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興京縣 化興 中學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요령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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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교 시기/일시 | 1925년 |
| 최초 설립지 | 요령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 |
| 현 소재지 | 요령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 |
일제 강점기 요령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에 있었던 조선인 중학교.
오동진을 비롯한 정의부에서는 1925년 흥경현 왕청문 광동 소학교[1922년 설립, 흥경현 왕청문은 현재 신빈현에 속함]를 확대 발전시켜 봉천성 흥경현 왕청문[요령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에 화흥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설립 경비는 의용군들이 조선 경내에서 모집한 의연금과 정의부 관할구 내의 흥경, 통화, 환인 등 현의 조선족에게 모금한 의연금으로 해결하였다.
화흥 중학의 학제는 소학 초등부가 4년, 고등부가 2년, 중학 예비반이 1년, 중학부가 4년이었다. 당시 중학교 학생 수는 1학년 18명, 2학년 17명, 3학년 20명, 4학년 15명 등 총 70명이었는데, 모두 남학생들이었고, 연령 차이도 컸다. 나이 어린 학생은 15~16세이고 대부분 20세 정도였는데, 25세, 30세 되는 학생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연령을 고려하여 적당한 학년에 받아들였다.
제1기 학교장은 황중성, 교감은 이효원, 정치 교원은 김문거, 역사 교원은 박치화, 한어와 영어 교원은 유복산[한족], 명예 교장은 왕동헌[한족]이었다. 특히 왕동헌은 한족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설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왕동헌은 왕청문의 유력자이고 또 흥경 제3 소학[한족 학교] 교장이었다.
화흥 중학 교가
대동의 위력 크개 떨치던
고구려 부여 끼친 옛터에
피땀의 결정 모아 지은집
우리 화흥교라
만세! 만세! 우리 화흥교
만세! 만세! 우리 화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