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思國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가|사회주의 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고려 공산 동맹 책임 비서 |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11월 9일 |
| 수학 시기/일시 | 1907년 |
| 수학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월~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1월~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8월~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5월 8일 |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 출생지 | 충청남도 논산 |
| 거주|이주지 | 만주|시베리아 |
| 거주|이주지 | 일본동경 |
| 거주|이주지 | 연해주 블리디보스토크 |
| 학교|수학지 | 금강산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일본동경 |
| 활동지 | 길림성 용정 |
| 활동지 |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일제 강점기 국내와 만주, 연해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 항일 운동가.
1895년 충남 연산[지금의 논산]에서 태어나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 김사민(金思民)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서울보성 학교(普成學校)를 중퇴했으며,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후 국외로 망명하여,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 국내를 넘나들면서 청년 운동, 노동 운동, 교육 운동 등 항일 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 운동 전에 귀국하여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 등과 함께 3월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고 4월에 보신각 일대에서 국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0년 출옥하였다.
1921년 1월 서울 청년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4월 이후 조선 청년회 연합회 집행 위원, 조선 교육 개선회 위원, 조선 노동 대회 간부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9월 태평양 회의에 즈음하여 청년회 연합회 대표로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오일 신보(五一新報)』를 발기하고 흑도회(黑濤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2월에는 재일 유학생 중심의 조선 고학생 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조직 하였다.
1922년 봄, 일본에서 귀국한 뒤로는 서울 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의 사상 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그 해 2월 『조선 일보』에 발표된 「전국 노동자 제군에게 격함」[동우회 선언]에 서명하였다. 4월 조선 청년회 연합회 제3차 정기 총회에서 일명 ‘사기 공산당 사건’ 관련자의 제명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되자 서울 청년회 외 8개 청년 단체를 이끌고 조선 청년회 연합회를 탈퇴하였다.
8월 제3차 고려 공산 청년회 중앙 총국 위원이 되었으나, 9월에 당과 공청의 상호 관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훈(趙勳)과 견해 차이가 생겨 고려 공청을 탈퇴하였다. 10월 25일 자유 노동자 대회를 개최하고 자유 노동 조합 발기 총회 개최 등을 지도하였다. 1922년 11월 일명 ‘신생활사(新生活社) 필화 사건’을 계기로 1923년 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 북간도 용정에서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간도 총국과 동양 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였다. 일제 당국이 동양 학원을 탄압하자 검거를 피하여 영고탑(寧古塔)으로 가서 다시 대동 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해 교육 운동에 종사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연해주로 가서 조선 사회 운동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폐병이 악화되어 1924년 6월 귀국하였다. 10월 고려 공산 동맹을 결성하고 책임 비서가 되었으며, 12월 사회주의자 동맹 집행 위원, 1925년 조선 사회 운동자 동맹 상무 위원 등이 되어 활동하였다.
김사국은 1926년 5월 8일 사망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