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宗鎭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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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홍성 만세운동|신민부|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재만 한족 총연합회 |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8월 |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
| 거주|이주지 | 만주 봉천 |
| 활동지 | 충청남도 홍성 |
| 활동지 | 운남성 곤명 |
| 활동지 | 요령성 영안현 영고탑 |
| 활동지 | 흑룡강성 해림현 |
| 활동지 | 길림성 영안현산시역(山西驛) |
일제 강점기 북경과 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종진은 1901년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에서 양반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홍성의 만세 운동을 지휘하다가 주동자로 구속되었으나 동년 6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서울의 중동 중학(中東中學)에 학적을 두고 지하 운동에 투신하였다.
김종진은 1920년 4월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여 형인 김연진(金淵鎭)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기 반입 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해 가을 다시 북경(北京)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이세영(李世永), 조성환(曺成煥), 이회영(李會榮) 등 선배들과 교류하면서 내외 정세를 관망했다. 1921년 상해 임시 정부 법무 총장 신규식(申圭植)의 소개로 운남성(雲南省) 군관 학교 교도대(軍官學校敎導隊)에 입대하였다. 1925년 4월 졸업 후 남경(南京)과 한구(漢口) 등을 돌며 동지 규합에 나섰다. 1927년 10월 북간도로 가서 김좌진의 신민부(新民府)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1929년 7월 김종진은 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었다. 이 무렵 김좌진의 위탁으로 신민부의 개편 작업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교민의 자치단체로서 재만 한족 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고 모든 조직을 일원화하였다. 김종진은 조직부 겸 농무부를 맡아 교민의 집단 정착 및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1년 공산당원에게 해림역(海林驛) 부근에서 암살당했다.
1968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1977년 대한민국 건국포장,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