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한자 劇場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문화 시설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7년 8월 2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0년 1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2년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개관, 운용되었던 영화관과 영화 상영 공간.

개설

만주국 당시 영화관은 크게 만계(滿系)와 일계(日系) 밖에 없었다. 재만 한인 전용 영화관은 따로 없었고 ‘조선 영화’는 일계 만주 영화 협회 배급관에서 상영되었다. 한인들은 주로 일계 영화관에서 ‘일본 영화’나 ‘양화(洋畵)’를 즐겨 봤다.

1940년 1월 현재 만주에는 만계와 일계를 합쳐 140개의 영화관이 있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북간도에는 용정 극장[용정]·신부 극장[연길]·도문 극장·국제 극장[도문] 등이 있었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21일, 만주국 정부와 만철(滿鐵)은 영화에 대한 통제와 영화를 통한 선전을 강화하고자 500만원을 출자하여 주식 회사 만주 영화 협회를 설립했다. 대련·북경·도쿄에 출장소를 두었던 만주 영화 협회는 1938년부터 경성의 고려 영화 협회와도 필름 교환 협정을 맺어 조선 영화를 만주국으로 수입, 배급했고 마찬가지로 고려 영화 협회도 만주 영화 협회 영화를 조선으로 수입, 배급했다.

1942년에 조선 내의 영화사가 강제 통폐합되어 관제 사단 법인인 조선 영화 제작 주식 회사가 설립되자, 만주 영화 협회는 다시 조선 영화 제작 주식 회사와 제휴 협정을 맺어 조선 영화를 수입했다.

‘조선 영화’는 대개 이류관에서 드물게 상영될 뿐이었지만, 재만 한인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만, 영화관이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 거주자가 아니면 영화를 접하기 힘들었다. 도시 거주자라 할지라도 낮은 임금을 받는 조선인에게는 비싼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농촌 거주자나 저소득 계층의 경우 만주 영화 협회나 만주국 협화회(滿洲國協和會), 각 성현 및 신문사 등에서 무료 혹은 싼값으로 보여주던 순회 영사로 만족해야만 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만주에서 상영된 ‘조선 영화’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대개 일계 영화관 중에서도 주로 대봉 극장·대승 극장·장춘좌 등에서 상영되었다. ‘조선 영화’라 할지라도 조선 총독부의 후원으로 제작된 내선 일체 선전 영화 「지원병」과 「그대와 나」는 대형 일류관인 조일좌에서 개봉되었다.

참고문헌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 3-예술사』민족 출판사, 1994
  • 김려실, 「조선 영화의 만주 유입 : 『만선 일보』의 순회 영사를 중심으로」(『한국 문화 연구』32, 2007)
관련항목
관련 웹사이트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