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喜光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 통의부 특공 대원 |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2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6월 1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7월 22일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1월 20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3월 1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
| 거주|이주지 | 만주 |
| 학교|수학지 | 봉천성 |
| 활동지 | 봉천성 흥경현 |
| 활동지 | 대련시 여순 |
| 활동지 | 봉천성 |
|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원] |
| 동상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251-1[금오산 도립 공원 경내] |
| 동상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251-1[금오산 도립 공원 경내] |
| 흉상 |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두류 공원 인물 동산 내 |
일제 강점기 만주 봉천성에서 대한 통의부에 가담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이명은 박상만(朴相萬)이다. 경주 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박윤하(朴胤夏)이다.
박희광(朴喜光)[1901~1970]은 1901년 2월 15일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다. 16세 때 봉천성(奉天省)남성자 학교(南省子學校)를 졸업했다. 1922년경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여, 의용군 제5중대에 배속되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봉천성(奉天省)에는 친일 단체인 보민회(保民會)와 일민단(日民團) 등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동포들의 단합을 해치고 있었다. 이에 대한 통의부는 소대장 김광추(金光秋)와 대원 김병현(金炳賢)·박희광으로 3인조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들에 대한 처단 임무를 맡겼다.
박희광은 1924년 6월 1일 여순 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 서기로 여순 고등계 첩자인 정갑주(鄭甲周)를 처단하고, 6월 7일 보민회 회장 최정규(崔晶奎)의 집을 습격, 최정규의 장모와 처 그리고 서기 박원식(朴原植)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7월 22일 박희광은 봉천의 일본 요정 금정관(金井館)에서 군자금 300원을 탈취하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과 김병현은 체포되었다.
박희광은 1924년 대련(大連) 지방 법원에서 사형을, 1927년 여순 고등 법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감형되어 1943년 출옥했다. 출옥 후 대련에서 이성갑 등과 함께 임시 정부로 가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이 되어 귀국한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자 위로금 2,000원을 주며 격려했다. 1970년 1월 22일 서울 원호 병원에서 사망했다.
1970년 서울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원 에 안장되었다.
1968년 3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구미시에서 1984년 12월 28일 경상북도 구미시금오산 도립 공원 내에 그의 동상을 세웠고, 대구시에서 1997년 8월 15일 대구시두류 공원 내에 흉상 및 통일 염원 태극 횃불 조각상을 건립하였다. 2011년 11월 17일 금오산 도립 공원 내의 동상을 다시 제작하여 3인의 특공대 부조상과 함께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