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柳河縣 東明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교육 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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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교 시기/일시 | 1922년 12월 7일 |
| 폐교 시기/일시 | 1931년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서문안 |
길림성 통화시(通化市) 유하현(柳河縣)[옛 봉천성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서문안에 있던 조선인 학교.
유하현 동명학교(東明學校)의 설립 취지는 조선족 청소년들에게 문화 지식을 가르치고 이들을 항일 민족 독립 사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었다.
1920년 ‘경신년 토벌’에 삼성 여학교의 교사였던 교회당과 은양학교의 교사가 불에 타버렸다. 그 후 1922년 12월 7일에 한경희(韓敬禧) 목사가 유하현 삼원포 서문안에 다시 동명학교를 세웠다. 당시 그는 삼원포 교육 본회 회장이었다. 이에 앞서 삼원포 대화사(大花斜)의 은양학교와 삼성 여학교의 교장직을 맡았으며 후에는 흥경(興京)[신빈(新賓)]에 삼성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22년 당시 학교장은 한경희, 교감은 김정모였으며, 교사는 5명, 학생 146명이었다. 동명학교는 1930년 3월 한청옥(韓淸玉)이 암살되면서 1931년 만주사변 직후에 폐교되었다.
유하현 동명학교에서 가르친 교과목은 조선어, 작문, 한문, 산술, 역사, 지리, 이과, 중국어, 영어, 부기, 도회, 습자, 창가, 체조 등이고 그 외 군사 훈련도 하였다. 초기에는 초등과와 고등과로 나누었다가 후에 중학반을 설치하였다. 학교의 경비는 매달 초등과에 30전, 고등과에 50전을 내는 것 외에 삼원포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의연금으로 해결하였다.
교장 한경희는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와 연계하여 애국심이 강하고 문화 지식 수준이 높은 졸업생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였다. 교재는 일본 정부에서 강요하는 조선총독부의 것을 쓰지 않고 정의부(正義府)의 항교육부에서 출판했거나 자체적으로 만들어 민족 독립 사상이 담긴 교재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교재를 1,700부를 찍어서 각지 학교에 배포하여 널리 사용하게 하였다. 후에 설치한 두 개의 중학반에는 군사과까지 두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일체 행동을 군대식으로 하였다.
동명학교는 유하현 일대의 조선족들이 집결하여 활동하는 중심이기도 하였다. 매년 동명학교 주최로 체육 운동 대회를 가졌는데 이날은 유하, 해룡, 삼성진, 휘남, 청원, 흥경, 통화, 임강 등지의 청소년들이 모여서 운동 경기를 펼쳤으며, 그 표현에 참가한 인원수가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임은 민족의 단합된 힘을 과시하고 반일 결심을 다지는 선서 대회이기도 하였다.
동명학교에서는 매년 은양학교의 전통을 계승하여 전교 교원과 학생들이 식은 밥을 먹은 후 소고(訴告) 대회를 열고 일제의 침략 만행을 성토하고 민족 독립을 쟁취할 것을 호소하였다. 1927년에 일제가 임강현에 일본 영사관 순관을 설치하려는 것을 알고 동명학교 학생들은 이를 반대하여 5일간 수업을 정지하고 시위를 단행하였다. 일제 침략자들은 동명학교를 눈에 든 가시로 여겨 갑자기 습격하여 교재, 교구, 악기, 책걸상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반일적인 민족 교재를 계속 사용하고 민족 독립 사상 교육을 계속하였다.
1928년에 한경희 목사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그의 아들 한청옥이 제2대 교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일찍이 광주의 황포 군관 학교에서 2년간 학습하고 돌아온 다음 조선 공산당 남만도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한청옥이 교장을 맡은 후 학교를 근거지로 청년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연예대를 조직하고 강습반을 꾸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청년들에게 「무산자」, 「적기가」 등 노래를 가르쳐주고 계급 의식을 키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