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寧安縣 高安村 小學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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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오사구 고안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소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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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이주 조선인 |
| 인가 시기/일시 | 1908년 3월 5일 |
| 개칭 시기/일시 | 1920년대 후반 |
| 개칭 시기/일시 | 1927년 |
| 최초 설립지 | 흑룡강성 영안현 오사구 고안촌 |
흑룡강성(黒龍江省) 영안현(寧安縣) 오사구(烏蛇溝)의 조선족 마을 고안촌(高安村)에서 1908년 3월 5일에 이주 조선인들의 귀화 조건으로 학교 설립을 허락받아 만든 근대적인 소학당.
영안현고안촌 소학당은 조선족 반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흑룡강성목단강 지구의 영안현은 조선족들이 흑룡강성에 와서 제일 먼저 발붙인 곳 중의 하나이다. 당시 오사구의 조선족 마을 고안촌에는 마을 사람들이 꾸린 사숙(私塾)이 있었다. 마을의 촌장이 촌민들을 동원하여 중국 국적에 가입할 것을 신청하자 1908년 3월 5일에 해당 지역의 독헌(督憲)이 학교 설립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사숙을 개량하여 첫 근대식 학교인 소학당을 세웠다.
이 학교는 당시 만청 정부에 등록하였고 정부의 지지와 경제적 원조를 받는 정식 학당이었다. 학교는 계묘 학제(癸卯學制)에 따라 초등 학당의 수업 연한을 5년, 고등 학당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하였다. 설립 초기 교사는 2명이었으며 학생 26명이 있었다.
그 후 고안촌 소학당은 당시 조선 독립군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많은 반일 민족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제에 의해 통제되어 한 때 고안촌 보통 학교로 이름을 고치기도 하였고 1927년 3월에는 또 민국정부의 강경한 태도로 기독교 학교와 통합되어 고안촌 관립 학교로 변경되기도 했다. 당시 학생은 80여 명이었고 교사는 3명이었다.
고안촌 소학당은 국민정부의 관할을 받기 시작한 뒤 학제, 교육 정책, 교수 계획과 교수 내용 등 면에서도 당시 국민당 정부의 통일적 요구에 따라야 했다. 4, 2분단제의 신학제를 실시하였고 수신과(修身科)를 과정 안에서 빼고 국문[중국어], 상식, 강연과를 설치하였으며 삼민주의, 당의, 공민훈련 등의 과정을 추가로 설치하여 국민정부의 정책을 선전하였다. 학교는 설립된 첫날부터 중국 정부와 일본 침략자들의 압박 속에 어렵게 발전하여 나갔다. 고안촌 소학당의 뒤를 이어 흑룡강성에는 근대적 학교들이 계속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