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청년단 연합회

한자 大韓 靑年團 聯合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19년 11월
최초 설립지 안동현 홍통구
정의

1919년 동북 3성[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설립 목적

1919년 11월 만주에서 각 지역의 청년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3·1 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 다수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고 3·1 운동의 한계를 반성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항일 운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청년 단체의 집결체로서 조직되었다.

변천

대한 청년단 연합회의 전신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 등이 만주로 건너가 안동현(安東縣)에서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결성한 대한 독립 청년단이다. 1919년 8월 29일 안병찬 등 7명의 간부가 체포되어 잠시 침체에 빠졌으나 안병찬이 병보석 된 후 다시 만주로 갔다. 1919년 11월 안동현 홍통구(弘通溝)에서 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함석은 등 17명은 각 지방 청년 단체를 통일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로 하고 대한 청년단 연합회를 결성한 후 그 설립 취지서를 각지에 발송하였다.

1919년 12월 제1회 총회에서 총재 안병찬, 부총재 김찬성(金燦星), 총무부장 김승만, 서무부장 최지화(崔志化), 재무부장 김시점, 편집부장 이춘근(李春根), 교육부장 이탁(李鐸), 통신부장 오학수, 교제부장 김두만(金斗萬), 노동부장 박춘근, 경호부장 오순근(吳淳根)을 선출하였다. 기관지 주필 오능조(吳能祚)가 뽑혔다. 연합회에 가입한 단체는 59개, 회원은 약 3만명에 이르렀다.

총재 안병찬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각 지방에 의용단을 조직하여 우선 일본 군경·친일 세력을 토벌하며, 기관지를 발간해 세계 대세와 미국의 국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방침과 회의주의를 선전할 것을 공포하였다. 특히 각 단에서는 10명분 이상의 의용대원 경비를 부담하도록 함으로써 자력으로 독립 전쟁을 준비할 것도 결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주요 사업과 활동은 군자금 모집, 의용대원 모집 등이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표명하고 광복군 총영(光復軍總營) 발족을 추진하였으며, 회보로 『대한 청년보』를 간행하였다.

의용대원은 평안북도 벽동(碧潼)·창성(昌城)·의주·삭주 등지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했으며, 1920년 2월 광제 청년단원 최봉린(崔鳳麟)은 일본 헌병대에서 권총을 탈취하였고, 평양 청년단장 박이준(朴履俊) 등 11명은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붙잡혔다.

이처럼 의용대원들은 1920년 6월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한족회(韓族會) 등과 함께 광복군 총영에 흡수 개편되기 전까지 항일 투쟁을 계속하여, 함석은 등 다수가 전사하거나 체포되었다.

참고문헌
  • 채근식, 『무장 독립운동 비사』(대한민국 공보처, 1949)
  • 『한국 독립운동사』3(국사 편찬 위원회, 1967)
  • 윤병석, 『독립군사』(지식 산업사, 1990)
  • 한국 독립 유공자 협회, 『중국 동북 지역 한국 독립운동사』(집문당, 1997)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