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柳河縣 恩養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교회 학교 |
|---|---|
| 설립자 | 방기전 장로 |
| 개교 시기/일시 | 1912년 |
| 폐교 시기/일시 | 1920년 |
| 최초 설립지 | 봉천성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 |
봉천성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大花斜)에 세운 조선인 교회 학교.
유하현은양학교에서는 애국열에 불타는 열혈 청년들에게 반일 사상과 강한 의지를 배양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은양학교는 1912년에 삼원포 대화사에 세워진 교회 학교의 하나였다. 당시 조선이주민들이 삼원포 일대에 집중되어 동포 사회를 이루었는데 이주 초기 의식주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자연 재해까지 덮쳐 이주민들의 생계 유지가 큰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때 삼원포 교회의 방기전(方基典) 장로는 안동식, 이호림, 김세택 등과 상의하여 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우선 교회당을 교실로 하여 은양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방기전이었다. 이후 1915년 한경희(韓敬禧) 목사가 삼원포에 도착하여 삼원포 교회 목사를 담임하면서 은양학교의 제2대 교장을 겸임하였다. 은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사람은 약 20명 정도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람들로는 허영백, 한선옥, 김학규, 장태일, 김덕근, 강흥락, 감창덕, 조성규, 권녕하, 김병희 등이 있고 이밖에 중국인 교원도 1명 있었다. 남녀 공학으로 개교 초기에 학생수는 남학생 200명, 여학생 170명이었다. 학교 규모가 방대하였을 때에는 학생이 8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학교 건물은 삼원포 서쪽 대화사골 어귀에 세워졌던 교회당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나날이 확대되는 학교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1916년에 교회당 동쪽으로 10여m 떨어진 대화사 산중턱에 7칸의 기역자 단층 기와집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 옆에 넓은 운동장이 있어 축구와 군사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은양학교는 선명한 반일 사상으로 인해 일찍부터 일제 특무 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1920년 9월 25일 경신년 대토벌 때 일제 토벌군이 삼원포에 들어와 교회와 은양학교를 소각하였다. 당시 학교 보위에 나섰던 초대 교장 방기전과 안동식 등은 살해당하였다. 결국 은양학교는 7년 만에 폐교되었다.
은양학교의 학제는 6년이었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였다. 은양학교에서는 애국열에 불타는 열혈 청년들에게 민족 독립 사상을 주로 교육시켜 반일 사상과 강인한 의지를 배양하기 위해 큰 힘을 기울였다.
체조 시간에는 등산과 같은 체력 단련 활동을 주로 하였다. 학생들을 갑과 을로 나누어 고지 쟁탈전을 실시해 실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