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鴻臚井刻石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 지역 | 요령성 대련시 |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
| 성격 | 각석 |
|---|---|
| 양식 | 각석과 비정(碑亭) |
| 관련인물 | 대조영|최흔 |
| 크기 | 암석의 크기는 대략 높이 180㎝, 폭 300㎝, 두께 200㎝이며, 홍려정각석의 크기는 가로 14㎝, 세로 35㎝ |
| 조성|건립 시기/일시 | 발해 |
| 현 소재지 | 일본 왕궁 내 건안부(建安府) 앞 뜰 |
| 원소재지 | 대련시 여순구 황금산 |
당나라 사신 최흔이 새긴 발해 시대의 각석.
홍려정 각석(鴻臚井刻石)은 “칙지절 선로 말갈사 홍려경최흔이 우물 두 개를 파서 영원히 증거로 남기고자 한다. 당 개원 2년[714] 5월 18일.[勅持節宣勞靺羯使鴻臚卿崔忻, 井兩口, 永爲記驗, 開元二年五月十八日]”의 총 29자가 새겨져 있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 왕으로 책봉된 연대가 713년임을 주목하여 최흔의 파견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713년 당 현종(玄宗) 때 홍려경최흔이 대조영 책봉과 관련해 진국(震國)으로 파견되어 진국에 복속된 말갈의 여러 부족을 위로하고, 이듬해 714년 귀국길에 요동 반도 남단의 여순(旅順)황금산(黃金山)에서 우물 두 개를 파고 기념하여 새긴 것을 알 수 있다.
홍려정 각석은 대련시 여순구황금산에 있었으나, 1906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여순(旅順) 주둔 해군 사령 도미오카(富岡定恭)가 일본으로 약탈해 갔다. 이때 각석 뿐만 아니라 각석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비정(碑亭)도 가져갔다.
홍려정 각석은 일반적 비의 형태가 아닌 거대한 자연석에 새겨진 각석이다. 암석의 크기는 대략 높이 180㎝, 폭 300㎝, 두께 200㎝이며, 홍려정 각석의 크기는 가로 14㎝, 세로 35㎝이다.
현재 각석과 비정(碑亭)은 일본 왕궁 내 건안부(建安府) 앞 뜰에 있다. 2000년 이후 중국은 각석과 비정의 반환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