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주

한자 尹世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의열단|신간회 밀양지회|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조선민족전선연맹간부|조선의용대 정치위원
출생 시기/일시 1901년 6월 24일
수학 시기/일시 미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35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41년
몰년 시기/일시 1942년 6월 2일
추모 시기/일시 1982년 8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9월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880번지
거주|이주지 중국상해
학교|수학지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82-12
학교|수학지 경상남도 밀양
학교|수학지 남경
활동지 경상남도 밀양
활동지 길림
활동지 경상남도 밀양
활동지 경상남도 밀양
활동지 경상남도 밀양
활동지 남경
활동지 상해
활동지 상해
활동지 남경
활동지 호북성 한구
활동지 태항산
묘소 섭현 석문촌 연화산
묘소 중국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능원 동묘구 3열 17번 묘역
어록비 천안 독립기념관
정의

일제 강점기에 만주 지역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명은 윤소룡(尹小龍), 호는 석정(石正·石鼎)이며 이명은 석생(石生), 세수(世洙) 등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으로 무송윤씨 대사성공파 시조 윤양비(尹良庇)의 25세손이다. 조부는 사헌부 감찰 윤병흡(尹秉洽)이고 부친은 시종원 시중 윤희규(尹熺奎)이다.

활동 사항

윤세주(尹世冑)[1901~1942]는 1901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윤희규의 막내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중학교를 거쳐, 서울의 오성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 고향인 밀양 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11월 길림(吉林)에서 김원봉(金元鳳)이 결성한 의열단(義烈團)에 참가하였다. 의열단의 국내 파괴공작 일원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경성일보사 중 한 곳의 파괴를 목표로 거사를 준비하다가 이른바 ‘밀양 폭탄 사건’으로 1920년 6월에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받았다.

1927년 2월 서대문 형무소 출옥 후,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4월에 밀양 청년회의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28년 7월에는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가 조직되었을 때 총무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간회가 해체된 뒤 중국남경(南京)으로 다시 망명하여, 1932년 10월 조선 혁명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했고, 졸업 후 이 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상해(上海)에서 좌우 독립단체의 합작인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될 때, 핵심 인사로 참여하여 1934년 중앙 집행 위원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1935년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에 소속된 5개 단체가 조선 민족 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결성하자, 당의 중앙위원으로 서기부에서 활동했다. 또한 한글판 기관지 『민족혁명(民族革命)』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했다.

1937년 1월에는 청년 운동 위원회 주임이 되었고, 9월에 상해(上海)에서 대일선무공작(對日宣撫工作)에 참여했으며, 중국중앙 육군 사관 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에서 조선인 특별반 교관으로 독립운동사를 강의했다. 1937년 11월 남경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조직 조선 민족 전선 연맹에 주요 간부로 참여했다.

1938년 10월 호북성 한구(漢口)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 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고, 훈련주임과 한글판 기관지 『조선 의용대 통신』의 주임으로 활약했다. 1941년 봄, 조선의용대가 이른바 ‘북상항일(北上抗日)’의 길에 오르자 1·3 혼성지대의 정치위원으로 부대를 인솔하여 팔로군(八路軍)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으로 갔다.

이 무렵 조선 의용대는 조선 의용대화북지대로 개편되어 팔로군 전선사령부에 예속되었다. 그해 8월에는 화북조선 청년 혁명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42년 6월 태항산을 포위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전에 맞서 항전하다가 장자령흑룡동 계곡에서 전사했다.

묘소

1942년 10월 태항산 석문촌에 안장되었다가, 1949년 10월 하북성 한단시진기로예열사능원(晉冀魯豫烈士陵園) 동묘구 3열 17번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8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0년 9월 사단법인 석정 윤세주 열사 기념 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 밀양 문화원, 『석정 윤세주 열사의 생애와 독립 정신』(밀양 문화원, 2001)
  • 김영범,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역사 공간, 2013)
  • 한홍구, 「태항산에 묻힌 혁명가 윤세주(石正)」(『역사 비평』 1, 역사 비평사, 1988)
  • 노경채, 「윤세주-실천적 ‘청년’ 민족 해방 운동가」(『내일을 여는 역사』 5, 신서원, 200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 중앙 연구원, 1991)
  • 석정 윤세주 열사 기념 사업회 (http://www.yoonse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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