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강제 이주

한자 滿洲强制移住
분야 역사/근현대|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정의

1930~1940년대 일제가 삼남 지방의 한인들을 동북 3성[만주]으로 강제 이주시킨 행위.

개설

농업 이민은 1910년 경술 국치 당시와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 침략을 경계로 그 시기를 크게 구분할 수 있다. 1931년 만주 사변 이전에는 주로 자의에 의한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주자들은 출신지별로 모여 거주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1931년 경을 경계로 이전보다 일제의 정책적 동원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났다. 자의에 의한 이동에서 강제된 동원, 달리 말하면 이주에서 식민(植民)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한인의 이민 통제 시기

1931년부터 1936년까지는 신규 이주자와 재이주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동원 정책이 추진되기 직전의 모색기 또는 과도기였다. 1931년 9월 만주 사변 이전에는 한인 60만 명이 만주에 정착하고 있었다.

1932년 3월 만주국 성립 이후 관동군은 치안과 안정의 필요, 일본 내의 미곡 사정으로 인한 쌀 증산에 대한 통제의 필요에 따라 한인의 이민을 통제하였다. 그들은 동북 3성에 산재한 조선인들을 집결시켜 이주 범위를 통제하였지만, 일본인 개척민에 대해서는 적극 유치하고자 했다.

당시 일제는 동북에서 식민 통치가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인들에게 ‘통제-안정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집단 이민’ 사업을 추진했다. 새 이주민은 조선 총독부의 ‘이주민증’을 휴대하게 하고, 이주 후에는 집단 부락에 집중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1936년에 이르러 동북의 한인 인구는 85만 4,411명에 달하였다.

한인의 집단 강제 이주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일제는 동북에서 식민 통치가 비교적 튼튼히 확립되었다고 판단하고, 동북을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건설하기 위한 이민 정책을 ‘3대 국책’의 하나로 삼았다. 신규 이주자 모집이 강제성을 띠었고 사기, 동원에 의한 정착지 건설, 집단 부락의 일상 활동에 적용된 연대 책임제와 완력을 동원한 규율적인 통제가 실시되었다.

만주가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변하면서, 이곳에서는 철·석탄·전력 등의 생산과 군수품 공업 등이 확대되었다. 또한 군량 수요를 위한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한인들의 이주 통제도 완화되었고 쌀 생산이 적극 추진되었다.

개척(開拓)이란 이름으로 동원된 ‘식민(植民)으로서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한인 이주의 식민성은 신규 이주자 이외에 재이주자에게도 해당되었다. 그 결과 1937~1939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한인의 90%는 남부 지방 출신자들이었다. 당시 조선 총독부가 각 지역에 할당한 양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가 각각 35% 씩이었고, 강원도가 5%였다. 그 결과 쌀 생산이 늘어나 재만 일본인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일제는 20년 사이에 일본인 100만 세대를 중국에 이주시키되 보조적 수단으로 해마다 조선인 이민 1만 세대를 이주시킴으로써 동북의 ‘토지 개발’에 투입시키려 하였다. 이런 정책의 실시 아래 연변과 동변도, 길장 및 북만 지역의 39개 현에 대량의 조선인이 강제 이주하여 1939년 동북의 조선족 인구는 106만 5,528명이나 되었다.

한인의 집단 개척 이민

1940년 5월, 「개척단법」이 한인 이주자에게도 적용되었다. 1941년 6월 만주 척식 공사는 한인 이주 사업을 담당하고 1942년부터 5개년 간 집단 개척민·집합 개척민 5천호, 분산 개척민 5천 호 규모로 해마다 1만 호씩 5만 호를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 총독부는 이민 적격자를 가려 모집하던 종전의 방침에서 벗어나 지방 행정력을 동원하여 반강제적으로 이민자를 모집했다. 만주의 개척지에 가면 집·농지·소·농기구 등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 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형편이 어려웠던 한인 소작농들을 회유하여 북만의 개척지로 보냈다.

집단, 집합 개척 이민은 1937~1944년 6월까지 모두 166개 집단, 65,059명이 입식(入植)되어 총 96,83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분산 이민 52,916명을 합하면 한인 개척민은 1944년에 거의 15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1945년 해방 후에 일부 한인들은 한반도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던 해인 1949년에 이르러 중국 조선족의 인구는 약 12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참고문헌
  • 김기훈, 「일제하 ‘만주국’ 이민 정책 연구 시론」(『아시아 문화』 18, 2002)
  • 박경숙, 「식민지 시기(1910년-1945년)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한국 인구학』32-2, 2009)
  • 신주백, 「한인의 만주 이주 양상과 동북 아시아-‘농업 이민’의 성격 전환을 중심으로」(『역사 학보』 2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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