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敎育 |
|---|---|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 지역 | 중국 |
| 시대 | 현대/현대 |
근현대 시기 중국 동북 3성에 거주한 조선인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한 조선족 학교의 조선족 교육.
조선족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중엽 시작된 조선인들의 중국 이주로 조선인 사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인 이주는 과거 16~17세기, 심지어 그 이전의 조선인 이주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우선 이주의 규모가 컸고 중국 내에서 규모를 갖춘 조선인 공동체를 형성시켰으며 사회 각 계층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교육은 매우 빠른 속도로 자리 잡았고 그것은 마침 전환기의 시대적 조류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일부 이주민들은 이주 목적으로 교육에 대한 전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약연과 같은 인물이다. 따라서 선각자를 구심점으로 조선인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 공동체 속에서 교회, 교육, 민족 운동 삼위일체의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조선인 사회단체가 형성되었고 그들의 노력은 교육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노력과 더불어 애국계몽사상이 이미 국운이 기울어진 ‘한반도’가 아닌 새로 형성되는 중국 내 조선인 사회에 전파되었다. 그것은 이미 아래로부터 형성된 조선인들의 수요와 결합되어 교육 구국의 열기로 펼쳐지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내의 조선인 교육은 점차 민족 교육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나아가 민족을 구하자는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효시가 바로 1906년 이상설이 북간도 용정에 설립한 서전 서숙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 동북지역에는 수많은 조선인 민족 교육 기관들이 형성되었다. 민족 교육 기관들은 민족 의식이 투철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면서 명실상부한 교육 구국 운동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민족 교육 기관은 대체로 사립학교의 성격을 띠었다.
중국 내 근대 조선인 학교의 유형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종교 단체에서 설립한 학교, 각 계층 민중이 설립한 학교, 반일 단체에서 설립한 학교, 중국이 설립한 학교, 일본계 학교 등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당시 조선인 학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 사상과 외래 종교 사상 및 애국 계몽의 독립운동 사상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학교로 대표적 사례가 바로 명동학교이다. 둘째, 순수 애국계몽 사상을 기반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이 학교의 사례가 바로 서전 서숙이다. 셋째, 애국 계몽 사상과 민중 의식의 결합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연길현 소영자의 광성 학교나 와룡동의 창동 학교 또는 용정시 덕신향 장동골의 창동 학교 등이 있다. 넷째, 민중 의식을 기반으로 외래 종교 사상을 수용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는 훈춘 옥천동의 동광 학교와 화룡현 대유전동에 설립된 동신 학교이다. 다섯째, 순수 민중 의식을 기반으로 촌민들의 교육 열의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이동춘에 의해 설립된 양정 학당이다.
이상 학교의 유형들은 학교의 성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로 조선인들이 북간도에서 진행한 교육은 사상의 측면으로도 북간도 조선인 교육의 기본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20세기 초 중국 내, 특히 간도에서의 조선인 민족 교육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항일 민족 운동 일환으로서의 뚜렷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둘째, 신학(新學)이 구학(舊學)을 대체하는 과도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셋째, 사립 학교 교육 운동은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넷째, 간도 민족 교육 운동에서 군사 교육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와 같은 간도 조선인 교육은 이미 교육의 평등과 실용주의를 지향하는 근대 교육이었다. 또한 아울러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사실 근대 교육이 중국 내의 조선인 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지만 그리 쉽게 보급된 것은 아니다. 특히 근대 교육에 대한 민중들의 무지와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과의 갈등과 저항으로 근대 교육으로의 체제 전환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은 단순히 근대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라는 공동의 염원이 담겨져 있었으므로 근대 교육이 조선인 사회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하나는 조선 국내 애국 계몽 운동의 연장선에서 추진된 민족주의자들의 근대 교육 보급을 위한 노력, 특히 간민 교육회 및 그 후신인 간민회의 활약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다른 하나는 조선인 근대 교육의 보급과 확장은 중국의 신해혁명 및 그 뒤에 추진된 일련의 교육개혁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 내에서의 근대 조선인 교육은 한민족 교육의 연장선이면서도 자체적 특징을 가지는 매우 특수한 교육의 일환이다. 이는 또한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근본을 잃지 않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한 근본적인 원동력이다. 이러한 조선인들의 교육적 노력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우선, 조선인 교육은 중국 경내 조선인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인들의 마음을 연결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중국 이주 조선인들은 그들의 정신적 통일을 가져올만한 그렇다할 매개물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러한 공동체 내의 통일된 의지를 표현할만한 그 어떤 통로가 구체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다. 따라서 교육은 그들의 정신적 통일과 공동체 통일의식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기제였다.
둘째, 교육은 또한 중국 이주 조선인들에게 끊임없이 자아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중국 이주 조선인들의 경우 지속적인 이문화의 충격을 받으면서 오랜 세월을 겪다보면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그 정체성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중국에 이주하여 생활했던 소규모의 조선인들은 집단적인 이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경우가 있다. 요령성의 박씨 마을이 그 전형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문화의 충격과 끊임없는 동화 압력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교육이다.
조선인들은 교육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아를 인식하고 자기의 공동체 의식과 나아가 민족 의식 및 국가적인 의식을 확인해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중국 내에서 사회구조적 차원에서의 조선인 공동체를 형성한 것은 농경 문화였지만 실지로 그 공동체를 존속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교육을 통한 정신적 유대 관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간도의 조선인 교육은 지금까지 150년을 유지해온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의 정신적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인[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 정책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제한적인 문화 자치를 누리고 있다. 자치주 외에 동북 3성의 주요 도시 및 농촌 지역에서 민족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조선족 교육의 현황을 일괄적으로 파악하기는 대단히 곤란하다. 한인[조선족] 언론에 나오는 교육에 관한 보도들과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종합해 보면, 교육 현황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족 민족 교육은 최근 인구 유동으로 인한 학교 통폐합, 이중 언어 교육 문제, 교재 및 도서의 문제, 결손 가정의 문제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족 교육에 영향을 끼치는 첫 번째 요인은 극심한 인구 이동이다. 인구 이동은 수십 년 동안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던 민족 소학 및 중등 교육의 근본을 흔들었다. 민족 언어의 상실 문제, 학교 통폐합 문제, 교원 부족 문제 등은 모두 급격한 인구이동 때문에 야기된 현상들이다. 인구 이동은 교육 뿐만 아니라, 한인[조선족] 공동체의 기본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중국 한인[조선족] 사회는 지난 30년 동안 전통적인 폐쇄적 농촌 공동체에서 산업화 및 정보화 사회, 지구화 시대의 유목민적 공동체로 바뀌었다.
중국의 교육 당국은 한인[조선족]의 인구 이동에 직면하여, ‘학교 분포망 조절’을 통해 민족 학교의 통폐합을 진행하였다. 조선족 마을의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한인[조선족] 공동체의 근간이었던 ‘조선족 마을에는 조선족 학교가 있다’는 원칙이 무너지게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950년대 초반 중국 동북지방에 1,500여 개의 조선족 학교가 있었는데, 그 수는 2000년 1,195개교[동북 교육 과학 연구소의 통계], 2005년에는 456개교[재외 동포 교육 진흥 재단의 통계]로 나타났다. 2010년에는 255개교[동북아 평화 연대의 조사]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학교 통폐합을 가속화한 원인 중 하나로 외류(外流)현상이 지적된다. 조선족 학생들이 민족 학교를 다니지 않고 한족 학교를 다니는 이른바 ‘외류 현상’은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진출하여 잘 살려면 어릴 때부터 중국 문화와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외류 현상이 최정점에 이르렀던 시기는 1998~2000년 경이라고 한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 한국어[또는 조선어]를 배우는 것이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근년 주춤해지고 있다.
조선족 교육 지도자들은 급속한 통폐합 과정을 겪었던 중국의 조선족 학교들의 변화가 일단 안정세에 접어들었다고 관측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급격한 인구이동을 겪으면서 정리될 학교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통폐합될 학교들도 통폐합과정을 거의 끝마쳤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인[조선족]의 인구 이동도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동북 3성의 경우 조선족 교육 기관으로 소학교, 중학교, 연합 학교, 9년제 학교 등 다양한 형태의 학교가 있다. 이들 기관 모두 학교 및 학생 수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인 연길(延吉)의 대형 고중(高中)까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중을 진학할 학생의 수는 현저히 감소하였는데, 각 학교별 정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명문 학교 순서대로 학생 정원을 채우고 나면 나머지 학교는 충원할 학생이 부족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한 해 정원이 수 백 명씩 되는 학교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장춘, 심양, 하얼빈, 길림 등 다른 대도시에서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들 대도시의 경우 조선족 고중은 1개교만 남고 모두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한다.
조선족 민족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의 수단으로 민족 언어의 사용에 있다. 한인[조선족]은 민족 언어를 지킴으로써 강력한 동화력을 지닌 한족 문화 속에서 민족 정체성과 문화 및 전통을 유지, 보존하여 왔다. 한인[조선족] 사회의 지도자들은 조선어의 보존 및 발전 여부가 민족 교육의 승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한인[조선족] 기성 세대들은 한인[조선족] 젊은이들이 민족 교육을 통해 한족 젊은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한다. 다른 한편 자신의 자녀들이 조선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을 제기한다.
대도시와 한인[조선족]의 산거(散居)지구에서 한인[조선족]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한어로 생활하고 있으며, 조선어는 민족 학교에서도 이미 제2언어가 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등 집거(集居)지구에서도 한족과의 소통이 증가하면서 조선어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부 등 공공 기관에서 한어 능력이 부족하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없고, 민족 대학으로 알려진 연변대학의 교육언어가 오래 전부터 한어가 된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조선족 민족 교육이 당면한 과제 중 하나가 바로 언어 교육의 문제로, 그 내용은 이중 언어 교육이다. 이중 언어 교육의 사정은 지역마다 크게 다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한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산거 지구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중언어 교육을 실시한다. 조선족 학교에서의 이중 언어 교육은 하나는 조선어를 위주로 하고 한어 교육을 보조적으로 하지만, 다른 하나는 한어 교육을 위주로 하고 조선어 교육을 보조로 한다. 또한 저학년에서는 조선어를 위주로 하고 고학년으로 갈수록 점차적으로 한어 교육을 위주로 하면서 두 가지 언어의 교수 과정을 병행 한다는 것이다.
조선족 민족 학교에서의 이중 언어 교육은 집거 지구이냐 산거 지구이냐에 따라,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학과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중언어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조선어나 한어 어느 하나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젊은이를 양산해 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인과는 조선어로 소통이 어렵고, 중국인과는 한어로 소통이 어려운 경험을 느끼는 한인[조선족]이 많다고 한다. 일상적인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전문적인 대화로 들어가면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조선족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가정에서 비롯된다. 부모가 외국이나 대도시에 나가 일하기 때문에 조부모 또는 친척집에 살거나 부모와 떨어져 기숙사에 사는 아동들이 대부분의 학교에서 전체 학생의 60% 이상이다. 많은 경우에는 80%까지 되는 경우도 있다.
동북 3성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결손가정의 학생은 전체 학생의 50-70%로 나타난다. 학교와 학생 수가 급감하는 상황 속에서 남겨진 학생들의 대부분이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결손가정 아동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인[조선족] 부모들의 경제적 욕망, 즉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택한 한국행으로 아이들은 부모 없이 또는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서적 불안을 겪으면서 학력 저하와 일탈행동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가정교육의 공백이 젊은이들의 ‘잃어버린 세대’를 낳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 밖에 조선족 학교의 운영에서 어려운 문제점으로 경비부족, 중견교사의 부족, 장학금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어려움에 직면한 조선족 교육은 나름대로 새로운 방식을 통해 교육의 혁신을 꾀하고 있다. 조선족 학교들은 소인수 학급교육, 이중언어 교육의 강화, 민족문화교육, 결손가정 자녀교양 등의 측면에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근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소학교에서는 소인수 학급교육의 열풍이 불고 있다. 소인수 학급이란 학급당 학생 수 20-30명 이하로 편성된 학급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농어촌 학교가 이농현상에 따라 학교 규모가 작아지고 학급당 학생 수가 감소되어 주로 농촌지역 학교교육에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촌 학교의 경우, 결손가정 아동이나 학력 부진의 학생이 많고, 학습 여건이 부족하거나 교사들의 능력 부족 등으로 소인수 학급교육의 능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소인수 학급교육을 성공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연신소학교의 경우, 한국의 학교와 자주 왕래하고 한국의 ‘열린 교육’ 등 선진교육방식을 끊임없이 학습하면서 교육 혁신을 성공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연신소학교는 교장실과 교무실을 없애고, 교무행정을 철저히 민주적으로 시행하면서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으로 재정립하였다. 서로 돕고, 서로 배우며, 토론하고 합의해나가는 과정으로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시간을 40분으로 줄이고, 소인수 학급교육을 한두 개의 학급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다가 점차 규모를 확대하여 지금은 전교 35개 학급이 모두 소인수 학급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연신소학교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키웠고, 독서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의 성적도 좋아졌고, 학교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결손가정이 많은 아이들의 특성상 외톨이도 많았고 수업을 포기하고 딴 짓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소인수 학급교육을 실시하면서 문제 아동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연신소학교의 소인수학급 교육에 자극받은 연변조선족자치주 교육학원은 이를 조선족 학교 교육 전체로 확산시키기로 하고 연신소학교를 소인수학급 실험학교로 지정하였다.
매달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역의 교사들이 연신소학교에 모여 소인수 학급교육에 대한 교육을 받고 수업 참관을 한다. 소인수 학급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연신소학교는 소인수 학급교육의 핵심 교원들을 위한 연수 활동도 활발하게 조직하였다. 교원들의 독서토론회를 조직하고, 한국제주대학교의 교수를 초빙하여 강의도 들었다. 12명의 실험학급 교원을 한국에 파견하여 열린교육 시험학교를 참관하고 소인수 학급교육에 관련된 풍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소인수 학급교육을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로 확산시키며 조선족 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교육당국은 소인수 학급교육에 대해 ‘연변의 지역적, 민족적 교육 현황과 조건 속에서 교육자원을 효과적으로 발굴하고, 충분히 이용하여 조선족 교육의 질과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방향’이라며 강력하게 추진할 뜻을 세우고 있다. 소인수 학급교육이 정착해 가면서 여러 학년의 학생들을 한 학급에 모아놓고 교육해야 하는 농촌지역 소규모 학교들의 수업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해나가고 있다.
소인수 학급은 일방적인 교수·학습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학년이라도 학습능력이 다르거나, 학년별 학습내용이 달라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연변조선족자치주 교육계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교육방식으로, 조선족 교육이 과거의 침체를 벗어나 새로운 부흥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성급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조선족 교육계는 언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중 내지 삼중 언어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자치주의 교육당국이 이중언어 교육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것은 2003년이다. 한인[조선족] 학생들의 한족학교 진학이 늘어나면서 위기감을 느낀 교육당국은 ‘연변조선족 중소학교 이중언어 교수 개혁 실시의견’을 내고 16개 학교를 이중언어 교수개혁 시험학교로 지정하였다.
소학교 2학년부터 시작하던 한어과정을 1학년에 설치하고 한어 교과서를 새로 편찬하여 필수 한자를 상향 조정하였다. 한어교육의 강조는 학생들의 한어능력을 향상시키는 한편, 한인[조선족] 학생들의 한족학교 진학 열기도 누그러 뜨린 것으로 평가된다. 2010년경 연변조선족자치주 한인[조선족] 학생들의 외류비율(한족학교 진학비율)은 고중이 42%, 초중이 약 36.9%, 소학교는 약 22.2%이며, 소학교 2학년 이하는 10% 수준이라고 한다.
조선족 중소학교의 교장들은 민족교육의 강점을 언어교육에서 찾고 있다. 2011년 동북아평화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족 학교의 59%의 교장들이 조선족 교육의 강점을 ‘언어’라고 응답하였다. 다음 순으로 ‘대학입시 때 민족학교 학생에 10점 가산점’(40%), ‘민족문화 학습’(27%)으로 나타났다. 결국 조선족 학교의 장점은 ‘언어 및 문화’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조선족 언어 교육은 두 가지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이중 언어 교육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조선)어와 중국어 모두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 모두에게 매력적이며, 향후 사회진출에 커다란 장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으로의 유학, 한국기업 취직 등 기회가 넓어지는 한편, 조선어를 선택해 대학입시를 치루면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어 출제, 채점 위원들이 모두 한인[조선족] 교사들이라서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획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일부 학교에서는 영어 교육을 강조하면서 삼중언어 교육으로까지 언급하고 있다.
조선족 중소학교에서 언어 교육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한인[조선족] 학생의 한족 학교로의 외류현상도 줄어들었다. 또한 한족 학생의 조선족 학교로의 진학이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족 교육계는 소인수 학급 교육과 이중 언어 교육 외에 민족 문화 교육에 힘쓰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교육국은 2007년 민족 문화를 계승, 발양하고 민족 문화 교육 과정을 추진하기 위하여 전 주 조선족 중소 학교에서 민족 문화 교육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민족 문화 교육을 정규과정에 포함시키고, 교재 『조선족민족 문화교육』을 출판, 발행하였다.
소학교의 민족 문화 교육은 조선족 전통 미덕 교육과 민족 풍정 소개를 기본으로 민족 언어 문자의 정감 교육, 기본 예의, 의식 주행, 민족 예술, 민족 체육 등 방면에서 체험성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중학교 1, 2학년의 민족 문화 교육은 조선족 역사 교육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애국 주의 교육과 민족 의식 교육을 진행한다. 또한 문화 예술, 지리 문화, 민속 풍정, 예의 문화, 음악 체육 미술 등 방면에서 비교적 계통적인 감상과 실천성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조선족 민족 문화 교육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소 학교의 필수 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다. 소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2주에 한 시간씩 매학기 8시간이 배정되어 있다.
조선족 문화 교육의 목적은 민족 역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민족적 사명감과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민족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정확한 조국관, 민족관, 역사관을 수립하게 함으로써 당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사회주의 조국을 열애하며 조화롭게 함께 공존하는 것을 배우며 자각적으로 민족 지구의 안정·단결된 정치 국면을 수호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교육 당국은 조선족 민족 문화 교육의 정치적 성격을 감추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