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梁荷山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 독립단 교통 부장|광복군 사령부 선전부장|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육군 주만 참의부|조선 혁명당 정치 부장|국민부 중앙 집행 위원장 |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10월 8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0월 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2월 20일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2월 |
| 추모 시기/일시 | 1969년 |
| 출생지 | 충남 논산군 두마면 |
| 거주|이주지 | 만주 |
| 활동지 |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통화현 |
| 활동지 | 요령성 신빈현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한 항일 독립운동가.
1878년 10월 8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豆磨面)에서 태어났다. 한말에 공주 군수를 역임하다가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대한 독립단 교통부장, 1920년 광복군 사령부 선전부장 및 광복군 참리부 정보국장, 1921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 및 대한 독립단 선전부장, 1927년 3월 임시 정부 군무부 직할 육군 주만 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교육 위원장 및 제3 행정구 위원장, 1929년 4월 국민부 지방부 집행위원 및 중앙 사판소장(中央査判所長), 1931년 12월 조선 혁명당 정치부장, 국민부 중앙 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양하산은 망명 후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서 의병장 출신 박장호(朴長浩)·조병준(趙秉準)·백삼규(白三圭) 등과 함께 교육 사업에 주력하였다. 이후 양하산은 1919년 3·1 운동 후 항일 무장 단체 조직에 착수하여 4월 15일 대한 독립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대한 독립단·한족회(韓族會)·대한 청년단 연합회 등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항일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 하였다.
1921년 4월 양하산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에 그해 11월 11일부터 이듬해 2월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 회의[군축 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활동의 지원을 위해, 8월 17일 상해에서 홍진(洪震) 등과 함께 ‘태평양 회의 외교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상섭(趙尙燮)·신현창(申鉉彰)과 함께 재무 간사를 맡아 우리 대표단의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선전과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 회의의 외교 독립운동 좌절 후 상해 임시 정부가 위기에 빠지고 임시 의정원과 국민 대표회 준비위원회 사이의 대립이 심해져 국민 대표회 개최가 어려워지자, 양하산은 1922년 7월 안창호·신익희·김구·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 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타개책을 모색하였다.
또 무장 독립 투쟁 모색을 위해, 그해 10월 7일 상해에서 김구(金九)·손정도(孫貞道)·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독립에 필요한 전비(戰費) 마련, 군인 양성을 목표로 한국 노병회(韓國勞兵會)를 발기, 조직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 생활을 청산하고 만주로 가서, 1924년 8월 서간도 통화현에서 김승학 등과 함께 육군 주만 참의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의부, 국민부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29년 12월 20일 이당 치국(以堂治國) 논리에 따라 남만주 일대의 민족 유일당으로 조선 혁명당이 결성되고 그 당군으로 조선 혁명군이 편성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조선 혁명당 정치부장을 역임하면서 현익철(玄益哲)·양세봉(梁世奉) 등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을 지휘하였다. 1932년 초산 경찰서 경찰대와 관전현(寬甸縣)의 만주국군의 협공을 받아 소속 독립군을 지휘하면서 항전 하였으나 29명의 독립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양하산이 교전 중 전사한 요령성 관전현 하로하진(下露河鎭)에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