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餘糧수레 嶺 넘어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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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작품/음악·공연 작품 및 영상물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대중 가요 |
|---|---|
| 양식 | 남성 독창 |
| 작곡가 | 김유식 |
| 작사자 | 강호혁 |
| 연주자 | 송대윤 |
| 창작|발표 시기/일시 | 1964년 |
여량(餘糧)을 나라에 바치기 위해 수레를 몰고 가는 기쁨을 노래한 것.
작곡가 김유식은 연변 가무단 작곡자, 개산둔(開山屯) 섬유 공장 음악 지도원을 지내면서 〈여량수레 령 넘어가네〉, 〈산으로 가세〉, 동요 〈그네 뛴다야〉 등을 작곡하였다.〈여량수레 령 넘어가네˃는 1964년 12월에 시인 강호혁과 손잡고 창작하였다. 당시 연변 예술 학교 작곡부 사생 20명은 문화 대혁명으로 인하여 화룡현(和龍縣) 상화촌 지역으로 하향을 하였다. 당시 농민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실제 수업을 하는 가운데 김유식이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되었다.
최유식 선생이 반 주임이었는데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직접 김유식과 함께 영을 넘어서 공량 수레를 몰아 화룡까지 갔다 왔다고 전한다. 이런 체험 과정을 통해 김유식은 악상을 떠올렸으며 여량 수레를 몰고 고개를 넘어가는 농민들의 흥겨운 심정을 담아서 남성 독창곡을 완성하였다.
1960년대 한인 농민들은 과학 영농의 열의로 벼농사의 풍작을 거두는 노력을 다하였다. 당시에는 논밭 면적에 따라 국가에 바쳐야 할 규정된 양의 곡식을 공량(貢糧)이라고 하고, 농민들이 먹을 양식과 국가에 공량을 제하고 남은 알곡을 여량(餘糧)이라고 하였다. 풍년이 들면 당연히 여량도 많아지는데, 당시 농민들은 공량은 물론이거니와 여량마저도 나라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바쳤다.
나라를 사랑하는 한인 농민들의 지극한 마음으로 공량 수레보다는 여량 수레를 몰고 영을 넘어갈 때가 더욱 신바람이 났다. 이러한 정경을 노래에 담아 남성 독창곡으로 만들었다.
〈여량수레 령 넘어가네˃는 2부 형식으로 간결하고 절절한 감정으로 농민들의 순수한 심혈을 담았으므로 나오자마자 많은 군중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지금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가요 〈여량수레 령 넘어가네〉는 1964년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바로 대중들 속에서 애창되었으며 가수 송대윤이 독창으로 불렀다.
가요 〈여량수레 령 넘어 가네〉는 가사가 2절로 구성되었으며 악식 결구는 비전형적 혹은 불균형적인 변화 재현이 있는 단순 3부분 형식으로 되었고 박자는 6/8박자, 장단은 굿거리 장단을 사용하였다.
범진령 십리 고개 청줄 마대 박아 싣고 / 여량 수레 줄을 지어 흥겹게 령 넘어가네 / 그 옛날 쪽박 차고 한숨 쉬며 넘던 고개 / 오늘은 복된 살림 여량수레 몰고 가네 /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아 여량수레 넘어 가네 / 왈랑 절랑 소를 몰아 흥겹게 령 넘어 가네1
사원마다 애국 충성 정열로 불타올라 / 지성어린 마음 싣고 흥겹게 령 넘어 가네 / 조국 건설 지원하는 산골 마을 여량 수레 / 풍년을 자랑 하네 행복을 노래하네 /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아 여랑 수레 넘어 가네 / 이랴 낄낄 어서 가자 흥겹게 령 넘어 가네
한인이 범진령 십리고개를 넘어 중국 땅으로 왔으며 이후에 풍년 농사를 잘 지어서 수레 가득 여량 곡식마저 나라를 위해서 바친다는 노래다. 중국 한인의 나라 사랑과 이주 생활사를 반영한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