학습하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법률적인 보장 장치가 마련되었다.
문화대혁명 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취를 감추었던 조선족 신문 방송 매체가 다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 때 중단되었던 조선족 역사 발간 작업이 다시 진행되었는데 먼저 1986년에는『조선족 약사』가 발간되었다. 특히 1985년부터는 1,000여 명의 전문가들이 참가한『조선족 발자취총서』간행 작업이 시작되었다.
조선족 농촌의 체제 개혁은 1980년대 초기에 시작되었다. 1983년 전후 조선족이 살았던 만주 대부분의 농촌에 생산 책임자가 도입되고 토지 경영권이 각 농민에게 귀속되었다.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자 노동 효율성이 높아지고 생산도 급증하였다.
한편 대외 개방이 시작되자 일부 조선족들은 북한, 러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북한과의 보따리 장사는 조선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러시아와의 개인적인 변경 무역도 조선족이 주도하였다.
농민들 외에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나 화이트 칼라 계층도 시장 경제 조류에 대거 참여하였다. 과거 주로 공공 부문에 종사하였던 대학 졸업생들 중에서는 외자 기업, 여행사 등에 취직하는 사람들이 늘게 되었다.
정부 정학교 공기업 등에 종사하던 조선족 청장년들 중에는 무역 등 사업에 뛰어들거나 외자 기업에 취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또 도시와 농촌의 젊은이들이 임시 노동자, 음식점 종업원 등으로 일하는 현상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1992년 8월에 역사적인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과거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던 친척 방문, 또는 홍콩을 거쳐 진행되어 왔던 소규모적이며 간접적이고 제한적이었던 단순한 경제 교류 차원에서 벗어나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교육 등 각 영역에서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만주 조선족이 한국이나 혹은 중국 내 한국인 활동 지역으로 대량 이주했다는 점이다. 2010년 11월 말 현재 전체 200여 만 명의 조선족 가운데 한국 거주자가 무려 40만 4천에 달하였다. 조선족은 음식·숙박업 종업원이나 공사장 인부 등 한국인 노동력이 부족한 분야에 특히 많이 취업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조선족은 서울의 가리봉동이나 안산의 원곡동 등에서 집거 구역을 형성해 살고 있다.
한편 조선족의 중국 경내에서의 이동도 활발한데 2005년 당시의 조사에 의하면 심천 광주 등 화남 지역에 6만 명[한국인 4만 명], 상해남경 등 화동 지역에 8.5만 명[한국인 6만 명], 청도위해 등 산동 지역에 18만 명[한국인 12만 명], 북경 천진 등 수도권에 17만 명[한국인 12.5만 명]이 거주하였다.
대괄호 안의 한국인 숫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의 이주는 한국인의 활동과 관련이 깊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 기업은 그곳에서 조선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반면 조선족은 우수한 노동력을 제공하여 한국인의 중국 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북한이나 남한 사정에 모두 익숙한 조선족은 향후 남북 관계의 발전이나 민족 통일 방면에서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