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滿洲 映畵 協會 |
|---|---|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예술 단체 |
|---|---|
| 설립 시기/일시 | 1937년 8월 21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3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7년 8월 14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7년 8월 21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3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3년 5월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5년 9월 10월 10일 동북 영화 공사를 설립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5년 10월 10일 |
1937년 8월 21일 만주의 영화인들이 영화 협회법을 토대로 국책 회사로 설립한 영화 협회.
1931년 9·18 사변 이후 일본 침략자들은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사상 문화 통치를 강화했다. 당시 일본의 영화 상인들은 연변에서 일본 무성 영화 「모모타로[桃太郎]」[일본의 전설적인 고대 영웅]를 상영하였다. 1933년 일본인 스즈끼가 연길에 신부 극장을 세우고 영업을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연길·용정·도문·훈춘·돈화 등지에 5개의 영화관을 세우고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적극 펼쳤다.
1937년 8월 14일 ‘주식 회사 만주 영화 협회법’이 공포되고 그해 8월 21일 국책 회사로 만주 영화 협회가 출범했다. 만주 영화 협회는 만주국과 만주 철도 회사의 공동 투자금 500만 엔으로 설립되었고, 영화의 제작·배급·흥행을 독점했다. 심지어 일본 영화의 중국 대륙에서의 배급은 물론 일본을 포함한 제국 판도 안에서의 독일·프랑스 영화의 수입, 배급도 독점하였다.
만주 영화 협회 초기에는 만주국 경찰과 군인의 활약을 그린 영화, 일본에서 흥행한 영화의 번안, 그리고 일본을 ‘만주인’에게 소개하는 영화가 주류였다. 이러한 영화들은 참담할 정도로 흥행에 참패했다. 극장들은 만주 영화 협회의 영화를 외면하고 상해 영화를 보급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만주 영화 협회는 1939년 11월 제2대 이사장에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취임하면서 변화를 모색했다. 아마카스는 자금 문제를 개선하고자 증자를 단행하고 대대적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그리고 종래 문화 영화, 뉴스 영화, 극영화 등으로 구분되던 것을 ‘계민 영화(啓民映畵)’와 ‘오민 영화(娛民映畵)’로 개칭했다. 뉴스 영화와 문화 영화는 구분 없이 ‘계민 영화’로 통합되어 불렸고,고 ‘오민 영화’는 순수 오락을 일컬었다. 즉 만주 영화 협회는 영화 예술의 본래적인 대중성, 오락성에 역점을 두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주 영화 협회는 ‘오락 중시’와 더불어 ‘만주인 중심’으로 영화 제작 방향을 바꾸었다. 영화가 참패한 요인을 만주국 관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이 아닌 일본인 감독이 영화 제작을 맡게 된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만주 영화 협회는 자체적으로 양성소를 설치하고 ‘만주인’ 감독·각본가·스텝·배우 등을 양성하였다. 1943년에 제작한 극영화 11편 가운데 9명이 만주인 감독에 의한 것이었다. 1944년에는 감독·각본은 물론 스텝까지도 만주인이 담당한 영화 「만향옥(晩香玉)」이 제작되었다. 점차 영화의 ‘만주화’가 추진되었다.
만주 영화 협회의 재정은 영화 상영보다는 영화 배급에서 상당수 충당했다. 만주국 내의 일본 영화 배급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만주 영화 협회는 영화의 제작, 상영에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였다.
만주 영화 협회는 만주 전역에 영화관 증설과 영화관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이동 영사대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였다. 만주 영화 협회가 창립되기 전 1937년 말 만주국의 극장 수는 일본계(日本系) 53관, 만주계(滿洲系) 33관 모두 86관 정도였다. 그런데 1943년 5월 일본계 86관, 만주계 88관, 직영관 43관 등 총 217관으로 25% 증가했다.
극장이 없는 곳에서 행해지던 순회 영사를 총괄하기 위해 1942년 순영 중앙 위원회(巡映中央委員會)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정기 순회 영사의 경우 120회를 파견하였고 46만 명 이상이 관람하였다. 만주 영화 협회에서 근무하는 사원은 설립 당시 100명 정도였는데, 1944년에는 1,858명[일본인 1076명, 중국인 711명, 조선인 52명, 대만인 19명]으로 18.6배 가량 급증하였다.
만주 영화 협회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8년 동안 계몽 영화, 「북방의 국경선」 등 계몽 영화 200여 편, 「할빈의 녀가수」 등 오락 영화 120여 편, 「대동아 전쟁 특보」 등 시보 영화 300여 편 등을 제작했다. 이들 영화들은 대개 일본 군국주의를 선전하고 ‘일만 협화’와 ‘대동아’ 정책을 선전하고 일제의 중국 침략을 합리화 하는 것들이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동북민들은 1945년 9월 만주 영화 협회의 모든 설비를 접수하고 10월 10일 동북 영화 공사를 설립하였다. 동북 영화 공사는 국공 내전 당시 영화 기재와 설비를 보호하기 위해 잠시 하얼빈으로 옮겨갔다가 홍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1946년 10월 동북 영화 공사는 동북 영화 촬영소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