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額穆縣 儉成 中學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 액목진 대강지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중학교 |
|---|---|
| 설립자 | 서로 군정서 부독판 여준 등 |
| 개교 시기/일시 | 1922년 초 |
| 폐교 시기/일시 | 1928년 말 |
| 개칭 시기/일시 | 1924년 |
| 개칭 시기/일시 | 1927년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액목현 대강지 |
액목현검성 학교는 조선인 자녀들에게 군사 훈련과 반일 사상 교육을 시키는 것을 교육 목표로 하였다.
액목현검성 학교의 전신은 1922년 초, 액목현 대강지에 설립된 검성 학당이다. 1924년에 검성 중학교라 개칭하였다. 학교가 대강지에 있을 때에는 세 채의 집 10여 칸을 교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싸황지[현재 신안둔(新安屯)]로 이사한 후에는 15칸짜리 집을 사고 교실 세 칸과 기숙사, 사무실을 새로 더 지었다.
설립 초기에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부독판(副督判) 이사단[여준]이 교장 직무를 담임하고 신흥 무관 학교 군사 교관 출신인 오광선이 체육 교원을 담당하였으며 그 외 여러 사람이 교원으로 있었다.
학생들은 7, 80명 되었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에 달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외지에서 온 청년 학생들이었는데 단체로 생활 하였다. 당초 설치되지 않은 보습과를 가설하여 강사 4인을 초빙함으로써 학교 교육의 질을 제고하였다. 검성 중학교는 1928년 말 일제 당국이 '교육권 회수' 등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폐교하게 되었다.
액목현검성 학교는 학제가 2년제였다. 설립 초기에는 구한말 교재를 사용하였다. 그 후에 자체적으로 교재를 편찬하면서 교재를 바꾸어 사용하였다. 교과목은 조선어, 영어, 산학통편[수학], 동국지리, 대동지리[1914년 이상룡 편찬], 박물 등이었다.
그 외 또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과 반일 사상 교육을 진행하였다. 학생들은 반나절 노동하고 반나절 학습하거나 학습과 노동을 격주로 수행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 검성 중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파와 청년 운동의 발전에 따라 청년 강습소로 개칭되었다. 당시 주요 교육 과정은 정치 경제학, 혁명사, 유물 사관(唯物史觀) 등 정치과와 군체과였다. 검성 중학교 졸업생들은 다른 진보적 청년들과 함께 각 둔(屯)에 내려가 야학을 꾸리고 강연회, 기념 활동, 연극 등의 형식으로 공산주의와 반제 반봉건 투쟁의 사상을 널리 선전하면서 혁명 투쟁에 적극 동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