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在滿 韓人 祖國 光復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반일 민족 통일 전선 운동 단체 |
|---|---|
| 설립자 | 오성륜|엄수명|이상준 등 |
| 설립 시기/일시 | 1936년 5월 5일 |
| 해체 시기/일시 | 1938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7년 6월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7년 12월 |
| 최초 설립지 | 무송현 동강 |
1936년 5월 동북 항일 연군의 정치 조직으로 동만 지역에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
1936년 5월 무송현(撫松縣) 동강(東崗)에서 개최된 조선 인민 혁명군 군정 간부 회의에서 상설적인 반일 민족 통일 전선체 결성을 결정한 후 5월 5일 창설되었다.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 동포는 일치 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 시킬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10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강령의 내용은 "1) 광범한 반일 민족 통일 전선을 실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 인민 정부를 수립할 것, 2) 재만 조선인은 중국 민족과 연합하여 일본 및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 영토 내에 조선 인민의 민족 자치를 실행할 것, 3) 일본 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혁명 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 국가, 일본인,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고, 일부분으로는 빈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을 폐지하여 대중 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농·상업을 발전시킬 것, 6)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 정책과 봉건 사상 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방할 것, 7)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민족·종교 등 차별이 없는 평등을 실현할 것, 8) 노예 노동과 노예 교육의 철폐, 강제적 군 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 교육을 반대하며 우리말과 글로써 교육하고 의무적인 무상 교육을 실시할 것, 9) 8시간 노동제 실시, 노동 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노동법의 확정, 국가 기관으로부터 각종 노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자를 구제할 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연합하며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 친선을 유지할 것" 등이다.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 발기인은 오성륜(吳成崙)·엄수명(嚴洙明)·이상준(李相俊) 등이었다. 주요 지도자는 김일성(金日成) 등 동북 항일 연군의 간부들이었으며, 군사 활동 뿐만 아니라 조선인 대중을 기반으로 한 정치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기관지로 『3·1 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광범한 반일 세력을 모으기 위해 민족주의자·천도교·학생·지식인·반일 지주까지 참가시키는 통일 전선 노선을 지향하였다.
또한 길림성 장백현(長白縣) 일대와 국내의 함경남도 북부 및 평안북도 북부, 함흥·원산·흥남 등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박달(朴達)·박금철(朴金喆) 등 국내 항일 운동가와 제휴하여 1937년 12월 국내 조직인 ‘한인 민족 해방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은 반일회(反日會)·결사대·농민 조합 등 수십 개의 비밀 조직을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그 중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곳은 갑산 공작 위원회였는데, 기관지 『화전민』을 발행하는 한편 군사 시설 파괴·군사 수송 방해 등 항일 운동을 펼쳤다.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는 동북 항일 연군의 조선인 무장 부대와 함께 여러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는데, 1937년 보천보 전투(普天堡戰鬪)가 대표적이다. 이 전투는 그해 6월 4일 동북 항일 연군 제2군 제6사장인 김일성(金日成)의 지휘 아래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전투이다. 당시 이 사건이 국내의 『동아 일보』, 『조선 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면서 김일성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천보 전투 이후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는 일제 당국에 발각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한인 조국 광복회 목전 10대 강령」이라는 전단지가 뿌려지고 이후 9~10월 사이에도 재차 혜산읍(惠山邑)으로 잠입한 3명이 체포된 사건이 단서가 되었다. 1938년까지 계속된 수사의 결과, 그 해 9월 박달(朴達) 등 739명이 검거되었고 지도자인 권영벽(權永壁)·이제순(李悌淳)·박달 등 6명은 사형 판결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 국내 조직이 상당 부분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